02,11,9, 주일
본문 : 욥40:1-5
말씀 : 라인권목사
평강입니다. 세 주 만에 뵙습니다. 그동안 평안을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이번 여정은 우리가 욥기에서 공부한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 그 자체였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의를 주장하는 욥에게 칭의론을 설명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거룩한 현존 앞에서 세웠다가 야생 앞에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물으십니다. ‘이래도 너는 내가 무죄한 네게 고통을 주었다고 트집-시비-을 잡고 너를 의롭다고 하겠는냐?’ 여기서 자기를 고상한 사람으로 알던 교만한 성자 욥이 비천한 죄인이 되어 입술을 가리고 회개합니다. 이 회개로 마지막 장에서 보듯 구원의 온전한 축복에 이르게 하는 믿음이라는 꽃봉오리가 피어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의 온전한 축복에 이르는 회개가 어떤 것인지를 공부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 욥의 회개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첫째, 욥의 첫 회개는 지식이 아닌 하나님 경험에서 나오는 자기 인식의 고백입니다. 욥은 하나님의 질문 앞에서 나는 비천하다며 손으로 자기 입을 가렸습니다.(4) 이 비천하다는 히브리말 “카랄”은 가볍다, 작다 경멸, 쉽다는 뜻으로 중하고 영광스럽다는 “카보드”의 반대말입니다. 즉 지금까지 자기를 고상한 성자로 알아 자기를 중하게 알아서 친구들의 정죄에 정색하고 펄쩍 뛰던 욥이 자기도 참을 수 없을 만큼 작아지고 가벼워서 그 자기 안에 아무 선한 것이 거할 수 없고 가치로 따지면 버러지 같은 존재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게 하나님 앞에서 욥의 자기 인식입니다. 중한 욥이 죽고 아무것도 아닌 버러지만도 못한 존재가 될 때 욥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이른 겁니다. 이렇게 회개는 의로운 자기가 죽어 죄인이 되는 자기 존재의 죽음입니다. 이 자기 인식 자기 죽음을 고백하는 것이 회개요, 이 회개를 구원론적 회개라고 합니다.
이 욥의 회개에 참 신기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욥의 친구들이 그렇게 욥을 회개시키려고 애를 써도 회개치 않던 욥이 회개한 것은 하나님께서 새로운 진리를 말씀하신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욥을 이 회개에 이르게 한 것이 새로운 진리가 아니라,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겁니다. 이건 친구들과 엘리후가 이미 욥에게 말한 것이며, 욥도 알고 있던 사실입니다. 욥은 친구들이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서 욥을 정죄할 때에 욥9:4-10, 12:7-25, 26:5-14, 28:23 이하에서 하나님의 창조의 권능과 지혜를 아는 것과 참된 지식이 하나님께 있음을 아는 지식이 친구들보다 한 수 위에 있음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욥이 신학적으로 하나님을 알았지만 회개한 것이 아니라, 죽어도 자기 의를 버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 욥에게 하나님이 폭풍 중에 임하셔서 자연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 앞에 세우자 욥이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나타내시자 기존에 알던 진리가 살아 역사하는 불같고 방망이 같은 말씀이 된 겁니다. 즉 지식이 아니라 실제적 하나님 경험이 욥을 회개시킨 겁니다. 이게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논리가 아니라 당신의 임재로 욥을 경외에 이르게 한 겁니다. 이걸 거듭남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임재의 경험이 사람을 거듭나게 하고 거듭남 영은 자기가 자신도 참을 수 없는 천박한 죄인으로 자기를 인식하는 회개의 자리에 이르게 한 겁니다. 이게 공식입니다. 하나님 경험이 중생이고 중생의 결과가 구원에 이르는 회개에 이르게 합니다.
사도 바울이 꼭 욥과 같은 사례입니다. 사도 바울이 빛이신 그리스도를 경험하기 전에는 자기를 난지 팔일 만에 할례 받은 이스라엘 사람이요, 벤야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요, 가말리엘 문하생이며,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로 자기를 크고 중하게 알았습니다. 이 바울이 빛이신 그리스도를 보자 죄인 중에 괴수로 엎드렸습니다. 신학과 성경 지식이 바울을 거듭나 회개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경험이라는 중생이 회개에 이르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아직도 자기를 고상하고 중하게 아는 이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겁니다. 하나님을 만나 중생해야 비로소 중한 자기가 비천한 죄인으로 죽어 회개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를 믿어야 할 이유입니다. 예수를 하나님의 만나고, 예수의 십자가 앞에 서면 중한 사람이 벌레같이 천하고 가벼운 자가 됩니다. 이 존재의 회개 없이 천국문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직도 자기를 중하게 아는 이는 예수께 갑시다. 하나님께서 욥을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 앞에 세우신 것 같이 성령께서 그리스도 앞에 세워 주셔서 중하고 영광스러운 자기가 죽어 비천한 죄인임을 고백하는 회개에 이르시기를 축복합니다.
