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도화 한창인 유월의 로마
유월의 로마는 유도화가 한창이었다. 숙소 호텔 울타리에도, 고속도로 중앙분리대와 양쪽 도로변에 유도화가 만발하여 흐드러졌고, 시가와 주택가는 물론 저 로마의 상징 콜로세움의 언덕과 바티칸 피냐 정원에도 붉게 핀 유도화가 동양의 낯선 나그네를 아는 체하고 있었다. 로마에서 첫 아침 해가 밝았다. 로마의 아침 하늘은 눈이 시리게 푸르렀고, 유월이지만 대기는 맑고 서늘했다. 해가 돋기 무섭게 지난밤 호텔에 진입하는 길에서 보았던 유도화를 보려 호텔을 나섰다. 바로 호텔 밖 진입로 정도로 알고 나섰으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버스로 잠깐 지나 온 길은 사실은 가깝지 않은 길이었기 때문이다. 호텔 인근의 유도화를 보는 것으로 만족하고는 조식을 하고 버스에 올라 로마 투어에 나섰다.
차창을 스치는 유도화와 언덕 위의 이국적인 우산 소나무들이 오늘 만날 로마에 대한 기대를 새롭게 했다. 서양으로 일컬어지는 유럽 문화의 중심인 로마는 어떤 모습으로 있을까? 상호 이질적인 판테온과 콜로세움은 바티칸의 대 성당들과 어떻게 로마의 한 하늘 아래 있을까? 그리고 교회사와 교리사의 현장들에 대한 기대가 피어올랐다. 이제 잠시 후면 그 역사의 현장에 내가 있을 것이다. 이래서 여행은 언제나 새로운 경험을 하거나, 살아온 삶과 삶의 길을 재 발견하는 행복을 누리게 하는 값 비싼 낭만인 것이다.
아름다운 비아 크리스토포로 콜롬보
테베레 강을 건너 순환고속도로를 빠져나와 로마 시가에 진입하자 곧 비아 크리스토포로 콜롬보로 에 접어들었다. 참 아름답고 세련된 거리였다. 도열한 우산 소나무 가로수가 인상적이었고, 거리 한가운데 우뚝 선 오벨리스크와 높지 않은 미려하고 우아한 건물들이 이곳이 로마요, 로마가 유럽 문화의 중심임을 말해 주는 듯했다. 한 곳에 이르자 저편으로 영원의 도시를 흐르는 테베레 강이 다시 보였다. 그 고색창연한 시가를 지난 버스가 일행을 한 거리에 내려놓았다. 그 가로수 길에서 눈을 드니 저만치 콜로세움이 서있었다,
아침 빛에 빛나는 콜로세움
아침 빛에 붉게 빛나는 로마의 상징 콜로세움은 사진으로 보아 온 것같이 웅장해 보이진 않았지만 아름다웠다. 2천 년 장구한 역사의 상흔 자자한 몸의 콜로세움이 콘스탄티누스의 아치와 함께 거기 있었다. 본시 이 콜로세움의 터는 “도무스 아우레아”라고 불리는 네로의 황금 궁전의 인공호수였다. 네로 사후 피에 피를 뒤대이는 극심한 정치적 혼란을 종식시키려 황제로 추대된 베스파시아누스가 로마의 건재함과 플라비우스 왕조의 등극을 과시하고 차별화하기 위하여 네로의 황금 궁전을 헐어내고, 호수이던 자리에 콜로세움을 착공한 것이 주후 72년의 일이다.
그 베스파시아누스가 완공을 보지 못하고 죽자, 그의 아들 티투스-주후 70년 예루살렘을 멸망시켰던 -가 서기 80년에 3층까지를, 티투스의 아들 도미티아누스가 4층을 완공했다. 최대 지름이 188m, 최소 지름 156m, 둘레가 527m 높이 57m의 4층인 5만 5천 석의 콜로세움은 입석까지 최대 7-8만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로마 최대의 건축물이다. 그 수많은 관중이 80개의 문으로 입장하는데 30분, 단 15분이면 경기장을 나올 수 있었다!
이 거대한 원형 극장을 로마인들이 "암피테아트룸 플라비룸"으로 칭한 것은 베스파시아누스를 시작으로 하는 플라비우스 왕조가 이 전무후무한 원형 극장을 지었기 때문이다. 이 콜로세움이 새로 선정된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가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 아닌가 싶다. 따라서 영화 <쿼바디스>에서 네로가 기독교인을 순교의 제물이 되게 원형 극장은 이 콜로세움이 아닌 지금 바티칸 자리에 있었던 원형 극장이다.
로마의 상징 콜로세움
콜로세움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닌 로마의 결정체와 같은 상징성을 가진 건축물이다. 콜로세움은 로마의 권력과 정치와 경제력의 결정일뿐만 아니라, 로마의 기술의 결정체이다, 2천 년이 지난 콜로세움의 객석이 지금도 금이 간 곳이 없을 정도이다, 콜로세움은 로마의 정신과 생활을 그대로 반영하는 곳이며, 로마의 신분 사회와 로마의 사치와 향락, 로마의 잔인성의 전시장이었다.
피로 젖은 아레나
티투스는 콜로세움의 개막행사를 백일 간이나 했다. 그때에 5천 마리의 맹수들이 여기서 사냥당했다. 로마인들은 이곳에서 450년간 검투의 피를 즐겼을 뿐만 아니라, 맹수와 검투사들의 피로 물들이던 아레나의 모래를 숫한 기독교인들의 순교의 피로 물들게 했다. 검투의 식전 여흥으로 죄수를 맹수에게 주었는데,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을 콜로세움의 그 수많은 관중 앞에서 맹수들이 뜯게 하는 잔혹을 마지않았다. 로마는 이토록 잔인했다. 콜로세움은 로마의 영광이자 로마의 치부인 셈이다.
한 자리에 콜로세움과 콘스탄티누스 아치가
이 콜로세움이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의 아치와 자리를 같이 하고 있는 것은 참 놀랍고 상징적이다. 콜로세움이 기독교 박해와 순교의 성지라면, 콘스탄티누스의 개선문은 그 기독교와 복음의 승리의 상징일 것이다. 콘스탄티누스는 “이 표시에 의해 정복하라”라고 그릭으로 쓰인 빛나는 십자가를 보았다. 중과부적이던 콘스탄티누스는 그 계시를 따라 이 십자가 깃발을 들고 정적 막센티우스를 밀비오 다리에서 궤멸시키고 패권을 차지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이 승리를 토대로 313년에 기독교를 공인했고, 315년에 그 승리를 기념하려고 콜로세움에서 포로 로마노로 가는 길인 비아 사크라에 아치를 세웠다. 박해와 순교의 상징인 콜로세움이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의 아치와 한 자리에 있는 게 내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콜로세움이 콘스탄티누스 아치와 한자리에 있고, 같은 로마의 하늘 아래 베드로 대성당이 있음은 콜로세움이 복음의 승리와 영광을 증언하는 영원한 기념비가 된 셈이 아니겠는가?
300년간의 로마의 박해
유례없는 대 제국 로마는 300여 년간 기독교를 간헐적으로 박해했다. 로마는 그리스도인들이 인격신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경배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주로 고백하고 경배하는 것을 용인할 수 없었다. 로마의 황제는 살아 있는 신이었으므로 그것은 곧 반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독교가 하나님과 경전인 성경을 삶의 기준을 결정하는 절대적 권위로 신봉하는 것은 곧 로마 세계도 그 권위 아래 있게 하는 것이자 로마의 가치를 심판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용납이 불가능했다. 이렇게 적으로 간주된 그리스도인들은 콜로세움에서 맹수들에게 던져지고, 처음 기독교를 박해하기 시작한 네로는 심지어 그리스도인을 밤을 밝히는 횃불이 되게 했다.
기독교 역사에서 복음이 가장 영광스러웠던 때
그러나 이 고난과 박해의 피 묻은 300여 년은 기독교 2천 년 역사에서 복음이 가장 능력 있고 영광스러운 때였다. 무명의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들어간 복음은 누룩처럼 로마 세계에 영향을 미쳤다. 그 잔혹한 박해에도 로마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날로 증가하여 귀족들까지도 박해를 받는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심지어 스위스의 론 계곡에서는 사령관 모리스가 그리스도인이 된 휘하 부대를 죽이라는 황제의 명을 거부하고, 사령관 직을 내려놓고 그리스도인이 되어 부하들과 함께 순교의 면류관을 썼던 것이다. 그 시절 이렇게 복음은 능력 있고 영광스러웠다.
