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하나님의 기쁨 그 회개 함

아브라함-la 2020. 10. 11. 16:14

2020,10,11,주일

본문 : 시51:16-17

말씀 : 라인권목사

 

        평안들이시지요. 요즘 세상일들을 보노라면 악인도 용납이 안 되고 용서가 안 되지만 의롭거나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도 용서가 안 되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새삼 절감케 합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 어쩔 수 없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니엘 같은 의인을 견디지 못하고,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도 용서가 안 됩니다. 이게 조두순이 용서가 안 되고, 조국이나 윤미향 같은 사람이 이 사회의 미움의 대상이 되는 이유입니다. 인간의 죄악 됨이 인간에게서 용서 할 품이 없게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라는 패러독스

이렇게 보면 거룩하시며 의로우시고 절대완전이신 우리 하나님께 용서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 보입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완전하심은 죄를 미워하시고 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다. 회개를 제사 보다 기뻐하시고, 통회하는 심령은 번제보다 기뻐하신다고 합니다. 이렇게 우리 하나님이 회개를 기뻐하실 뿐만 아니라, 높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통회하는 자와 자리를 함께 하신다고 합니다.(57:15) 인간은 죄인과 자리를 같이 하지 못하는데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죄인과 자리를 같이 하십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우리 하나님은 마치 용서하지 못해서 안달이 나신 것 같이, 범죄 한 자기 백성에게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마치 사정사정하시는 것 같습니다.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따라 옳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패역한 백성을 불렀나니”(65:2)마치 집을 나간 자식을 기다리는 부모와 같이 회개하기를 기다리십니다. 죄인인 인간은 인간의 죄를 용서할 수 없는데, 완전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은 회개를 당신의 기쁨으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이 죄인을 용납하시며 용서를 기뻐하실 수 있습니까? 이런 패러독스paradox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역설의 은혜입니다. 왜 사람이 용서 할 수 없는 죄를 하나님은 품을 수 있고, 용서하시고, 회개하는 것을 기쁨으로 삼으셨을까요?

 

