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4,11,24,주일
본문 : 욥14:1-22
말씀 : 라인권목사
오늘이 성령강림 마지막 주일로 다음 주일부터 대림절이 시작됩니다. 성탄절을 잘 준비하시고, 올겨울 강건들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미국 민중사>를 쓴 하워드 진이 “20세기 미국의 양심”이라고 부른 피오렐로 라과디아가 대공황 시절 굶주리는 손녀를 위해서 빵을 훔친 죄로 즉결에 넘겨진 할머니에게 벌금 10달러를 선고하고는 계속해서 이렇게 선고했습니다, “배고픈 사람이 거리를 헤매고 있는데, 나는 그동안 좋은 음식을 배불리 먹어 왔습니다. 그리고 어려운 노인이 빵을 훔치도록 방치한 이 도시의 시민들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에게 벌금 10달러를 선고하며, 여기 있는 모두에게 각각 50센트 벌금을 선고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모자에 10달러를 넣고 모자를 돌렸습니다. 모자에 모두 57달러 50센트가 걷혔습니다. 할머니는 여기서 벌금 10달러를 내고 47달러 50센트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분의 이름으로 명명된 뉴욕 공항의 지정 주차 구역은 장애인이 우선이 아니라, 법관 장애인 상원의원 순으로 되어 있답니다.
법에도 눈물이 있다, 이게 오늘의 본문의 욥이 하나님이 법정에서 한 말입니다. 지난 시간에 사람에게 딱지를 맞은 욥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대면해서 하나님 앞에 변백 하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욥은 그 하나님의 법정에서 한 사람으로서의 인생이 당하는 고통과 슬픔을 진술합니다. 만약 이 욥의 진술이 세상 법정에서의 진술이라면 재판장의 마음이 흔들기에 충분하고, 방청객이 함께 눈물을 흘릴 한 인생에 대한 진솔한 진술입니다. 이 욥의 진술을 한 줄로 요약하면 하나님은 불쌍한 인생들에게 라과디아 같은 재판장이 아니라, 너무나 가혹하신 재판장이시라는 겁니다.
인생들에게 가혹한 재판장이신 하나님
먼저 짧은 생애를 걱정 속에서 살다가 덧없이 가는 연약한 인생에게 재앙을 주시는 것은 너무도 가혹한 처사라는 겁니다. 지난 금요일 제 친구 댁이 두 번째 수술을 받았습니다. 평생을 고생하며 살다 춘천에 집을 마련해서 여생을 보내려 했는데, 의료사태로 미룬 수술이 암이 되었습니다. 참 하늘도 무심한 것 같습니다. 1-3절이 이런 말입니다. 여인에게서 태어나서 행복하게 살아도 부족한데 짧은 생애를 걱정 슬픔 속에서 살다가 꽃과 같이 시들고 그림자같이 가는 가련한 인생인 저를 남은 때나마 평안히 살도록 놔두셔야 옳은데, 오히려 하나님께서 돋보기로 보듯 죄를 찾아내 재판해서 형벌을 가하시는 것이 너무 가혹하시다는 겁니다.
둘째, 인간은 죄로부터 완전히 순결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이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인내와 동정의 대상이 되어야만 한다는 겁니다.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4) 여인에서 난 연약한 인간은 죄로부터 절대적인 순결은 불가능한 존재라는 겁니다. 욥은 인간의 생명의 한계만 인식한 게 아닙니다. 욥은 인간의 도덕적 한계도 인식한 겁니다. 깨끗한 것이 더러운 것에서 나올 수 없음 같이, 죄에서 절대적으로 순결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겁니다, 최선을 다 해도 인간에게 완전한 순결은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살날까지 정하시고 그것을 넘지 못하게 하신 하나님은(5) 인간의 이 어쩔 수 없음을 불쌍히 여기서 어려서 참외 설이 한 것 같은 죄는 눈을 감으셔서 품꾼이 저녁때 품삯을 받는 안식을 누리듯 내가 마지막에 편히 죽을 수 있도록 이 재앙을 거두어 주셔야 옳다고 하나님께 애소하고 있습니다.(6)
셋째, 한번 죽으면 다시 살지 못하는 소망 없는 인생에게 죽음의 심판을 주시는 것은 너무 가혹하시다는 겁니다. 나무도 베어져도 그루터기에서 새순이 돋는 소망이 있다면,(7-9) 인생이야말로 죽음에도 소망이 있어야 하거늘. 어찌 하나님은 사람은 한 번 죽으면 다시 볼 수 없게 하셨느냐는 겁니다.(10) 욥은 그래도 그 하나님을 믿습니다.(12) 그래서 이 진노를 피할 수 있게 이 재앙에서 자기를 놓아주셔서 스올에 내려갈 수 있게 해달라고 애소합니다.(13) 그러면 그 스올에서 이 모든 고난을 참으며 이 죽음에서 풀려나기를-부활을 - 기다리고,(14) 주께서 자기를 부르시고 자기가 대답할 수 있도록 하나님과 화목하기를 열망합니다.(15) 이게 욥의 믿음입니다.