주후 313년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한 건, 이렇게 기독교는 이미 로마의 대세였기 때문이다. 이름을 알 수 없는 그리스도인들이 들고 간 복음이 박해의 300여 년에 로마를 기독교 세계로 변화시켰다. 따라서 박해와 순교의 심벌인 저 콜로세움과 기독교 문화와 상징이라곤 눈을 씻고 보아도 찾을 수 없는 콘스탄티누스 아치는 콜로세움과 함께 복음의 능력과 영광을 증언하는 영원한 승리의 기념비가 된 것이다. 교회를 박해 했던 대 제국 로마도 땅에서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자재나 발판, 비계에 다름이 아니었다. 그래서 박해 받던 복음과 교회는 태산으로 우뚝 하나 로마 제국과 그 영광이던 콜로세움은 유적으로 남아 세상의 덧없음을 말해 주고 있을 뿐이다.
이제 낭만의 장소가 된 "마력의 원"
로마의 영광이던 콜로세움은 로마의 쇠락과 더불어 버려져서 중세에는 대성당이나 귀족들의 저택을 건축하는 석재를 조달하는 채석장 용도로 전락했다. 이렇게 버려져 황폐한 콜로세움을 교황 베네딕트 14세가 1719년에 순교의 성지로 복원이 가능한 만큼 복원케 했다. 그럼에도 뼈대뿐인 콜로세움은 훼손의 흔적이 자자한 몸으로 남았지만, 여전히 콜로세움은 로마의 자부심이자 이제는 로마 시민과 나그네들의 회포와 여수를 자아내는 낭만의 자리가 되었다. 이곳에 온 바이런도 이런 회포에 잠겨서 이 콜로세움을 "마력(魔力)의 원"이라고 예찬했을 것이다. 콜로세움 위에 둥실 떠오른 보름달이 교교히 빛날 때가 콜로세움이 가장 아름답고 낭만적이라니, 이 콜로세움의 낭만을 즐기고 싶은 이들은 한 번 월하의 콜로세움을 찾아봄 직도 하겠다.
콜로세움 근처의 유적들
콜로세움과 콘스탄티누스의 아치와 근처의 유적을 돌아보고 여유롭게 인근의 풍경을 담았다. 콘스탄티누스의 아치 앞의 너른 돌 포장도로의 푸르른 하늘을 배경으로 한 우산 소나무 가로수 길이 주변의 유적들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광을 연출하고 있었다. 저지인 콜로세움 위의 언덕과 마을에는 붉고 흰 유도화가 한창이었다. 콜로세움에서 포로 로마노로 넘어가는 길 비아 사르크 인근은 비너스의 신전, 티투스의 아치 등 유명한 유적들도 여럿이지만, 성벽인지 알 수 없는 벽돌로 쌓은 유적들이 널려 있었다. 그 황폐한 유적들이 다니엘의 예언을 상기시켰다. 다니엘서의 느부갓네살이 본 뜨인 돌 하나에 맞은 큰 신상이 부서져 타탁 마당의 겨와 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게 된 것이 바로 여기를 이르는 말씀이 아니던가?
캄피돌리오 사면에서 마주한 포로 로마노
콜로세움을 돌아본 후에 전차 경기장 터를 돌아서 캄피돌리오 광장 남쪽 언덕길에 일행을 내려놓았다. 거기서 캄피돌리오를 향하여 굽어진 언덕길을 오르니 남쪽으로 두 언덕 사이에 포로 로마노가 펼쳐지고 있었다. 눈부신 유월의 태양 아래 펼쳐진 포로 로마노의 폐허가 로마의 영고성쇠를 말해 주고 있었다. 포로 로마노 폐허의 장엄하고 황량한 아름다움의 유적들은 그 아름다움 만큼 감회도 크게 했다. 지금도 장엄함을 느끼게 하는 포로 로마노가 한창일 때는 얼마나 번화하고 아름답고 장엄했겠는가? "모든 길이 로마로" 라면 포로 로마노는 그 길의 깃점이자 종점이겠다. 그 길들로 이 포로 로마노에 이른 이들이 저 비아 사크라를 걸을 때에 그 번화함과 위용에 로마의 위대함을 느끼고 압도 되었을 것이다.
팍스 로마나를 이룬 로마의 영화 포로 로마노
로물루스가 여기에 처음 포룸을 연 이후 로마는 번영했고, 이 번영에 따라서 성장한 포로 로마노는 정치에서 사법, 경제와 문화에서 종교에 이르기까지 제국의 중심이었다. 이 포로 로마노야말로 로마가 로마 된 요인이 함축된 장소이다. 우선 ‘포룸(Forum)’이라는 말에서 보듯 민주적 공화정이 로마가 번영한 요인이었다. 로마는 열린 기회의 나라이었다. 로물루스가 캄피돌리오 언덕에 "아실룸"이라는 도피성을 만들어 외부에서 피신해온 사람들과 노예들, 심지어 범죄자들까지 수용한 것이 대표적 사례이다.
여기에 명예와 충성심으로 무장한 강력한 로마군과 현대 법의 기틀인 로마 법률과 사법체계, 학문과 기술에 대한 수용성과 실용성이, <로마인 이야기> 저자가 지성에서 그리스인보다 못하고, 체력에서는 켈트인이나 게르만인만 못하며, 기술에선 에트루리아 인보다 못하고, 경제력에서는 카르타고 인보다 못한 로마인이 이 포로 로마노와 팍스 로마나를 이룬 요인이 아니겠는가?
에드워드 기번이 <로마제국 쇠망사>를 쓰기로 작정했던 자리에
이 로마의 영화 포로 로마노가 로마의 영고성쇠를 증언하는 폐허로 유월의 뜨거운 태양 아래 거기 있었던 것이다. 이곳의 건축자재가 돌이 아니었다면 아예 그 흔적도 볼 수 없게 되었을 포로 로마노의 유적군은 우리 가요 "황성 옛터"의 가사처럼 묘하게 나그네의 감회와 여수를 자극했다. 3백여 년 전 한 영국인 나그네가 이 캄피돌리오 언덕에서 나처럼 목전의 바실리카 율리아 대리석 기둥들에서 포로 로마노 끝자락의 아슴한 에밀리아 바리실리카 위의 아름다운 탑을 하염없이 지켜보며 깊은 감회에 잠겨 있었다. 그가 저 불멸의 <로마제국 쇠망사>를 쓴 에드워드 기번이다. 기번이 바로 이 캄피돌리오 사면에서 로마의 흥성이 아닌 쇠락을 생각하고 로마제국 쇠망사를 쓰기로 결심했다. 지금 포로 로마노의 회포에 젖어 있는 내가 선 바로 이 자리에 기번이 있었던 것이다.
기독교에도 충격이었던 로마의 멸망
천년 제국 로마의 멸망은 제국의 지성적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충격이었다. 베들레헴 동굴에서 이 소식을 들은 제롬은 울었다. 기독교가 공인되고, 교회는 부흥하여 제국이 기독교 국가가 되자, 지성적인 그리스도인은 로마를 도래한 기독교 황금시대, 즉 불멸의 하나님의 도성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로마가 망하자 기번과는 다른 견해로 그 책임을 기독교에 돌리는 운동이 일었다. 교회는 로마가 로마의 신들을 버리고 기독교를 선택했기 때문에 망했다는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공격에 직면했다. 이에 대한 변증으로 어거스틴이 <하나님의 도성>을 저술했다. 이 고전은 기독교 역사 철학의 기준이 된 고귀한 기독교 유산이 되었다.
왜 로마는 쇠망했을까?
기번이 아니라도 포로 로마노의 폐허는 나그네로 하여금 한 번쯤 로마 쇠망의 원인을 생각하게 하는 곳이다. 에드워드 기번이 로마 제국 쇠망의 마지막 요인을 우리 기독교의 부패라고 한 것은 뼈 아픈 지적이다. 기번이 분석한 요인들도 새겨야 하겠지만, 나는 로마 제국 쇠망의 원인에 대한 "프란시스 쉐퍼"의 분석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쉐퍼는 <서구 사상과 문화의 부흥과 쇠퇴>를 그 시대의 대표적인 예술작품 들에서 읽어내는데 독보적인 사람이다. 쉐퍼는 한 문화를 결정하는 사상의 전제로서 절대적 진리라는 틀이 로마에는 없었다고 진단했다.
