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강해

고장 난 엘피판 돌리기

아브라함-la 2024. 12. 16. 18:00

024,12,2, 주일

본문 : 욥15:1-36

말씀 : 라인권목사

 

대림절이 시작되었습니다. 대림절은 성탄의 주를 맞을 준비를 하므로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하는 절기입니다. 이번 대림절을 통해서 주님을 맞을 수 있도록 믿음의 등에 기름 준비하시고, 성탄의 빛으로 이 땅이 조성되고 있는 전쟁의 위험이 사라지고 항구적인 평화가 정착하기를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합니다.

 

이 정부가 들어서 대북 방송을 재개한 이후에 북한도 대남 방송을 재개했습니다. 북한은 신경을 거슬리는 괴괴한 소음을 송출해서 접경 지역 주민들은 잠을 잘 수 없고, 정신병이 걸릴 지경이라서 초등학생이 대통령께 대남 방송을 그치게 해달라고 호소하는 편지를 보낼 정도입니다. 지혜자는 이른 아침에 축복하면 축복도 저주 같다고 했습니다. 격에 맞지 않으면, 축복도 저주 같은 데 정죄의 말을 반복적으로 듣는 것처럼 괴로운 일은 없을 겁니다. 지금 이런 일이 욥기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제 욥과 친구들의 논쟁은 2라운드에 돌입했습니다. 야구로 말하면 타순을 일순하고 다시 일 번 타자 엘리바스가 두 번째 타석에서 욥의 말을 반박합니다. 그러나 이 엘리바스의 두 번째 말은 새로운 것은 없고, 앞서 말했던 욥의 고난이 “인과응보”라는 진부한 주장을 말만 바꾸어 다시 반복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재앙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다. 욥이 재앙을 받고 있다. 그러므로 너 욥은 회개해야 할 죄인이다. 이렇게 “인과응보”라는 흘러간 유행가를 고장 난 엘피판 돌리듯 했다는 것이지요. 이게 모든 욥의 친구들의 주장이고, 이 똑같은 말을 단어만 바꾸어서 3회전까지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왜 욥의 친구들이 고장 난 엘피판 돌리듯 같은 소리를 반복하고, 이렇게 말할수록 접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본말이 전도되어서 서로의 감정만 상하고, 점점 간격이 넓어지기만 하고 있는지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왜 욥의 친구들은 “인과응보” 재앙은 하나님의 정의라는 진부한 유행가를 고장 난 엘피판 돌리듯 하고 있을까요?

 

첫째, 교리주의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면 교리는 하나님 개념과 불가 불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악인을 형벌하십니다. 따라서 재앙이 하나님의 형벌이라는 것을 부정하면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 되는 겁니다. 이런 특성이 교리를 절대화하는 교리주의에 빠지게 합니다. 그리고 이 교리주의가 욥의 친구들에게 재앙은 하나님의 정의라는 것만 보게 했습니다. 즉 시각이 좁아지고, 사실과 경험에 눈과 귀를 닫게 합니다, 그래서 욥의 친구들이 욥의 경건과 말에는 눈을 감고 재앙은 하나님의 정의라는 말을 고장 난 엘피판 돌리 듯 한 겁니다.

 