그러나 이런 욥의 열망에도 불구하고 자기 허물과 죄악을 봉하시고 싸매셔서 심판하시므로(16)산이 무너지고, 홍수가 땅의 티끌을 쓸어가듯 하시므로 인생은 쉬이 죽고 죽은 후의 일은 알 수가 없어서 살이 아프고 자기 마음이 슬플 뿐이라며 쓸쓸하게 진술을 마쳤습니다,(18-22) 이렇게 욥의 진술은 공감을 자비를 부를 진술입니다. 그러나 이 욥의 진술에는 지식과 마음이 일치하지 않는 모순이 내재하고 있습니다.
욥의 한계와 모순
욥은 인생이 죄로부터 완전히 순결하기가 불가능한 걸 알지만, 여전히 자기 의를 버리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욥은 완전한 순결이 불가능한 인생은 하나님의 동정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이 인간의 어쩔 수 없을 불쌍히 여겨 그리스도를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모릅니다. 욥은 부활을 바라지만 그 부활의 근거를 모릅니다. 즉 알기는 하지만 믿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이게 욥의 한계이며 욥의 모순입니다. 왜 욥이 말하면서 모르고 믿지는 못합니까?
그것은 이 욥의 진술에서 보듯 고난이 의혹의 하나님을 만드는 시험에 들어서입니다. 여기에다 욥의 친구들의 재앙은 하나님의 정의라는 공박이 욥을 더욱 자기 의를 고집하는 주관에 빠지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착하고 좋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욥이 알고, 말하면서도 모르고 믿지 못한 건 결정적인 이유는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데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모르니 부활을 바라나 믿을 수는 없습니다. 부활의 소망이 없는 욥이 수고와 비참과 슬픔의 인생으로 남게 되었다는 점이 우리 가슴을 저미게 합니다.
행운의 신약 성도
여기서 우리는 신약 성도의 복됨을 재발견합니다. 지난봄에 제가 인생의 허무를 노래한 <벚찌>를 주보에 실었었지요.
꽃구름 유년의 꿈이
철들어 푸를 무렵
청운이 파랗게 다닥다닥 열어
열정으로 빨갛더니
단맛 들자 까매져
떨어져 밟히는 게
인생이란 말이더냐?
내 그럴 줄 알았다
찬란하게 피어나
파랗게 열어
빨갛게 익어가다
맛들 만하면
까맣게 죽어 가는 게
인생인 것을!
어쩔 뻔했나?
나사렛 사람 그분이 아니시면!
만약 우리가 욥의 시대에 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부활의 영광을 알지 못했다면, 고난과 죽음이 마실 내 인생의 잔이 되면 “오직 자기 살이 아프고 자기의 마음이 슬플 뿐이니이다” 이렇게 회한에 찬 인생의 막을 쓸쓸하게 내릴 수밖에 없는 허망한 인생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현재의 고난이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음을 압니다. 예수께서 사망을 이기시고 나온 것 같이 우리가 다시 살 것을 압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망 앞에서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개가를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게 이 험한 세상을 살 우리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셔서 사망 권세를 발아래 밟게 하신 은혜를 찬송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부활의 권능으로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며 죽을 것을 죽지 않을 것을 살려 구원해 가야 할 줄 믿습니다. -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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