나는 포로 로마노에서 이걸 절감했다. 로마는 포로 로마노의 "포룸"이 상징하는 민주적 공화정을 상실하고 일인 전제주의에 빠졌다. 로마의 개방성은 로마와 동화를 이루지 못하고, 내부적으로 부패를 가중시켰다. 가진 자들의 사치와 향락, 그리고 사치스러운 제정(帝政)은 경제를 악화시켜 로마를 악성 인플레에 빠뜨렸다. 여기에 로마는 잔인했다. 이런 사치한 제정을 유지하는 비용이 과중한 세금이 되었고, 소농들을 전지에 묶어 농로로 전락시켰다, 누가 이런 제국의 기존의 문명이 보존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겠는가?

콘스탄티누스의 아치에 로마 정신의 퇴조가
쉐퍼는 이런 무관심이 예술에 창조성을 잃게 했고, 퇴폐성을 나타나게 했다고 보았다. 쉐퍼는 그 대표적 사례로 콘스탄티누스의 아치를 꼽았다. 콜로세움에서 포로 로마로 향하는 비아 사크라에 세워진 이 아치는 2세기의 트라얀 황제 시대의 기념비를 모방했을 뿐만 아니라. 2세기의 조각품보다도 조잡하기 때문이다. 국책 프로젝트인 이 콘스탄티누스의 개선문을 포로 로마노의 아치의 부조물을 뜯어다 붙이거나, 조잡하게 조각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예술품의 퇴조는 그 세계의 정신과 가치의 몰락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때 이미 로마는 기울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콘스탄티누스는 지금의 이스탄불에 콘스탄티 노플을 건설하고 천도를 한 것이다.

이는 우리의 자랑인 도자기에서도 오롯이 나타나고 있다. 고려가 번영할 때에 꽃을 피운 저 오묘한 비색의 고려 상감청자는 도자 문화의 원조 중국의 도자 문화를 뛰어넘었었다. 그러나 고려가 쇠락할 무렵 고려의 도공들은 고려의 문화를 지킬 여력도 관심도 없게 되었다. 이 무관심은 생계를 위하여 청자를 되는 데로 막 굽게 하여 질이 떨어진 청자가 나오게 되었다. 이 질이 떨어진 청자가 <분청사기>인 것이다. 이 분청이 현대 도자기의 모든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은 아이러니이지만 분청은 고려의 정신과 문화의 퇴조를 오롯이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조선의 고고하고 담백한 멋의 백자가 조선말에 막 사발이 된 것이다. 결국 콘스탄티누스의 아치는 우리 한국의 분청사기와 같은 존재인 것이다.


로마가 이렇게 쇠퇴한 것을 쉐퍼는 로마에 남아 있는 로마시대의 여려 다리에 비유했다. "콘스탄티누스가 승리한 밀비오 다리에 현대의 트럭이 지나간다면 무너지고 말 것이다." 이렇게 로마는 사상을 지탱하는 절대적인 진리라는 사상적 기반이 없었던 것이다.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했만 그와 로마는 여전히 예전의 세계관을 고수했지 기독교와 성경을 절대적인 기준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의 아치에 공공연하게 태양신은 부조했지만 기독교 문화나 상징은 눈을 씻고 보아도 없는 것이다.


"로마는 야만인들의 침입과 같은 외부의 힘에 의하여 멸망한 것이 아니다. 야만인들은 단지 멸망을 완결 지어 주었을 뿐이다. 로마는 충분한 내부적 기초가 전혀 없었다." 프란시스 쉐퍼의 결론이다. 이게 천년 제국 로마가 쇠망한 원인이다. 인본주의적 인본주의가 만연한 현대에 누가 이를 눈여겨보랴마는 이것은 귀 있는 자가 듣고 보아야 할 엄연한 사실이며 불변의 진리인 것이다. 역사의 주제께서는 지금도 여전히 뜨인 돌 하나의 역사를 성취하고 계시는 중이시기 때문이다.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이 힘찬 천사의 외침이 포로 로마노에 울려 나는 듯했다.

신들의 처소였던 캄피돌리오 광장에서
포로 로마노를 뒤로 하고 르네상스의 거장 미켈란젤로가 설계했다는 캄피돌리오 광장으로 올랐다. 포로 로마노가 로마인들의 삶의 영역이었다면, 이 캄피돌리오 언덕은 로마의 신들의 영역일 것이다. 여기에 주피터 신전을 필두로 로마의 여러 신들의 거소가 있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캄피돌리오의 분수대에 억울한 사연이나 소원을 적어 띄우고 있는 것은 이렇게 캄피돌리오 언덕에 각종 신전들이 즐비했었기 때문이다.
광장에 들어서자 미석으로 단장된 광장의 중앙에 우뚝한 청동 기마상이 눈길을 끌었다. 이 기마상이 저 유명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스의 명상록>의 저자로 로마 오현제 중의 한 분인 “철학자 황제” 로 불리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스”이다. 그는 세네카, 에픽테토스와 더불어 스토아학파 3대 철학자로 일컬어지는 인물이다. 인류의 고전이 된 그의 <명상록>은 여전히 이 땅을 사는 삶의 지팡이와 빛이 되고 있다. 이런 서정적이며 지성적인 황제가 기독교를 박해한 것은 참 유감스러운 일이다. 이 마르쿠스 기마상을 발견했을 때 교황은 이를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상으로 알고 이곳에 옮겨 세웠다니 참 묘한 일이다.
이 캄피돌리오 언덕도 마침내 교황들의 궁전이 되어서 외국에서 오는 사절들이 교황을 알현하려 바티칸이 아닌 이 캄피돌리오 언덕으로 왔다. 미켈란젤로는 이 사절들이 말을 타고 이 언덕길을 오르기에 용이하도록 완만한 경사의 계단을 원근법 영향을 받지 않게 설계했다. 이 계단 오른편에는 124계단 위에 선 "산타 마리아 인 아라코엘리 성당", 즉 "하늘의 위 성전"이 자리하고 있었다. 여신 주노의 신전이 있던 이곳에 1250년에 프란체스코 수도회에서 이 성당을 세운 것이다. 이곳의 신전과 우상들이 이런 식으로 사라지고 지금의 캄피돌리오 광장이 된 것이다.
이 유명한 계단을 중심으로 오른편 즉 베네치아 광장 쪽으로 산타 마리아 인 아라코엘리 성당이 있고, 왼쪽에는 "진실의 입"으로 가는 길에 콜로세움을 연상케 하는 "마르첼로 극장의 유적"이 있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 완성된 이 극장은 약 1만 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었다는데, 지금은 상부에 주택들로 보이는 집들이 있었다. 이 유명한 계단을 내려오면서 이 두 건물을 담았다. 124계단 위의 "하늘 위의 성전"이 까마득했다. 그 성당을 올려다보며 이 성전의 기적을 생각했다. 이 성전 안의 아기 예수상을 보면 병이 낫고, 이 계단을 오르면 로또에 당첨된다는 속설이야말로 기독교 공인 이후 로마 카토릭이 얼마나 이교적이 되었나를 보이는 하나의 지표가 아니겠는가?
베네치아 광장에서 이탈리아를 만나다
캄피돌리오 광장을 내려와 산타 마리아 성전을 지나 좀 걸으니 곧 베네치아 광장에 이르렀다. 거기 캄피돌리오 언덕 쪽으로 로마의 랜드마크인 장엄한 자태의 "조국의 제단"이 오전의 햇살에 빛나고 있었다. 이 조국의 제단은 이탈리아를 통일한 비토리오 에마누엘 2세를 기념하여 1885년에 설계하여 1911년에 완성한 현 이탈리아를 상징하는 건물이다. 이 아름답고 장엄한 건물이 완공되었을 때에 로마 시민들은 마치 파리 시민들이 에펠탑을 흉물로 여겼듯이, 이 조국의 제단을 주변의 경관을 해치는 흉물로 여겨 "타자기"니 "초를 꽂은 케이크"와 같다고 혹평했다. 세상은 선지자와 선각자를 알지 못하며 의인을 배척하고, 위대한 예술가를 고독하게 만드니 참 씁쓸한 일이다.