유감스럽지만, 이것은 욥도 마찬가집니다. 욥의 친구들은 죄를 벌하는 하나님만 보고 주장하고 있다면 욥은 전능하신 하나님만 보고 있는 겁니다. 전능하셔서 내가 무죄하고 경건한 것을 다 아시면서도 왜 재앙을 내리느냐고 하나님께 따지겠다고 하니, 지금 엘리바스는 네가 어디 하나님 앞에 눈에 힘을 주고 감히 입을 놀리느냐고 질타하며(12,13) 너를 정죄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네 입이라며(6) 계속  하나님 편을 들어 욥을 정죄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편협한 교리주의에 빠진 대화는 고장 난 엘피판처럼 같은 논리, 같은 말을 반복할 수밖에 없고, 합의에 이르지 못하는 영원한 평행선이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편협한 교리주의를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시야가 넓어져서 진리의 다른 면을 보고, 사실과 경험을 인정하게 되어 공감대를 이루고 합의에 이를 수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편협한 교리주의에서 벗어나 널리 보고 합리적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둘째. 욥의 친구들은 욥이 자기기만에 빠져서 자기를 의롭게 여기는 것으로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욥은 친구들이 욥에게 회개하라고 충고할수록 더욱 강력하게 자기의 무죄를 주장했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이 욥의 자기변호를 욥이 자기기만에 빠진 것으로 안 겁니다. 욥이 자기를 속이고 있다는 겁니다. 이 욥을 버려두면 다시 회복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친구로서 욥을 이단자처럼 버려둘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욥을 회개시키려고 2회전에서도 “재앙은 하나님의 정의다.”를  고장 난 엘피판 돌리듯 하며  더 잔인하게 욥의 죄를 입증하려고 한 겁니다.

 

바로 여기에 욥의 친구들의 모순이 있는 겁니다. 그들이 욥을 사랑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랑한다면 왜 소문난 욥의 경건을 인정하지 않습니까? 왜 욥의 말에는 귀를 닫고 있습니까? 무엇보다도 왜 욥을 위로하지 않고 충고만 합니까? 이건 오해 때문입니다. 욥이 자기를 의롭게 여기는 건 자기를 기만하고 있다고 욥을 나쁘게 생각해섭니다. 이 오해는 오해가 낳은 오해입니다. 세상은 고난당한 하는 사람을 나쁘게 봅니다. 이 오해, 즉 욥을 나쁜 사람으로 아니 욥이 의도적으로 자기 양심으로 속이고 무죄를 주장하는 것으로 오해해서 욥의 말과 양심을 믿지 않은 겁니다.

 

잔인함을 사랑으로 오해함

이 오해와 욥에 대한 불신이 죄가 있어서 재앙을 받으면서도 자기 양심을 속이고 자기를 의롭게 여기는 완악한  욥을 회개시키려면 위로보다 충고와 책망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재앙은 하나님의 정의다” 를 고장 난 엘피판 돌리듯 반복할 뿐만 아니라, 더욱 잔인하고 섬뜩하게 욥을 정죄한 겁니다. 결국 욥의 친구들은 욥이라는 사람만 오해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잔인해도 된다고 오해한 겁니다. 이것처럼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해서 더 혹독하고, 잔인해지는 겁니다. 많은 부부들이, 부모와, 자식 간에, 형제간에 친구 간에 잔인을 사랑으로 인식하는 비극을 양산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사랑을 빙자해서 잔인한 비판과 충고를 거침없이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 배려, 인격을 잃은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위로와 배려가 없는 충고는 사랑을 빙자한 무례요 잔인일 뿐일음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욥의 친구들은 욥의 자기변호와 논박을 유죄의 증거일 뿐만 아니라, 욥에 대한 고소를 무산시키려는 전략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욥의 친구들이 욥을 죄인으로 단정한 것은 유죄의 증거가 있어서가 아니라, 욥이 상상할 수 없는 재앙을 당한 것은 그에 상응하는 죄가 있을 거라고 추리한 겁니다. 그래서 재앙은 하나님의 정의라고 욥을 정죄했습니다. 욥이 이 정죄를 받자 친구들에게 엄숙하고 강하게 무죄를 주장할 뿐 안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여 왜 무죄한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시냐고, 하나님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불경건한 말을 하고 반항적인 말을 했습니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서 뒤에 하나님께서 욥을 책망하셨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이 욥의 말을 욥 안의 죄악의 표출로 본 겁니다.

 

즉 지금까지 추측으로 욥을 정죄한 욥의 친구들은 욥이 자기들의 정죄에 하나님께 불경하고 반항적인 말을 하자, 그 말이 욥의 유죄의 증거라고 한 겁니다. 5,6절이 이런 뜻입니다. 네 죄가 네 입을 가르쳐서 네게 간사한 말을 하게 한다, 너를 정죄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네 입이다. 네 입술의 말이 네가 죄인이라고 증언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즉 욥이 경건하다면 결코 하나님께 이런 말과 태도를 취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욥의 말이 욥의 교만과 죄와 불경의 증거라는 겁니다.

