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강론

재림 신앙의 유익

아브라함-la 2016. 11. 27. 18:16

016,11,27, 주일예배     

본문 : 고전16:22 

말씀 : 라인권목사


오늘은 교회력의 시작인 대림절입니다. 성탄절에 이르는 4주간 동안 성탄의 주를 기다리며 모실 준비를 하기 때문에 대림절이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성탄의 주를 기다리고 맞을 준비를 하는 것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라고 준비하는 것으로 귀결되기 때문에 대림절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절기가 되는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 한국교회는 재림신앙에 일종의 트라우마가 있고, 부정적인 인식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주님의 재림을 믿는 신앙이 우리의 삶에 어떤 유익을 가져 오는지를 초대교회 성도들을 통해서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바울의 권면에 나타난 재림신앙

오늘 봉독한 말씀은 고린도전서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권면입니다. 이 바울의 마지막 권면에서 우리는 재림에 대한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합니다. 하나는 재림신앙은 초대교회의 모토이자 인사로 통용되고 있을 정도였다는 사실입니다. 그 증거가 바로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Maranatha”입니다. 이를 헬라어로 “마라나 다”라고 하는데, 이는 “마란아다”라는 아람말의 헬라어 음역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말은 아람어였습니다. 히브리 신자들이 예배에서 재림을 사모하여 “마란아다” “주여 오시옵소서”라고 고백하고 인사했습니다. 이 아람 말을 바울이 헬라어로 쓸 때에  번역하지 않고 아람어를 그대로 사용해서 “마라나 다”라고 음역해서 그대로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 한글 성경에 “할렐루야” “호산나” “아멘” “살롬”이라는 말들을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미 잘 알고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용어이기 때문에 굳이 번역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는 재림이 소원이 되어서 인사가 될 정도의 재림신앙과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공 예배에서도, 좋은 일이나 괴로운 일이 있을 때에 “마란아다”라고 인사했습니다. 인사는 그 문화권의 의식과 세계관의 표현입니다. 초대교회의 인사가 “마란아다”였다는 것은 초대교회 성도들의 의식이 재림에 아주 젖어있었다는 거지요. 재림이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요 세계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참 부끄럽습니다. 주일에 공 예배에서 재림신앙을 한 번 고백하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재림의식에 지배되어 인사도 “마라나다”가 될 정도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마지막 권면에서 바울은 재림신앙을 모든 신앙적인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 전서를 쓴 것은 고린도교회의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은 1장서부터 16:20까지 고린도교회의 문제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해결방안을 충분이 권면했습니다. 이렇게 20절까지 대필자에 쓰게 한 바울이 마지막 권면과 축복을 친필로 기록하기 위하여 붓을 넘겨받습니다. 붓을 들고 잠시 숨을 고르던 바울이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라고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최종적 권면 한마디를 친필로 기록했습니다. 왜 바울이 이 최종적 권면에 “주님 사랑과” “마란아다”를 덧붙였을까요?


주님을 사랑하면 모든 문제는 해결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의 재림을 실제로 기다릴 터이지요. 실제로 주님을 재림을 믿는다면 모든 신앙적인 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재림신앙을 모든 신앙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마치 시끌벅적한 교실이 “애들아 선생님 오신다!” 이 한마디로 정리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어지러운 고린도교회의 최종적으로 권면할 때 “주님이 오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재림 신앙이 신앙의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고 믿습니다. 여러분 재림을 믿는 교회가 분쟁하겠습니까? 재림을 믿는데 음행하겠습니까? 우상의 재물을 먹겠습니까? 지금 조국교회가 세상에 욕먹는 것은 돈 문제와 성문제입니다. 재림을 실제로 믿는다면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재림을 실제로 믿으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재림신앙은 신앙생활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키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러면 재림신앙은 어떤 유익을 가져왔을까요?


첫째, 재림신앙은 삼중고를 당하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에 위로와 소망이 되었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은 로마에 대한 반역이 되고 있었습니다. 박해는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생활고를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정신을 그대로 따르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의 방식이 고통과 위기를 가져왔습니다. 초대교회는 이 삼중고를 어떤 힘으로 인내하고 헤쳐 나갔을까요? 초대교회는 돈이나 권력의 위로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위로와 소망은 주님이 다시 오시고 주님의 나라가 임한 다는 것에 있었습니다. 마치 옥에 있는 춘향이가 이 도령을 기다리는 것 같이, 재림신앙의 위로와 소망이 초대교회의 삼중고를 이기는 능력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계시록을 기록한 목적입니다.