조국의 제단을 사진에 담고 베네치아 궁전으로 눈을 돌렸다, 르네상스 초기 건물인 이 궁전에서 무솔리니가 20여 년간 무단통치를 했고, 제1차 대전에서 승전했던 그는 이 베네치아 궁전의 발코니에서 제2차 대전 참전을 선포했다. 그 오른쪽에 트라얀의 원주가 있었다. 이탈리아인들은 매년 6월 2일이면 이 광장에서 이탈리아 통일 기념행사를 거행한다. 그때마다 이탈리아 국민들은 여기서 그들의 영화롭고 어두웠던 과거와 미래를 만나며, 트라얀 황제와 비토리오 에마누엘 2세를 파시스트 무솔리니와 함께 만날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할 것이 아닌가? 무릇 권력이란 그 영화는 짧고 그 평가는 엄중하며 영원한 것이다. 권력을 탐하는 이들이야 이를 알랴마는......

도시가 박물관인 로마의 좁은 길
주마간산으로 베네치아 광장 투어를 마치고 다음 장소로 향했다. 일행을 태운 벤츠 승합차는 로마시대에 조성된 돌로 포장된 좁은 골목길을 잘도 달렸다. 손바닥 정도 크기인 네모난 돌로 포장된 길이라서 꽤 흔들릴 줄로 알았지만 거의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 그 좁은 길들을 달리며 로마에 소형차가 대세인 이유를 알았다. 그리고 로마시 자체가 박물관이라는 말이 실감 났다. 그 고색창연한 시가 골목을 이리저리 내달려 도착한 곳은 "트레비 분수"였다. 트레비 분수 광장은 말 그대로 인파로 가득했다. 그 인파로 사진도 찍기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 많은 인파 속에서 마스크를 한 것은 우리 일행들 뿐이었다. 언제 코로나가 있었나 싶었다.
분수가 그친 트레비 분수
그러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했던가? 공교롭게도 트레비 분수는 청소 중 이었던 것이다. 트레비 분수에 던져진 동전을 수거하고 청소를 하기 위하여 정기적으로 분수를 가동하지 않는 시간이 있는 모양인데, 우리가 마침 그때에 트레비 분수에 온 것이다. 그 유명한 분수에 물이 흐르기를 기다리는지 유월의 뜨거운 햇볕을 마다하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이 앉거나 둘러서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물이 없는 트레비 분수를 키 큰 서양인들 어깨너머로 보며 찍어야 했고, 그 큰 몸집의 사람들 틈으로 감상해야 했던 것이다.
로마의 분수들 중의 걸작 트레비 분수
로마의 분수들은 로마의 수로와 불가분리의 관계이다. 로마의 자부심의 하나인 잘 발달된 수로들은 로마 제국의 멸망과 함께 침입자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로 인해 로마는 극심한 물 부족에 시달리게 되었다. 서로마 멸망 후 이 로마를 영토로 차지한 교황들은 이 수로들을 재건하며 그 기념으로 분수를 만들었다. 그 분수들 중에 제일 유명한 걸작이 바로 이 트레비 분수이다. 본래 평범했던 이곳 "처녀의 샘 분수"를 1732년 교황 클레멘스 13세가 "니콜라 살비"에게 설계를 맡겨 세운 이 트레비 분수의 아름다움은 바로크 양식의 마지막 최고 걸작품으로 남았다.
로마 교황의 권력의 기념비 트레비 분수
이 트레비 분수를 한 마디로 평하면 로마 교황의 권위의 산물이라 하겠다. 분수대 위의 개선문 아치 윗부분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 아티카가 있다. 그 아티카 위에 있는 교황의 가문을 상징하는 문장(紋章)이 그 증거이다. "종들의 종"이라는 교황이 자신의 권력을 로마 황제들과 같이 기념비적으로 미화한 것이 이 트레비 분수인 것이다. 여기에 와서 비로소 이 걸작을 교황이 만들었음을 알았지만, 정작 내가 놀란 것은 이 분수대의 개선문 격인 아치에서 나오는 이가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며, 양쪽에 말을 잡고 있는 두 명의 신은 포세이돈의 아들인 트리톤이기 때문이다. 교황이 만든 분수대에 기독교적 상징이라고는 눈을 씻어도 찾을 수 없고, 신화 속의 범신론적인 신들뿐이라니 무엇을 더 말하랴!
이곳이 한때는 로마의 중심이었던 모양이다. 트레비 광장 주변에는 바로크의 가장 독특한 외관을 자랑하는 산 빈첸초 에드 아나스타지오 교회가 있고, 그 뒤로 교황의 정궁으로 사용되었던 팔라초 퀴리날레가 자리하고 있었다. 세 개의 길-라틴어로 tre viae-이 만나는 광장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트레비 광장에 교황은 로마에서 가장 아름다운 분수를 세워 그 권위를 과시하려 했더란 말인가? 이게 그날 물이 없는 트레비 분수처럼 내 마음을 건조하게 했다. 그래서 뜨거운 햇살을 피해 한 가게에서 교황의 문장을 올려다보며 실없이 젤라또 하나를 핥았다.
스페인 광장의 뜨거운 햇볕 아래서
그 트레비 분수를 떠나 바티칸 선교본부가 있는 스페인 광장에 왔다. 본래 프랑스 인들이 살아서 프랑스 광장이라 부르던 이곳을 스페인 광장으로 부르는 건 17세기 바티칸 주재 스페인 대사가 여기에 대사관을 두었기 때문이다. 그 대사관에는 지금도 스페인 기가 걸려 있었다.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오도리 햅번이 젤라또를 먹는 장면으로 유명해진 곳이지만, 본래 이 광장은 괴테, 발자크, 키츠, 바그너 같은 예술가들이 즐겨 찾던 로마의 명소였다. 137계단의 아름다운 대리석의 성 삼위일체 계단이 아슴했다. 이 계단에 조성된 세 개의 광장은 성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것이다. 수많은 이들이 유월의 한낮의 햇살을 아랑곳하지 않고 그 계단에 앉거나 서서 콘도티가 가를 보거나, 성당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핀쵸 언덕이 오르지 못한 아쉬움
광장에서 성당으로 오르는 137계단과 세 개의 광장은 베르니니의 부친 피에트로가 만든 것이며, 이 계단 위에 성 삼위일체 성당 트리니타가 드높이 서있었다. 이 계단에서 아슴히 뻗어 있는 거리 초입에 카페 그레코가 있었다. 1760년에 문을 연 이 카페는 당대의 쟁쟁한 예술가들이 즐겨 찾고 그들이 남긴 작품을 전시하고 있는 유명한 카페이다. 콘도티는 이 카페 그레코와 명품 브랜드들이 모여있는 로마의 유명한 쇼핑가이다. 나야 좋아하던 커피도 멀리해야 하고, 그 명품이야 관심 밖이지만, 아쉬운 건 한낮의 유월의 뜨거운 태양이 무서워 그 137계단 위의 핀쵸 언덕에 오르지 못한 것이다. 그 언덕에 올라야 로마 시가를 조망하는 아름다운 풍광을 볼 수 있다는 걸 몰랐기 때문이다. 핀쵸 언덕 위에서 보는 포폴로 광장과 베드로 대성당의 돔은 물론 여러 유적들과 로마 시내 전경을 놓친 것이 못내 아쉬울 뿐이다. 이래서 아는 만큼 보는 것이 아니겠는가?
미켈란젤로가 극찬한 판테온
도착한 판테온 광장도 만원이었다. 그림으로만 보아 오던 판테온 전면의 거대한 대리석 주랑은 압도적이었다. 천재 미켈란젤로에게도 베드로 대 성당의 그 거대한 돔을 세우는 건 큰 부담이었던 모양이다. 그런 미켈란젤로가 피렌체 두오모 성당의 돔을 맡고는 골머리를 않던 부르넬레스키의 일화를 들었다. 부르넬레스키는 아무도 몰래 판테온의 돔에 올라가서 그 기법과 견고성을 확인하고 이를 적용해서 18년 만에 피렌체 두오모의 거대한 돔을 완공했던 것이다.
