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벙어리가 되게 하는 은혜

아브라함-la 2015. 11. 29. 16:31

2015,11,29주일강론

본문 : 눅1:5-25

말씀 : 라인권목사


      교회력은 대림절로 시작되는데 오늘이 대림절 첫 주일이기 때문에 교회는 새해를 시작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대림절은 성탄과 재림을 대망하는 절기입니다. 따라서 대림절의 특징은 준비와 소망에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 남은 한 달을 이 소망으로 잘 정리하시고 준비하여 주님과 새해를 맞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 이 번 대림절 4주일 동안은 눅1장을 공부하면서 성탄과 재림을 맞는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본서를 기록한 누가는 복음서를 예수님의 출생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선구자 세례요한의 출생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즉 누가는 예수님의 출생을 다루기 위하여 세례요한의 출생을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왜 누가는 예수님의 출생기사를 세례요한의 출생고지로 시작합니까? 그것은 약속된 구세주가 오시기전에 약속된 선구자가 오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말4:5-6은 여호와의 날, 즉 구원의 날이 임하기 전에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서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 자녀의 마음을 아비에게 돌이키게 하신다고 예언하셨습니다. 이게 구주가 오시는 순서이고 절차입니다. 먼저 선구자가 와서 그 길을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이 약속된 엘리야임을 증거 하려고 누가는 세례요한의 출생고지와 출생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이신 예수님과 그 사역이 선구자를 필요로 하고 그에게 의존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하는 일이 선구자에게 의존함

이것을 말씀 사역자들 경우를 들어 보겠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 강단에 다른 분이 서시면 제가 강사를 자세하게 그리고 할 수 있는 대로 더욱 찬란하게 소개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래야 청중이 강사를 이해하고 기대감이 커지고 강사도 좀 더 친근하게 청중을 대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받도록 준비해 주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 작업이 안 되면 강사 힘이 듭니다. 모인 사람이 적어 썰렁하고, 냉냉한 마음으로 해볼 테면 어디 해봐라 이런 태도로 있으면 어렵습니다. 그래서 모임이 적은 교회 강단이 힘이 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준비가 필요하지만 중이 제 머리 못 깎는 다고 스스로 자기를 소개할 수 없습니다. 이게 인간의 한계입니다. 잘 준비해주는 조력자가 필요하고 준비된 청중이 필요한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그러셨다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와야 주님이 오시고, 먼저 세례요한의 증거를 받아야 예수님이 등장하시고 사역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바꾸면 약속된 세례요한이 오지 않는 한 예수님은 오실 수가 없고, 세례요한의 사역이 없이는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되는 않는 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하나님의 구원자 예수님과 그 사역이 이 한 인간을 필요로 하고 한 인간의 사역에 의존한다는 것은 참 충격적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실 때, 백성 앞에 나설 때에 마치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불과 구름과 연기 가운데서 나타내시는 것과 같이 영광과 권능으로 임하시고 그 권능으로 시작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이 영광의 하나님이 마치 우리 인간과 같이 사람의 헌신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정말 충격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은혜입니다. 구주가 아무런 약속도 예고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면 백성들이 어떻게 그분이 오실 분인지를 알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에 미리 구원의 날이 이르기 전에 엘리야를 보낸다, 약속, 예고하시고 그 약속, 예고한 순서와 절차를 따라서 세례요한이 오고, 이 선구자가 내 뒤에 오시는 분이 있다! 이게 예고하고. “보라 세상 죄를 죄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이렇게 소개하니 모르는 낯선 사람을 보듯 하는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알고 있는 사람을 보는 것과 같이 구주를 맞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은 당신의 구원자를 보내실 때, 인간의 입장에서 인간의 상식과 절차에 따라서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듯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을 만나듯이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땅에 하나님의 구원을 전함에 있어서 하나님이 우리게 하셨듯이 해야 합니다. 우리교회 복음증거가 원만히 되게 길을 준비하는 세례요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전도가 인간의 상식과 절차와 도리를 따르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을 오시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따라서 이 사실에서 우리가 두 번째 공부할 것은 예수님의 사역에 이렇게 사람을 필요로 한다면 이 사람은 어떤 자격을 필요로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에서 누가가 이 세례요한을 낳은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를 자세하게 소개하는 까닭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 동역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일을 하실 수 있게 하는 사람은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본문을 읽을 때 “역시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면 세례요한을 낳은 부모는 “하나님 앞에 의인이고 흠이 없이 행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두 부부가 레위자손, 제사장이며, 의인으로 율법에 흠이 없고, 13절에 의하면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역시 참대 밭에 참대 나는 법이지!”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경건한 부부가 경건한 자손을 낳습니다. 헌신된 부모가 헌신하는 자녀를 둡니다. 그래서 우리는 위대해지를 구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은 사가랴의 이 모든 장점을 헛것으로 만드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습니다. 천사가 사가랴에게 나타나 아들을 주신다는 수태고지를 합니다. 그 이름까지 지시하고, 그가 말라기가 예언한 메시야 이전에 올 엘리야라는 것을 자세히 설명해줍니다. 그는 제사장이기 때문에 이 예언의 의미를 숙지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아멘! 할렐루야 찬송하리로다!”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내가 이를 어찌 알리요”완전한 불신앙을 보였습니다. 사가랴의 불신앙은 어떤 것입니까? 사가랴는 자기가 기도한 것을 실제로 믿지 못했습니다. 사가랴의 소망은 이스라엘의 위로가 임하는 것입니다. 지금 그 이스라엘의 위로가 임한다는데 믿지 못합니다. 그는 아브라함이나 기드온이나 히스기야와 달리 이들의 예가 기록된 성경의 사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못 믿었습니다. 여러분! 믿음은 여호와 종교의 기준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다 되지만 다 있어도 믿음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런데 사가랴가 믿지를 못했습니다. 결정적이고 치명적인 결함입니다. 그래서 불신에 대한 형벌로 아들을 낳을 때까지 말 못하는 벙어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여기에 놀라운 은혜가 있습니다. 사가랴가 믿음을 보이지 못하고 불신을 나타날 때에 하나님은 네가 믿음이 없느냐? 그러면 그만이다. 나는 믿음 있는 사람과 만 일 한다. 다른 믿음의 사람을 찾겠다! 이러 신게 아니라 그 불신에도 불구하고 사가랴를 통해서 선구자를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이야기입니까? 사가랴의 기도가 응답받은 것은 그의 믿음이 좋아서가 아니라 은혜였다는 것입니다. 사가랴의 의로움과 경건으로도 하나님의 구원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맞을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선구자 세례요한을 낳고, 구주를 맞은 것은 그의 경건이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치명적인 불신을 개의치 않으시는 은혜였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우리가 주님의 구원역사에 쓰이는 것이 자신의 경건이나 위대함이 아니라 은혜라고 믿습니다. 믿음은 위대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 앞에 작아지고 낮아지고 소박해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룹니다. 우리가 성탄의 주를 구주로 영접하는 것도 우리의 경건이 아닌 은혜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재림의 주를 맞는 것도 우리의 의로움이나 위대함이 아니라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나는 부족하여 영접하실 터이니” 이 은혜로 주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좌 앞에서면 칠십인 장로와 같이 면류관을 주 앞에 드리며 찬송할 줄로 믿습니다. 