먼저 우리 하나님이 회개를 기뻐하심은 회개와 용서는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크고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경외케 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걸 시130편에서 다윗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 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130:3-4) 한없는 용서가 하나님을 경외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걸 우리는 두 가지 사례에서 확인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베드로가 형제가 잘못하면 일곱 번까지 용서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크게 써서 일곱 번을 용서 할 수 있었습니다. 이게 인간의 한계입니다. 아무리 크게 써도 일곱 번을 넘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회 차를 두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용서에 회 차라는 계산이 없으십니다. 왜요, 인간은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은 작아서 용서할 품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이 한 없이 용서하실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크심 때문입니다. 한 없이 용서 하시는 데서 인간은 비로소 이 하나님의 크심을 알고 하나님께 대한 경외가 일어나 엎드려 경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유하심이 한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케 한다는 것은 홍수심판이 증명합니다. 하나님께서 홍수로 심판하셨지만, 노아의 후손은 다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습니다. 심판이 하나님을 두기를 싫어하는 마음을 고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마음과 영으로 신령하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새로운 민족을 만드시려고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겁니다. 믿음과 회개로 거듭나고 값없이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은 값없는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법이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을 경외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이사야나 베드로에게서 보듯 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며 엎드려 경배합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을 용서하시는 구원의 하나님으로 만날 때에 그는 비로소 하나님을 크신 하나님으로 알게 되고 그는 거룩 하시다고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예배입니다. 이게 진짜 찬송입니다. 이게 진짜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겁니다. 바꾸어 말하면 죄인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는 우리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회개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회개로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이루어기 때문에 우리 하나님이 회개하는 죄인을 기뻐하시고, 회개를 기쁨 삼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 기쁘시게 하는 길은 무슨 위대한 헌신을 하는 것이 아니요,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죄인 됨을 알고, 오직 하나님의 자비하심에만 소망이 있음을 알고 하나님 앞에 통회하는 마음으로 나가 자비를 구하는 구원론적인 회개로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이렇게 회개하고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기쁨이며, 이 생명을 받은 성도는 이미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이 기쁨을 드린 영혼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둘째, 우리 하나님이 회개를 기쁨 삼으시는 것은 회개는 구원 받는 성도로 하여금 구원의 삶을 살아 나가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구원하심은 믿음과 회개로 영이 살리심을 받는 것만이 아니라, 그 구원에서 나오는 구원의 삶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풍성한 삶이라고 합니다. 이 풍성한 삶은 구원 받았다고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사랑과 순종으로 바른 관계를 만들어가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실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18:7) 남은 죄성은 인간을 넘어지게 합니다. 이걸 악성이라고 합니다. 이 악성이 악령을 따르는 이게 반복되면 악습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죽습니다. 믿음이 망합니다. 영적 기능이 망합니다. 이러면 삶이 안 됩니다. 망합니다. 이걸 입증한 것이 구약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 죄 중에서 죽는 것이 아니라, 살기를 기뻐하십니다. 당신의 백성들이 죄로 망하는 것을 근심하시고 염려하셔서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회개하고 돌아와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회복되면 구원에서 나오는 삶이 살아납니다. 영이 소생하고, 삶이 회복됩니다. 이 풍성한 삶이 하나님의 구원을 구원 되게 합니다.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이 얻게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이게 참된 예물이며 예배요 찬송이며 하나님께 영광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인생은 실족하고 잘못해서 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실족과 실패와 잘못을 회개하지 못해서 망하는 겁니다. 실족하고 넘어져도 다윗과 같이 회개하고 하나님과 풀고 관계를 바르게 하면 치료가 일어나고, 해결이기도 하고, 형통이기도 합니다. 회개가 성공이요, 축복입니다. 지금 삶이 곤고하십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회개의 제물로 하나님과 푸십시오. 이 회개로 하나님의 기쁨 되시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풍성한 삶을 살아가시고 누리는데 이르시기를 축복합니다.

 

셋째, 우리 하나님께서 회개를 기뻐하시는 것은 회개는 우리를 온전하게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을 이루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들의 형상을 본 받는 것을 목적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구원을 이루는 것이 회개입니다. 회개는 죄를 슬퍼하고, 후회하는 것만이 아니라, 고치는 것입니다. 내 안에 하나님과 맞서게 하고, 틀어지게 하는 것, 이것 빼고, 고쳐나가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래서 회개한 만큼 주님의 형상을 이룹니다.

 