그래서 미켈란젤로도 판테온을 탐방했다. 판테온에 들어선 미켈란젤로의 가슴이 뛰었다. 고개를 들고 한참이나 판테온의 아름답고 장엄한 돔을 올려다보던 미켈란젤로가 옆에 있던 일행에게 이렇게 속삭였다고 한다. "판테온 사람이 아닌 천사의 작품입니다." 이 판테온을 일컬어 마르스 평지의 스핑크스라 했다지만, 건축이나 미술에 조예가 없는 내게도 판테온은 장엄하고 아름다웠다.
만신전 판테온
판테온은 로마의 건축유적 중에 본래의 모습을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된 유일한 유적이다. 판테온 삼각형 지붕 전면의 명문은 마르쿠스 아그리파가 세 번째 집정관으로 있을 때 이 건물을 지었음을 알리고 있다. 따라서 판테온은 기원전 27년에 지어진 것이다. 이 건물을 "판테온"라고 한 것은 그가 올림푸스의 신들을 위하여 이 신전을 지었기 때문이다. 신을 그릭으로 데오스 theos라고 한다, 모든 이라는 판 pan과 이 신이라는 말 theos와 건물을 뜻하는 접미사 on을 합하여 모든 신들에게 바친 신전이라는 뜻으로 ”판테온“으로 이름한 것이다. 우리식으로 하면 딱 만신전이겠다.
판테온의 건축자들
그러나 이 건축사의 기념비적인 이 집은 실제로는 신들이 아닌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위한 것이다. 아우구스투스의 2인자 아그리파는 아우구스투스의 석상도 이곳에 세우려고 했으나, 주제 파악이 분명했던 아우구스투스는 오히려 시민들의 비웃음을 사는 유치한 발상이라며 물리쳤다. 판테온을 황제에게 헌정했다니 판테온은 유비가 없는 용비어천가일 것이다. 이 모든 신들의 전당이 여러 번의 화재로 도미티아누스가 복구했으나, 현재의 판테온은 주후 110년경 건축에 조예가 깊었던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아예 새로 지은 것이다. 하드리아누스가 이 판테온을 새로 건축했으면서도 처음 건축자 아그리파의 이름을 바꾸지 않고 보존한 것은 이 땅의 공직자들이 본받아야 할 현명한 처사라 할 것이다.
만신전이 순교자들의 성모 마리아 성당으로
판테온이 건축사의 기념비가 된 것은 돔 때문이다. 이 돔은 천장의 높이와 돔 꼭대기까지의 반구 지름이 모두 43.3m 높이로 정확히 일치하며 완벽한 반구형을 이루는 이 거대한 돔은 콘스탄티노플의 성 소피아 성당이 지어지기 전까지는 견줄 돔이 없었다. 판테온의 이 돔과 내부의 빈 공간, 주랑은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과 함께 유럽의 공공건물은 물론 특히 신전 건축의 원전 격이 되었다. 이 기념비적인 판테온이 콜로세움이 받은 채석장 신세를 면하고 온전히 남은 것은 기원 608년에 동로마의 포카스 황제가 교황 보니파시오 4세에게 기증하여 순교자들을 기념하는 성모 마리아 성당이 되게 했기 때문이다.
교회가 아닌 미술관이나 사찰에 들어온 느낌
압도적인 주랑을 지나 원형의 판테온 안에 들어서자 갑자기 외부와 단절된 느낌과 더불어 자연광이 쏟아져 내리는 그 유명한 돔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판테온 안의 벽은 붉은빛 아름다운 대리석 원주들을 좌우로 거느린 중앙의 제단을 비롯해서 사도들과 성인들의 조상과 그림들로 가득했다. 이 조각과 그림들은 미술품으로 예술적 가치는 높을 것이다. 판테온 내부는 내가 로마에서 처음 들어가 본 성당의 모습이지만, 첫 느낌은 교회가 아닌 미술관에 온것 같았다. 그 성상들과 그림들을 돌아 보다 촛불이 바쳐지는 중앙의 제단에 이르러서는 마치 사찰에 들어온 느낌이 되었다.

종교개혁이 일자 성상을 파괴하려는 운동도 일었었다. 그 심정을 알만했다. 판테온은 이름과 용도만 성당으로 바뀌었을 뿐 이교의 우상을 기독교 우상들로 대체했을 뿐이다. 아! 이 아름다운 건물이 그냥 순교자들을 기념하는 전당으로 남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그네의 가슴에 아쉬움과 통탄이 몰려왔다. 그러나 이 판테온에 에마누엘 2세를 비롯하여 요절한 라파엘로에 이르기까지 위인과 예술가들이 영면해 있는것은 참 부러운 문화일 것이다.

로마에서의 첫 점심
판테온으로 오전 일정을 마치고 이동해 한 식당에서 로마에서의 첫 점심식사를 했다. 한적한 프라타너스 가로수 길에 위치한 식당이었는데, 분위기가 단체 관광객을 중심 하는 식당 인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 일행이 자리를 잡고 얼마 되지 않아서 우리보다 많은 수의 한국인 관광객들이 우르르 몰려들어와 자리를 채웠다. "탈리에레"라는 식전 음식이 나오는 현지식이 었는데 내 입에 맞는 건 물과 박하게 나오는 채소와 빵뿐이었다. 로마에서의 점심은 이번 여정에서 가장 맛없었던 식사로 기억에 남았다.

드높은 바티칸 성벽 아래서
점심 후에 테베레 강을 건너 바티칸으로 향했다. 차에서 내리자 햇살이 맹렬했다. 그 뜨거운 햇볕 아래 얼마를 걷자 잿빛의 견고해 보이는 드높은 성벽이 나타났다. 내 생전 처음 보는 높은 성벽이었다. 바티칸 성이었다. 846년 로마에 침입한 사라센 족이 베드로 대성당과 바울 대성당을 약탈했다. 이후에 교황 레오 4세는 사라센족의 침입을 대비하여 바티칸에 두께가 3.5m에, 높이가 12m에 이르는 돌과 콘크리트로 이 거대한 금성철벽을 구축했던 것이다. 성문 위에는 생전에 라 벌이었던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의 조상이 서로 시선을 비끼고 있었다.
그 견고하고 드높은 성벽 아래를 지나며 스가랴가 환상 중에 보았던 회복된 예루살렘이 떠올랐다. 회복된 예루살렘은 성곽이 없는 도성이다. 성곽이 없는 건 무방비가 아니라, 부흥의 무한한 확장성과 여호와가 친히 불 성곽이 되심을 의미한다. 이 성이 진정한 성인 것이다. 레오 4세가 구축하여 바오로 3세, 비오 4세, 우르바노 8세에 완공한 이 군비로서의 바티칸 성은 여호와를 방패와 산성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골리앗이 의지한 방패와 창에 다름 아닌 것이다. 교회가 하나님이 아닌 사람이 지은 성벽으로 지키려고 했던 것도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의 것이 아닌 이 세상 나라이며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겠는가? 요나처럼 볕을 피해 그늘에서 입장을 기다리며 그 높은 성벽을 올려다보는 마음이 착잡해졌다.
교황들의 궁전 바티칸 박물관
바티칸 박물관은 런던의 대영제국 박물관과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과 더불어 세계 3대 박물관으로 일컬어지는 박물관이지만 역대 교황들이 수집한 진귀한 세계적인 유물과 예술품이 많은 것으로 유명한 박물관이다. 성문을 통과하여 바티칸 박물관의 로비에 들어서자 눈앞에 달팽이 형상의 현란한 계단이 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광장을 방불케 하는 로비는 방문객으로 입추의 여지가 없을 지경이었다. 금속탐지기를 지나 바티칸 안에서 사용하는 수신기를 받아 걸고는 회화관으로 향했다. 미술에 조예가 없는 나는 유명한 몇 점을 보고는 쭉 훑어보곤 나왔다. 회화관에서 사면이 건물로 둘러진 장방형의 푸른 잔디 정원으로 나왔다.

바티칸 솔방울 정원
솔방울 정원이었다. 정원의 정면에는 높이가 4m에 달하는 거대한 솔방울이 있고 그 뒤로 브라초 누오보 궁전이 있었다. 그 솔방울 위 반구의 돔과 내부 벽은 오전에 본 판테온을 그대로 모방하고 있었다. 이 솔방울 때문에 바티칸에서 유일하다는 이 정원을 "바티칸 피냐 정원"이라고 부른다. 로마에서 솔방울은 입대하여 출전한 군인의 무사귀환을 상징하는 것으로 가정의 행복을 기원하기도 하는 로마인들의 행운의 상징이다. 바티칸을 다 돌아본 후에 깨달은 거지만, 이 솔방울은 바티칸 유일의 자연물 조형물이었다.