 

그리고 욥이 자신의 양심을 속이며 의를 주장하는 것은 자기에 대한 정죄를 무산시키려는 전략이라는 겁니다. 즉 욥의 친구들은 욥의 양심 고백을 믿어 주지 않고 오히려 죄를 감추는 사악한 전략으로 오해한 겁니다. 제가 기숙사에서 나갈 때에 박윤선주석 한질을 훔쳐 간 친구 이야기한 적이 있지요. 그 친구는 자기 죄를 숨기고 추궁을 면하려고  자기는 오해를 받았다면 자신의 무죄를 엄숙하게 하나님 앞에서 맹세하며 기도했습니다. 욥이 이렇게 전략적으로 자기 죄를 부인하고 의를 주장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엘리바스는 재앙은 하나님의 정의라는 진부한 소리를 고장 난 엘피판 돌리듯 계속할 뿐만 아니라, 악인이 받을 심판을 소름 끼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17-36)

 

여러분! 격에 맞지 않으면 축복도 저주로 들리는 것이 인생입니다. 하물며 자식 열을 잃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상피병이 들어서 겨우 연명하는 욥이 이 무서운 말을 계속해서 듣는 건 고통을 넘어 진저리 나는 일이었을 겁니다. 이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만 상합니다. 그래서 “보상을 얻으려고 친구를 비난하는 자는 그의 자손들의 눈이 멀 것이라”(17:5) 이런 입에 담지 못할 악담을 주고받게 된 겁니다. 교리주의 대 교리주의는 영원한 평행선이지 합의점이 없습니다. 사람을 오해하고, 나쁘게 생각하는 토론은 서로의 감정만 상할 뿐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그러면 욥의 친구들이 이 지경이 되게 한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입니까?

 

마음에 사랑이 없어서

그게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 즉 사랑이 없어섭니다. 이 사랑이 없어서 위로보다 고난을 분석하려고 합니다.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상대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사랑이 없어서 고난당하는 이를 나쁘게 생각합니다. 사랑이 없어서 말꼬리를 잡아서 유죄의 증거를 삼습니다. 사랑이 없어서 진리를 사람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정죄하는 데 씁니다. 사랑을 오해해서 잔인하게 말하고 대하게 합니다. 사랑이 없어서 사랑을 빙자해서 잔인한 충고와 비난을 고장 난 엘피판 돌리듯 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빌 3:1)고 하셨습니다. 성도들을 사랑해서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은 전하는 자와 듣는 자를 유익하게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같은 주제를 반복해서 강론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마음이 없는 신학이나 교리를 정죄를 위해서 고장 난 엘피판 돌리듯 하는 건 욥의 친구들처럼 사람을 잡고, 비참한 이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 뿐입니다.

 

이 끔찍한 죄가 우리 인간에게 있음을 욥기는 증언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안에 이 끔찍한 죄가 있다는 겁니다. 사랑 없는 충고처럼 가증하고 끔찍한 건 없습니다. 사랑을 빙자한 비판처럼 악한 건 없습니다. 교리를 비인격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처럼 무서운 일은 없고, 사랑 없이 정죄를 목적으로 교리를 고장 난 엘피판 돌리듯 하는 것같이 무자비한 것은 없습니다. 천사처럼 말해도 사랑이 없으면 개뿔도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라”(엡 4:15) 고 하셨습니다. 이 시간 이 말씀을 우리 마음에 새깁시다.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라!”

 

은혜로 가족 여러분! 이 시간, 사랑 없는 말, 사랑 없는 충고, 사랑을 빙자한 충고와  교리를 정죄에 쓰고 싶어 하는 것을 비기독교적이며, 비인간적인 비정한 정신을 죄로 알고, 이 죄가 내 안에 있음을 끔찍하게 여겨야 하겠습니다. 이 비정함을 죄로 알고 이것을 끔찍하게 여기는 마음이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라고 믿습니다. -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