둘째, 욥의 회개는 믿으면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적인 자기를 회개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실제로 경험한 욥은 입술을 가립니다. 동방에서 이 행위는 수치와 복종을 의미합니다. 욥이 무엇이 죄스럽고 부끄러워 입을 가렸을까요? 앞에서 말씀드린 데로 아담의 자식에 불과 한 사람이 감히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자기 의를 주장한 겁니다. 그다음 죄스럽고 부끄러운 것이 자기에게 고통을 주시는 하나님을 원수 같으시다 한 겁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적의를 가지고 대하시는 것이 아닌가를 의심한 겁니다. 하나님은 욥의 자기 의를 치료해서 그리스도와 구원의 온전한 축복에 이르게 하시는 선한 뜻과 목적을 가지고 계시는데, 욥은 그 하나님을 원수 같다고 한 겁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는 욥이 이렇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지 못한 겁니다. 이게 하나님께서 욥을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 앞에 세우신 이유입니다.
자연의 신비가 그 자연과 야생을 하나님이 만드시고 하나님이 통치하시고, 하나님께서 돌보심을 증거 한다는 것이 39장의 내용이지요. 이렇게 자연이 하나님의 선하신 하나님의 뜻 안에 있다면 욥의 고통을 지으신 분도 선하신 하나님이시고, 그것이 선하신 하나님의 일이라면 고통도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이니 당연히 감사해야 합니다.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 여기서 욥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적인 자기를 부끄러워하고 회개한 겁니다. 자기 지식이 살아 있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이게 아니라고 판단했던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 믿지 못하는 이 자기가 죽은 겁니다. 드디어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욥의 고난의 신비가 풀린 겁니다. 고통도 선하신 하나님의 뜻임을 욥이 확신하게 된 겁니다. 이게 욥의 회개입니다. 불신적 자기의 죽음을 고백하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회개인 줄로 믿습니다.
이 회개가 중요합니다. 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는 이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이 믿음이 없어서 광야에서 만나를 먹어도 죽었습니다. 이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이 은혜 베푸시고 일하실 수가 없습니다. 선하심을 못 믿으면 위기에 직면하면 자기에게 갑니다. 자기와 자기 방법으로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연에 나타난 당신의 영광으로 중한 욥을 죽여주셔서 고통도 하나님의 선하심 뜻임을 믿게 한 겁니다. 그러므로 회개란 이 불신적 자기의 죽음입니다.
아직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지 못해서 하나님이 시험이 된다면 기도원으로 가서 기도하는 것도 좋지만, 자연으로 가야합다. 주님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지 못해 염려하는 이들에게 기도하라고 하시지 않고 공중에 나는 새를 보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시험이 되시면 자연으로 갑시다. 거기 공중의 새와 들의 꽃을 봅시다, 거기서 자연을 지으시고 돌보시는 하나님 앞에 섭시다. 왜냐고 묻지 말고 하나님은 누구신가를 믿음으로 사고합시다. 그러면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들을 주셨고,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주신 그것과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룰 것을 확신하는 믿음의 회개에 이를 줄로 믿습니다.
셋째, 욥의 회개는 다시는 죄에 이르지 않겠다는 침묵의 결단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 비천해진 욥은 입술을 가리고 다시는 말하지 않겠다고 침묵합니다. 침묵은 죽은 자의 것입니다. 산자는 침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옳으니 그르니 하는 것 자기가 살아 섭니다.이 침묵은 무지의 고백입니다. 욥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공의가 어떠니 하며 자기를 하나님 전문가처럼 행세했습니다. 안다는 거지요, 이게 죽은 겁니다. 그리고 이 침묵은 무력의 고백입니다. 자력이 없다는 겁니다. 할 수 있다는 자기가 죽은 겁니다. 이렇게 자기가 죽고 없으니 오직 하나님만 있게 된 겁니다. 이 상태가 되니 하나님 중심이 되어 하나님께 자기를 맞추는 겁니다. 그 하나님이 재앙을 주신 것을 공의가 아니라 불의라고 한 것이 씻을 수 없는 죄가 됩니다. 고통을 주신 하나님을 원수같이 시다고 한 것이 배은망덕한 죄가 됩니다. 다시는 이 죄에 빠지지 않겠다고 침묵으로 결단하고 그 죄에서 돌아선 겁니다. 이게 회개입니다. 욥이 이렇게 회개하니 욥기 마지막 장에서 보듯 그리스도와 구원의 온전한 축복에 이르는 믿음의 꽃봉오리가 피기 시작한 겁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구원에 이르는 회개는 자기 죽음입니다. 중한 자기가 죽어야 그리스도가 구주가 되실 수 있습니다. 칼빈은 욥이 비천하다고 입술을 가릴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의에 자리를 내어 주었다고 했습니다만, 중한 자기가 죽을 때에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믿는 믿음에 이르는 줄로 믿습니다. 자기가 죽어야 불신앙이 죽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선하심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적 자기가 죽어야 합니다. 이렇게 자기가 죽은 중거가 입술이 죽은 겁니다, 입술이 죽은 사람이 거듭나 회개한 한 사람입니다. 이 회개가 그리스도의 온전한 구원의 축복에 이르게 합니다. 이 시간 하나님께서 이 회개에 이르도록 욥을 당신의 현존 앞과 자연 앞에 세우신 것 같이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 앞에 세워서 거듭나게 회개에 이르게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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