왜 교황은 그들의 궁전과 수도원의 정원에 기독교의 상징이 아닌 이 행운의 상징을 우상처럼 아름다운 제단에 설치했는지 모를 일이다. 그 솔방울 앞의 오염되어 최후의 시간으로 가는 지구를 상징한다는 거대한 동 지구본은 오히려 우상화되고 기독교 미신에 천착해 가는 교회의 영적 오염을 경고하는 것은 아닐까? 장방형의 너른 푸른 잔디밭 경계에 열을 지어 배치한 대형 화분들의 유도화가 유달리 붉어 보였다. 그 붉은 유도화와 청동색 솔방울! 그리고 우뚝한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거대한 푸른빛 돔이 자꾸 눈에 밟혀 왔다.

고대 조각관
그 정원에서 길이가 300여 미터에 이른다는 박물관 내부에 들어섰다. 조각관은 교황들의 권세와 부의 상징이라고 하겠다. 바티칸의 궁전들은 아비뇽 유수에서 돌아온 교황들이 교황청의 권위를 높이려고 지은 것들로 화려 그 자체이다. 처음 보는 아름다운 대리석 기둥, 천정의 프레스코화, 바닥의 모자이크로 아름답고 화려했다. 어디서 그 고상한 색감의 대리석을 구했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그 많은 고대 조각들과 예술품들을 수집하는데 얼마나 많은 인력과 비용이 들었겠는가?
거기서 미켈란젤로가 최후의 심판을 그릴 때에 예수님의 얼굴 모텔로 삼은 베레데레의 아폴로, 메두사의 머리를 든 페르세우스, 유명한 라오콘 군상과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의 모델이 된 토르소도 보았다. 판테온을 채용한 원형의 방은 조각도 조각이지만, 네로의 붉은 대리석의 거대한 욕조를 중앙에 배치한 화려한 대리석 모자이크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라파엘로의 방들
라파엘로의 방은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방이다. 교황이 된 그는 자기가 살 방에 그가 싫어하는 알렉산더 6세의 공적을 치하하는 벽화로 가득한 게 싫었다. 자신에게 맞는 그림을 원하는 율리우스 2세에게 예술고문이던 브라만테가 약관의 라파엘로를 추천하여 시험적으로 서명의 방에 그림을 그리게 했다. 이 천재의 작품에 대만족 한 교황은 기존해 있던 라파엘로의 스승이 그렸던 그림을 모두 지우고 라파엘로로 하여금 새 그림을 그리도록 했다. 라파엘로는 이 작업을 끝내지 못하고 요절했으나 그 방들은 율리우스가 아닌 라파엘로의 방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것이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긴 것이다. 이 방들의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등 명작 이들이 교황의 사치로 탄생한 것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교황의 통치를 읽게 하는 지도의 방
교황의 회랑의 마지막 방 지도의 방에 이르렀다, 사람들은 천정의 황금빛 찬란한 프레스코에 눈을 떼지 못했고, 벽은 고대 지도로 가득했다. 교황 그레고리오 13세의 명으로 이냐치오 단티 신부가 1580~1583년까지 이탈리아 전역을 돌며 제작한 지도들이 20m의 복도에 40개의 지도 패널로 전시되어 있었다. 십자가 한 개가 표시된 성당은 주교가 관리하는 대성당, 십자가 두 개는 대주교가 관리하는 두오모 성당을, 십자가 세 개는 교황이 있는 곳이다. 지도의 방은 금빛 찬란한 프레스코화로 바티칸 박물관에서 가장 화려한 곳이었다.
바티칸의 꽃 시스티나 성당
지도의 방을 지나 바티칸의 꽃으로 불리는 시스티나 성당으로 내려갔다. 통로로 성당 안으로 이동해서 성당의 위치도 모르겠고 성당의 외부는 보지도 못했다.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이동한 느낌이었다. 이 시스타나 성당이 유명한 건 이곳에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추기경들이 교황을 선출하는 콘크라베를 열기 때문이다. 이 성당을 시스티나로 칭한 건 교황 식스토 4세가 이 성당을 지어서이다.
식스토 4세는 교황이 되자, 피렌체의 메디치가를 무너뜨릴 목적으로 행한 로렌초 암살을 필두로 하여, 귀족들을 이간하여 전쟁을 하게 하는 악행을 서슴지 않았다. 자신의 가문에 부와 권세를 대물림하는 걸 소명 인양 한 그는 교황권을 이탈리아의 한 세속국가 권력으로 만든 장본이다. 이런 그가 이 시스티나 성전을 지은 건 종교적 목적 만이 아닌 그가 제거하려고 했던 메디치가와 오스만튀르크의 마호메트 2세의 침략을 방비할 목적이었다.
식스토 4세는 바치오 폰 텔리의 설계로 1477년에 착공해 1481년에 이 성전을 완공했다. 노후한 옛 성당을 헌 자리에 세워진 이 성당은 솔로몬의 성전과 같은 규모로 평면이 길이 40.23m, 너비 13.41m, 높이 20.7m로 솔로몬의 성전을 재현한 것이다. 식스토 4세는 이로 바티칸이 예루살렘을 계승한 새로운 성좌임을 천명하여 아비뇽 유수로 떨어진 교황권을 높이려 한 것이다. 시스티나 성당이 교회의 이미지가 아닌 성채나 요새의 이미지를 가진 건 그의 행적을 보면 당연한 결과인 것이다. 요새이기도 했으니 그 일부가 감옥으로 사용되기도 한 것은 필연적일 결과가 아니겠는가?
촬영이 금지된 시스티나 성당은 찬연했다. 성당에 들어서 정면은 제단 벽화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이, 눈을 들면 천장의 이름 높은 천지창조 프레스코화가 찬란하고, 좌우 벽을 보면 명작으로 가득한 벽화들로, 눈을 내리면 바닥의 미석으로 꾸민 모자이크로 아름다웠다. 시스티나 성당은 온통 르네상스의 작품들로 채워지고 물들어있었던 것이다. 이걸 보려고 매년 800만 명이 이곳을 찾고, 오늘도 만원인 관람객들이 감동하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 수많은 이들이 감동하는 시스티나 성당에서 나는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에 사로잡혔다. 어디선지 본듯한 색감의 분위기가 나를 불편케 했다. 보아야 할 걸 보지 못한 것만 같고, 풀지 못한 숙제를 가진 기분이었다. 이런 느낌으로 약간 어두운 분위기의 시스티나 성당을 나와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내려가는 아름다운 대리석 주랑에 섰다.
이층에서 내려가는 우윳빛 대리석 계단과 기둥이 아슴했다, 그 계단을 밟으며 로마인들에게 유대교의 한 분파 정도로 여겨지던 그리스도교가 유대인들과 로마의 박해를 받으면서도 최초의 500여 년이 다 지나기 전에 로마 제국은 물론 동쪽으로는 중앙 아시아와 인도, 서쪽으로는 아일랜드까지 폭발적으로 확장될 수 있었는지를 생각했다. 바티칸의 화려한 궁전들과 대 성당들은 복음의 본질과 영성을 잃은 기독교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박해받던 복음의 능력과 승리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의 놀라운 확장은
이에 대하여 예일대학에서 선교역사를 가르쳤던 라토랫 교수는 교회사의 고전이 된 <기독교사>에서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첫째 전 인류를 포용하는 복음의 포괄성, 둘째, 진리를 타협하지 않는 진리에 대한 절대성, 셋째, 이것이 가져온 순교가 준 깊은 감명, 넷째, 도덕적 변화를 이르키는 복음의 영향력과 이적들, 다섯째, 종교적 여망인 불멸과 지상의 삶과 영원한 삶을 완벽하게 제공하는 성경이라는 문서를 가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런 모든 것들은 오직 하나 예수님 때문이라고 했다.