이게 오늘 본문의 다윗이 다윗 된 이유입니다. 51편은 표제가 보이듯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에선지자 나단이 와서 책망할 때 죄를 회개한 참회의 시편입니다. 다윗은 이 죄가 하나님과 틀어지게 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진노를 느꼈습니다. 그 심령이 가뭄에 마른 풀과 같이 되었습니다. 심령이 상했습니다. 이 죄를 크게 원통히 여기고 슬퍼했습니다. 크게 죄인 되었습니다. 이렇게 크게 울고 딱 고쳤습니다. 다시는 그 죄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다윗이 자기를 고쳐나가니 다윗이 성인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회개로 자기를 고쳐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그래서 내종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의 일 외에는 내 앞에서 정직했다고 하신 것입니다.(왕상15:5) 회개는 이렇게 자기를 고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왜 자기를 고치지 못할까요? 이것을 톨스토이는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두 여자가 현자에게 가르침을 받으러 왔다. 한 여인은 젊어서 남편을 바꾼 것을 크게 죄로 여기고 죄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한 여자는 대 과 없이 도덕적으로 살았다고 자부했다. 현자는 남편을 바꾼 여인에게는 큰 돌을 도덕적인 여인에게는 조약돌을 모아오게 하고, 제자리에 갖다 두게 했다. 큰 돌을 가져온 여인은 쉽게 두고 올 수 있었으나, 조약돌을 가져온 여인은 불가능했다. 작은 문제를 죄로 인식하는 것이 삶을 온전케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그렇습니다. 예수 믿고 하루 한 가지가 아니라, 일 년에 한 가지만 고쳐왔어도 우리는 다 날개 달린 천사가 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왜 자기를 한 가지도 고치지 못합니까? 그것은 죄를 작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죄를 크게 여기면, 큰 손해를 알면, 크게 울 것입니다. 크게 회개할 겁니다. 분명하게 고칠 것입니다. 이게 성인과 범인의 차입니다. 브레이너드는 왜 사람들이 내게 돌을 던지지 않는가? 라고 했습니다. 바울을 봅시다. 그는 자기 안에 죄로 기우는 자기를 고민하고 괴로워하고 한탄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7:24)이것이 분명한 회개를 하게 했습니다. 이게 고치게 했습니다. 이게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고 하게 한 줄로 믿습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 우리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이게 하나님이 회개를 기쁨 삼으시는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길은 죄를 크게 알고 크게 울고, 크게 회개하고 고치는 것입니다. 고치려고 힘쓰는 것입니다. 힘써도 안 되면 하나님 앞에 울며 은혜를 구합시다. 그리고 믿음을 씁시다. 그러면 고쳐집니다. 이렇게 회개한 만큼 하나님과 같아집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입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것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이 사람되는 것 이게 예배요, 찬송이요, 기도입니다. 이게 우리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이렇게 우리 하나님이 회개를 기뻐하시고 용서하시기를 기뻐하셔서 지금도 종일 팔을 벌리셨다는 것이야 말로 실족할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는 복음 중에 복음인 것입니다.

 

괴테와 더불어 독일을 대표하는 시인 하이네는 병으로 척추가 마비되어 침대무덤에 묻혀 있었습니다. 이 분이 마지막 외출한 것이 르부르 박물관입니다. 그는 발을 질질 끌다시피 하여 루브르 박물관 비너스 상 앞에 쓸어져 여신의 발목을 잡고 통곡했습니다. 위로가 필요해서이지요, 그러나 그는 위로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 후에 그가 병상에 누워 써낸 책 로만체로 Romanzero” 에서 그가 스스로 고백한 말입니다. "그 여신은 마치 나는 팔이 없어서 당신을 도울 수 없다는 걸 모르세요?’라고 말하는 듯했다.” 아니 그 여신의 말입니다. 나는 아름다울지는 모르지만 쓰러진 당신을 일으켜줄 팔이, 당신을 품어줄 팔이 없어요 비너스는 팔이 없지만 우리 하나님은 품을 팔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이네는 임종 전에 하나님과 화목했느냐는 친구의 질문에 그는 나를 용서하실 것이다.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이다.“고 하나님의 품에 안기지 못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아름다워도 죄인을 품어 줄 팔이 없습니다. 사람은 부해도 용서할 팔이 없습니다. 사람은 능해도 죄를 품을 능은 없습니다. 인간의 세계에서 죄인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품을 팔이 있습니다. 너르고 넓은 품이 있습니다. 그 품에서 용서 받지 못할 죄와 실수는 없습니다. 그 품에서 고백하지 못한 허물도 없습니다. 그 품은 실족할 수밖에 없는 우리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죄 때문에 아들을 십자가에 내여 주신 품입니다. 이 품에 생명이 있습니다. 이 품에 풍성한 삶이 있습니다. 이품에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이 있습니다. 이 팔, 이 품이 있어서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며 우리가 엎드려 거룩하시다고 경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 되는 것이 찬송입니다. 이 은혜를 받는 것이 번제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요 찬송입니다.

 

은혜로 가족여러분!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설 자리가 없을 때에 이 하나님의 품이 있습니다. 이 품에 생명이 있습니다. 여기에 풍성한 삶과 그리스도를 닮음이 있습니다. 이 용서의 품을 찾으시면 하늘에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 보다 더 우리 하나님께 기쁨이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기쁨 되는 것은 위대한 헌신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 앞에서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입니다. -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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