  

벙어리 되게 하시는 은혜

따라서 이 말씀에서 우리가 배울 것은 사가랴를 벙어리 되게 하시는 은혜입니다. 그가 벙어리 된 것은 핸드릭슨의 말과 같이 그의 불신에 대한 형벌입니다. 그런데 사가랴에게 있어서 이 말 못하는 벙어리 되는 형벌은 놀라운 은혜였습니다. 그것은 이 벙어리 되는 형벌은 그 자체가 이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형벌은 불신을 고쳐주는 벌이었습니다. 이 일이 되는 날 까지 말 못합니다, 즉 아들 낳아야 다시 말합니다. 말하려면 아들 낳아야 합니다. 즉 믿어야 합니다. 믿음을 써야 합니다. 그 후에 잉태했습니다. 불신이 싹 고쳐진 것입니다. 이 은혜로 결정적 결함이 치료됩니다. 그리고 이 형벌은 증거입니다. 아들을 낳고 선구자를 낳는다는 증거요, 구주가 오신다는 증거요, 그리고 사람들에게 증거입니다. 왜 갑자기 말 못하는 벙어리가 되었는지 세상이 화제요, 궁금해 합니다. 그래서 약속한 엘리야인 세례요한이 온다는 것을 온 세상이 알게 되고 증거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가랴는 사람들이 물을 때 마다 말 못하는 말로 구주의 오심을 증거 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칼빈은 거역할 수없는 은혜, 불가항력적인 은혜라고 했습니다.



은혜로 가족 여러분! 이 거역할 수 없게 베푸시는 은혜로 성탄하신 주를 구주로 영접했고. 재림 주를 뵙게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데 쓰임을 받는 것도 우리의 선함이나 능력이 아니라 은혜로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대림절을 맞는 진정한 의미는 이런 인간의 죄악 됨과 어쩔 수 없음을 깨닫는데 있다고 믿습니다. 자신의 죄악 됨을 깊이 인식하고 하나님의 아들의 구주되심에만 소망이 있음을 확신하고 주님과 구속하신 은혜와 자비를 기다리는 것이 주님 맞을 준비인줄로 확신합니다. 토플레디는 이렇게 엎드렸습니다. "빈손들고 앞에가/ 십자가를 붙드네/ 의가 없는 자라도/ 도와주심 바라고/ 생명샘에 나가니  나를 씻어 주소서/"주님! 제 믿음과 경건과 의로는 주님을 맞을 수 없습니다. 저를 불쌍히 여기시는 긍휼과 은혜로 주님을 영접하고 오시는 주님을 볼 줄 믿습니다. 이 자비와 은혜로 제 불신을 고치시도록 십자가로 갑니다. 주여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 베푸시는 자비를 십자가 아래서 기대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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