이렇게 보면 그리스도교의 처음 500년의 놀라운 확장과 부흥은 로마의 흥성과 유사성을 가진 것이다. 공화정이라는 민주성, 인종과 학문과 기술에 대한 포괄성과 수용성과 실용성, 그리고 로마의 법전과 목숨으로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충성심, 이런 것들은 위에서 보듯 분명 복음과 그리스도교의 특질들인 것이다. 물론 로마는 여기에 영생과 사랑과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절대자가 없었지만, 우리 그리스도교는 예수께서 스가랴가 본 등대와 같이 생명을 공급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생명 빛인 기독교는 왜 중세의 어둠이며 종교개혁이 필요한 존재로 쇠퇴하고 말았을까?
이런 상념으로 그 아름다운 주랑 계단실을 나서자 유월의 밝은 태양 아래 거대한 오벨리스크가 선 방대한 광장이 눈에 들어왔다. 오벨리스크 뒤로 도로가 아슴하게 시가로 곧게 뻗어 나가고 있었다. 베드로의 수위권을 상징하는 천국 열쇠를 형상화 한 성 베드로 광장이다. 햇살에 빛나는 그 광장을 보며 놋으로 제작된 거대한 문으로 성 베드로 대성당 안으로 들어섰다.
교회사의 현장 성 베드로 대성당에 들어서다
공식 명칭이 ”산 피에트로 인 바티카노“인 성 베드로 대성당은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과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 그리고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당과 더불어 4대 바실리카로 불리는 로마 카토릭의 본산이며. 백 년이 넘는 긴 건축 중에 숫한 사연들과 역사의 분기점을 이룬 종교개혁의 불길을 발화시킨 곳이다. 그 베드로 대성당의 외부 정면은 거대한 느낌은 아니었다. 외형은 외려 피렌체와 밀라노의 두오모가 더욱 웅장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 거대한 놋문으로 성당 안에 들어선 순간 판테온과 시스티나에서 일어난 의문들이 확 풀리는 느낌이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에 들어섰을 때에 그때까지 베드로 대성당을 하나의 거대한 예배당으로 생각해왔던 기존 지식이 깨져버렸다. 성당 안은 예배를 위한 장의자로 채워진 것이 아니라, 모자이크로 꾸며진 아름다운 대리석 광장이었던 것이다. 그 아름다운 광장 끝 중앙에 우뚝한 베르니니가 만들었다는 압도적인 발다키노가 아슴했다. 그리고 말하자면 코너마다 제단이 있었던 것이다. 세어 보지 않아서 정확한 수는 모르지만 자료에 의하여 50개의 제단, 11개의 예배실이 있다.
베드로 대성당의 규모
성 베드로 대성당은 베드로의 무덤 위에 지은 구 베드로 대성당을 헐고 서기 506년 교황 율리우스 2세가 그가 총애하는 브라만테의 설계로 공사를 시작하여 21명 교황들이 120년 동안 지은 역작이다. 착공은 브라만테가 했고, 이후 상갈로,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베르니니 등이 참여하여 소피아 대성당 이전까지는 당대 최대의 바실리카로 지어졌다. 성당의 길이는 187m이고, 폭은 58m이다. 벽 사이사이에는 총 39인의 성인들과 수도회의 창설자의 모습이 조각된 성상들이 있고, 1780년에는 천정을 황금으로 도금했다. 이 대성당의 가장 유명한 것은 미켈란젤로의 걸작 <피에타>와 역시 미켈란젤로의 돔과 그 돔 아래에 있는 베르니니가 만든 발다키노이다. 그 발다키노 아래에 순교한 베드로가 묻힌 묘가 있다고 한다.
종교개혁을 발화시킨 면죄부 발매
이 거대하고 화려한 바실리카를 건축하는 120년 동안 숫한 일화들과 역사적 사건들이 있었지만, 인류사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사건이 교황 레오 10세 때의 일어났다. 교황 레오 10세(1475~1521)는 피렌체의 로렌초 데 메디치의 둘째 아들이다. 메디치가를 업고 교황에 오른 그는 피폐한 로마를 르네상스 예술로 피렌체와 같이 꽃 피우려고 했다. 교황청 단장과 로마의 건물과 도로에 르네상스 예술로 물들이는 일에 교황청의 금고를 아끼지 않은 그에게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은 그의 예술적 욕망을 한껏 자극했다. 그러나 교황청의 금고는 마르지 않는 화수분이 아니었다. 교황청 금고가 바닥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면죄부 발매는 재정난에 직면한 레오 10세에게는 복음이었다. 특히 레오 10세는 독일 마인츠의 대주교직을 매매하는 부정한 계약으로 독일 중부 지역의 신자들에게 면죄부를 팔게 했다. 마침 그 지역은 은혜로 갱신되어 있고, 애국적인 수도사 루터가 봉직하는 비텐베르크가 있는 곳이었다. 면죄부 청부업자인 수도사 요한 텐젤이 이 비텐베르그에 와서 면죄부를 효능을 설교를 하며 면죄부를 팔았다. 텐젤은 면죄부를 사는 돈이 헌금함에 땡그랑 떨어지는 소리와 더불어 연옥에 있는 조상의 영혼이 연옥에서 천국으로 옮겨진다고 했던 것이다.
루터 95개 조항 대자보를
이에 분기한 루터가 그가 봉직하는 비텐베르크 대학 성당문에 라틴어로 쓴 95개 조문을 못 박아 게시한 것이 1517년의 일이다. 여기서 프로탄테스트라는 말이 생겨났다. 루터가 요즘 말로 대자보를 붙인 셈이다. 이 루터의 95개 조문은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덕에 신속히 독일을 넘어 전 유럽에 전파되어 종교개혁의 불길이 거세게 타올랐던 것이다. 이 종교개혁의 불은 영국에서 보듯 유럽을 개편했고, 로마 카토릭은 반 종교개혁에 직면케 했다. 인류사의 물길이 바뀐 것이다.
발다키노 앞에서 감동이 아닌 실족이
일반 건축물이라면 감동했을 그 베드로 대성당을 돌아보는 동안 내 마음은 경직되어 갔다. 미켈란젤로의 거대하고 찬란한 돔 아래의 그 거대한 발다키노 앞에 이르러서는 나는 실족했다. ‘그 무덤의 뼈는 정말 베드로의 것인가? 바로크의 거장 베르니니의 작품이라는 생전의 베드로가 사용했다는 나무 의자에 청동을 덧입혀 만든 베드로의 성좌는 정말 베드로가 사용하던 의자이며, 심지어 지하 묘지인 카타콤을 예배실로 삼던 박해를 받던 교회가 그런 의자를 사용할 수가 있었나?’
유세비우스의 자료외에 베드로가 로마에 왔다는 자료는 성경에 전혀 없다. 단지 베드로서의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라는 말씀의 바벨론을 로마를 은유하는 말로 여겨서 베드로가 로마에서 이 편지를 쓴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지금도 그리스계 교회들은 베드로 로마 주재설을 부정하고 있다. 나는 굳이 베드로가 로마에서 순교했다는 전승을 부정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지만, 발다키노 앞에서 이렇게 실족한 것이다.
교황과 바티칸의 권세의 기념비인 대 바실리카
피에타며, 발이 닳은 베드로의 동상이며, 아름답고 웅장한 그 돔과 프레스코로 아름다운 금빛 찬란한 드높은 천정과 석주들과 제단들과 성상들, 그림들을 관람하며 시스티나에서 보지 못한 것을 보고 풀지 못한 것이 풀렸다. 우선 성전의 양식이 독창적인 기독교 문화가 아닌 만신전 판테온의 돔과 제단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었다. 그 맥이 콜로세움 곁의 비너스 신전과 트래비 분수와 바티칸의 솔방울 정원에 일괄 되게 나타나고 있었다.
그리고 바티칸 박물관의 그 많은 그림들과 베드로 대성당의 그림들에서 순수 자연을 그리거나 조각한 것은 청동 솔방울이 유일했다. 산이나 나무나 꽃 같은 순수 자연은 없었다. 이건 교회가 은총이라는 신령한 것에만 치중하여 자연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는 증거이다. 교황이 그리게 한 벽화들에 비기독교적인 것들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라파엘로의 그리스 학당이다. 교황들이 로마뿐만 아니라 성전까지도 온통 인본주의 르네상스로 물들인 대 바실리카를 지은 건 하나님이나 예배용이 아니었다. 대 바실리카는 많은 회중을 수용할 목적의 예배용이 아닌 교황들의 성이자, 교황과 바티칸의 권세의 기념비를 세웠던 것이다. 마치 로마의 황제들이 개선하여 아치를 세운 것처럼 말이다.