여러분! 위로가 필요하십니까? 재림은 우리 인생의 모든 고난의 위로이자 해결인 줄로 믿습니다. 병들었습니까? 그러나 재림하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가난합니까? 주님이 오십니다. 억울한 일이 있습니까? 주님이 아십니다. 주님이 오십니다. 이 재림의 위로와 힘으로 이 세상의 고난 풍파를 헤쳐나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이 재미를 알고 보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재림신앙은 성도에게 이 세상이라는 유혹의 바다에 빠지지 않게 하는 배가 되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꼭 배와 같습니다. 배는 물이 있어야만 운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물에 빠지면 침몰해서 생명이 끝납니다. 성도는 육신으로 사는 동안에는 이 세상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빠지면 믿음이 파선합니다. 여기에 걸려서 우리 원조도 파선하고, 유다와 데마가 세상을 사랑하여 믿음이 파선했습니다.


어려울수록 세상이 그립습니다. 있으면 있을수록 세상이 좋은 겁니다. 그런데 초대교회는 이런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초개와 같이 여겼습니다. 그 증거가 주님을 따르기 위하여 집과 전토를 포기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필요하면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지요? 어떻게 이렇게 세상을 상대화 시킬 수가 있었습니까? 주님이 속히 다시 오신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주님 오시면 세상은 지나갑니다. 세상 가치는 무가치가 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라고 하셨습니다.(요일2:15-17) 이렇게 재림 신앙은 초대교회 성도들을 이 세상이라는 유혹의 바다에 파선하지 않고 천국의 포구에 이르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재림신앙은 배라고 믿습니다. 재림신앙은 이 세상이라는 바다를 지나는 배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배는 타이타닉같이 이 세상의 유혹의 빙산에 침몰하는 배가 아니라 그 어떤 유혹의 빙산도 침몰시킬 수 없는 부몰선인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재림신앙을 확실히 합시다. 이 재림신앙이라는 부몰선을 타고 이 세상의 유혹의 바다를 건너 천국의 포구에 안전하게 들어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이 유익을 보셔야 할 줄로 믿습니다. 

 

셋째. 재림신앙은 이 세상을 가장 충실히 살아 금생과 내생을 성공하는 삶이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재림신앙을 염세주의가 되게 하고 삶에 부정적이 되게 한다는 인식이 있지만 오히려 재림신앙이야 말로 이 세상을 가장 충실하게 사는 삶의 능력이요 비결입니다. 바울과 아굴라의 경우를 봅시다. 이들은 업이 천막을 만드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일로 자와 동역자들의 필요를 충당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바울과 아굴라가 장막사업 잘했다는 것이지요? 최고품질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그들이 적극적으로 살았고, 자기를 충실하게 개발하고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했다는 뜻입니다. 주님이 속히 다시 오실 것을 실제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오시면 모든 것을 심판 하실 겁니다. 그래서 항상 주님 앞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매일 심판대를 통과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최고의 천막을 만들어내고, 이 세상에서 성공적이고 풍성한 삶을 살았고 이것이 천국의 상급이 되어 내생을 부하게 한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달란트비유와 종비유의 핵심입니다. 주님이 오실 것이기 때문에 그날을 위해서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재림신앙은 자기를 충실하게 개발하는 비결입니다. 재림신앙은 이 세상을 가장 가치 있게 써먹게 하는 비결입니다. 재림신앙은 우리를 분발케 하고 적극적이며 긍정적으로 살게 하는 능력입니다. 따라서 재림신앙이야 말로 성공의 비결이요 풍성한 삶을 사는 비결인줄로 믿습니다. 이게 재림신앙의 유익이요 축복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유익! 이 재미를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왜 우리가 이 재미를 못 봅니까? 우리가 이 험한 세상에서 위로받지 못하는 것은 재림을 믿지 못해서입니다. 성도가 이 세상의 유혹의 물결에 빠지는 것도 주님이 속히 오실 것을 실제로 믿지 못해서입니다. 성도가 이 세상에서 성공적이고 풍성한 삶을 누리지 못함도 재림을 실제로는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주는 마지막 권면에 엄숙하게 Maranatha. “우리 주님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재림을 실제로 믿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재림을 교리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사도들과 같이 실제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도들은 예수를 주로 만났습니다. 나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여 영생이 되신 주님을 모셨습니다. 이 주님께서 영광의 나라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다시 영광중에 오실 것을 고대했습니다. 이 재림신앙이 고난의 세상 속에 위로와 소망이 넘치게 했습니다. 이 세상 유혹을 이게 하고, 이 세상을 충실하게 살게 하여 금생과 내생을 성공하게 했습니다. 재림신앙은 이렇게 유익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대림절에 Maranatha신앙이 구호가 아니라 실제적인 사랑의 고백이요. 실제적인 신앙고백이 되도록 실제로 예수를 만나시고 실제로 재림신앙을 고백하게 되는 절기가 되게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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