로만 카토릭의 쇠퇴는
이 모든 것들이 로마 제국을 복음화했던 교회가 왜 로만 카토릭화 되고, 종교개혁에 이르는 쇠퇴에 이르렀는지를 깊이 생각하게 했다. 정리해보면 로만 카토릭의 쇠퇴는 로마의 쇠망과 꼭 닮았다. 우선 로마가 공화정에서 전제주의로 전락한 것 같이 교회는 신령한 나라와 권세로 있은 것이 아니라, 완전히 세속의 한 전제국가로 전락했다. 서로마의 멸망은 기독교의 멸망이 아닌 교회와 교황의 권세를 키우는 격이 되었다. 로마를 정복한 왕들은 오히려 교회의 승인을 구했기 때문이다. 결국 교회는 이태리에서 나폴리, 피렌체, 밀라노 공국 등등과 더불어 로마를 중심 한 교황령을 가졌다. 그 교황들은 세속국가와 같이 전쟁도 하고, 사법도 행사했던 것이다. 카놋사의 굴욕은 이의 대표적 사례일 것이다. 종들의 종(Servant of Servants)으로 칭한 교황들은 교황권이 절정을 이룬 1100년에서 1300년 간에는 중세에서 가장 강력한 실제적 군주였다. 그들 머리의 삼중관은 세속 군주까지도 그 권세 아래 있게 한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의 국교화는 로마처럼 기독교와 동화를 이루지 못하고 외려 기독교를 이교에 동화시켰다. 그 대표적 사례가 사제들의 제복 가운이다.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는 이교의 화려한 제사장의 옷으로 자신을 단장하기를 좋아했는데. 그 한 벌을 예루살렘 감독에게 하사했다. 이것이 마침내 천주교로 하여금 화려한 제복을 교리화 하기에 이르게 했다. 이교적 신앙과 미신, 문화와 도덕이 그대로 교회에 들어오고 교회는 이교에 동화되고 말았다.
교회가 세속 왕국이 되자 교황과 추기경 감독들과 수도사들은 급속히 도덕적으로 타락하여 악행도 서슴지 않았다. 이 불쾌한 이야기는 생략하겠다. 또한 로마 카토릭은 로마제국의 잔인성을 빼닮았다. 교회의 이런 부패와 타락은 영이 살아 있는 이들의 갱신의 요구에 직면케 했다. 교회는 훗스를 비롯한 이 개혁 전 개혁자들과 개혁자들, 그리고 교회의 눈에 거스리는 자들을 이단으로 잔혹하게 처형했다. 종교재판소와 반종교개혁을 주도한 저 예수회가 고안해 낸 이때의 고문과 처형 방법은 완전히 인간성을 상실한 만행이었다. 악명 높은 마녀 재판의 희생자 중 하나가 잘 알려진 잔 다르크이다. 카토릭 신학자 한스 킹의 말이다. "교회는 마귀적인 때가 있었다 "
기독교회를 쇠퇴시킨 결정적인 원인은 로마처럼 교회가 성경이라는 진리의 절대성을 잃은 것이다. 콘스탄티누스는 정통보다 이단 아리우스를 지지하여 그가 교권을 가지게 했다. 이후 교회는 점차 성경과 계시라는 은총보다 이성을 기준하기 시작했다. 이성으로 은총에 이르는 것이 가능하다는 스콜라 신학이 탄생했다, 스콜라 철학은 르네상스의 산물이다. 르네상스의 인간 중심의 인문주의가 결국 은총을 삼켜 버리고 기독교를 철학적인 것으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결국 교회는 성경보다 전통이 기준이 되었고, 은혜를 행위로 대체하고, 마리아와 성인 숭배를 필두로 연옥설과 각종 이교적 요소를 도입하고 면죄부를 발매하기에 이른 것이다.
인본주의적 인문주의의 추구, 이게 교황들이 시스티나와 베드로 대성당을 비롯 두오모 성당들을 온통 르네상스로 물들이게 한 것이다. 결국 로만 카토릭은 예수와 복음을 잃은 것이다. 성당들에 실제적 인체가 아닌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조각된 성인들의 조상과 그림들로 채워진 것도 이 때문이다. 르네상스는 인간중심이었기 때문에 실제적 인체가 아닌 이상적 인체를 조각하거나 그렸기 때문이다. 기독교를 공인하고 국교로 삼은 로마를 도래한 천년왕국으로 이해하여 그 로마의 멸망에 충격을 받았던 기독교가 애통하게도 그 로마가 걸은 쇠망의 길을 그대로 걸었던 것이다. 쇠망해가는 로마에 예레미야의 소리를 낼 수 없는 교회였던 로만 카토릭은 그 로마처럼 쇠퇴 할 수밖에 없었다.
은금은 있으나 걸으라 명할 수 없는 교회로
그 크고 화려한 성 베드로 대성전을 나오며 유명해진 일화가 떠올랐다. 신학대전을 쓴 토마스 아퀴나스가 교황 인노센트 2세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토마스가 교황의 방에 들어서자, 교황은 한 움큼의 돈을 세고 있었다. 돈을 세던 교황이 들어선 아퀴나스를 보며 말했다, ‘토마스 당신도 보다시피 교회는 더 이상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라고 말할 수가 없소이다’. 토마스가 응수했다. ‘사실입니다. 성 대부여! 그러나 교회는 이제 "일어나 걸으라! "고 말할 수도 없게 되었사옵니다.’
베드로 광장 회랑 아래의 여수
그 대성당을 나와 좌우로 나래를 편 15m 높이의 284개의 석주의 회랑이 장관이 성 베드로 광장으로 내려갔다. 반원을 그리는 열주의 회랑 지붕에는 베르니니의 제자들이 만든 140개의 높이 3.2m 크기의 성상들이 광장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 아름답고 장엄한 회랑의 그늘에서 교황이 강복하는 발코니와 콘크라베를 마치면 연기를 내는 건물과 해시계 역할을 한다는 이집트에서 가져온 거대한 오벨리스크를 잠잠히 지켜보며 나는 여수에 잠겨 들었다.
한국교회의 어두운 현실이 바티칸의 궁전들과 대성당과 자꾸만 오버랩 되었다. 근래 교회 건물은 커지고 화려해지고 있다. 교회의 인테리어는 교회에 들어서면 백화점이나 호텔의 고급스러운 느낌을 가지게 하고 있다. 개척교회도 억대의 인테리어 비용을 들이고 있다. 교권주의는 심화되고 교회가 아닌 세상이 교회의 도덕성과 윤리를 걱정하고 있다. 그리고 여러 명목의 신종 기독교 미신들을 창출하며, 중세에 그렇게 붐이던 성지순례가 비전 투어니, 단기 선교니 하는 명목으로 성행하고 있는 중이다. 경제적 수준이 높을수록 영성은 떨어지고 있고. 결정적으로 성경의 절대성을 상실하고 합리주의와 주관주의로 함몰해 가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눈에 밟혀오는 바티칸의 유도화
그 여수에 잠긴 채로 오후 5시경의 뜨거운 햇살 아래 베드로 광장을 가로질러 바티칸 시국 경계를 이루는 지역을 따라 걸어서 버스에 올랐다. 숙소로 가는 길에서 수도교 인듯한 곳을 통과하기도 하고, 긴 성벽을 지나기도 했다. 그 로마 시가를 벗어나는 순환고속도로에 접어드는 진입로에 이르자 도로 위의 공원에 만개한 붉은 유도화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차창을 스치는 그 유도화를 보자 바티칸 피냐 정원의 붉은 유도화가 교회들의 현실과 함께 여수에 젖은 내 눈에 밟혀왔다. 유도화의 꽃말을 떠올렸다. 유도화의 꽃말은 위험, 주의, 방심은 금물이다.
화려한 유도화는 아름답지만 글루코사이드라는 치명적 독성이 있어서 주의하고 경계해야 할 꽃이다.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으로 일컬어지는 꽃도 이 유도화와 같은 것이다. 바티칸이 유도화를 심은 뜻은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의 아름다운 창조물인 바티칸의 유도화는 하나님의 교회들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로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메시지는 평생을 목자로 산 내게도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바티칸의 유도화가 유난히 붉게 느껴진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아! 그날 오후 바티칸 피냐 정원의 유도화는 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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