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강론

욥, 인내의 표상인가?

아브라함-la 2026. 3. 15. 16:08

026,3,1

본문 : 약5:7-11

말씀 : 라인권목사

 

평안입니다. 지난 주일 악인의 멸망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악인을 심판하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심판의 방식을 보아야 악을 이기는 믿음의 방법도 볼 수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말씀이 말씀을 준비한 제 의도와 달리 정치적으로 들렸다면 제가 전달에 실패한 겁니다. 이번 일은 말씀을 듣는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입증했습니다, 오늘도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깨닫게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부터 본문에서 야고보 사도가 본받으라고 한 욥의 인내가 무엇인지를 공부하려고 합니다. 이것을 강단에 올리는 것은 인내는 사순절에 묵상할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사순절은 고난을 견디신 주님의 순종과 인내를 따르는 절기입니다, 이 공부가 이번 사순절에 주님을 따르는 은혜를 더 깊고 풍성하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이 본문을 공부하려고 하는 것은 본문의 욥의 인내를 욥기의 목적이나 결론으로 삼고 있는 경향 때문입니다. 이것을 욥기의 결론으로 보면 욥기와 차이가 나고 충돌이 발생합니다. 욥기에서 욥의 인내는 본이 될 만큼 완벽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욥기가 인내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 이 본문과 부딪칩니다. 영감받은 사도 야고보가 욥의 결말을 욥의 인내로 보고 욥의 인내를 본받으라고 했기 때문에, 인내가 아니라고 하면 성경의 영감성을 부인하는 것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야고보가 말하는 인내가 어떤 것인가의 해석이 요구되는 겁니다. 그래서 욥기를 공부한 우리는 야고보 사도가 가르친 욥의 인내가 무엇인가를 공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순절 동안 “특주 형식”으로 야고보 사도가 말한 욥의 인내를 공부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먼저 공부할 것은 야고보가 말한 욥의 인내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 야고보가 말한 것이 아닌 것을 먼저 규명해야 합니다.

 

1, 야고보가 본받으라는 인내는 완벽하고 영웅적인 인내가 아니라는 겁니다. 10절을 봅시다.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고 했습니다. 이 “휘포 그람몬”란 휘포=아래, 그람몬 =보이다, 가르키다,로 아래에 놓고 보여 준다는 뜻입니다. 아이들이 글이나, 그림을 배울 때에 사용하는 글본이나 그림 본과 발아래에 있는 발자국입니다. 즉 본보기 모범 사례로 단순한 예시가 아니라 반드시 따라야할 모델을 말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리스도가 고난의 본이라며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셨다고 한 겁니다.(벧전2:21) 즉 야고보 사도가 선자자들 중에서 인내의 모델을 선정할 때에 ‘인내하면 욥이지!’ 이렇게 욥을 “인내의 표상”으로 세우고 욥의 인내를 본받으라고 격려했다는 겁니다.

 

이게 부흥사들의 방법입니다. 제가 교사 강습회 개강 예배를 사회했는데 그날 강사의 주제가 명품인생이 되라는 건데 예수 만나면 요셉처럼 10대에 꿈을 꾸고, 이십대에 준비해서 삼십대는 영향을 끼치는 명품인생이 된다며, 방황하던 학생이 예수 믿고 목표 의식이 가지고 준비해서 검사되고 기상 캐스터 되었다고 당시 스타였던 기상 캐스터 얘기를 했습니다. 이렇게 야고보가 욥을 영웅적인 인내의 표상으로 삼아서 욥 같이 인내하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러나 야고보 사도가 이런 식으로 욥을 인내의 기준 표준으로 삼은 것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1) 실제로 욥기에는 이런 영웅적인 인내는 없기 때문입니다. 재앙 중에서 찬송하던 욥이 욥이 생일을 저주했지요. 욥이 생일을 저주했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첫째, 욥의 인내가 완벽한 게 아니라, 한계가 있었다는 겁니다. 베드로의 한계치는 일곱 번입니다. 그 이상은 참을 수 없습니다. 이 한계가 욥에게도 있습니다. 한계치까지는 참지만, 그 한계를 초과하니 욥이 참지 못하고 생일을 저주한 겁니다. 욥이 한계를 극복하거나 초월한 사람이 아닙니다. 이 한계치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인내의 한계가 있는 사람은 완벽하지 못해서 만인이 따를 “휘포 그람몬” 본, 자취. 사표가 될 수 없습니다.

 

둘째, 욥이 생일을 저주한 건 욥도 참을 수 없는 것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욥이 물질과 자녀를 잃고, 자기 건강을 잃어도 찬송했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이 눈치로 정죄하자 생일을 저주했습니다. 즉 소유나 건강은 참을 수 있지만, 욥 자기를 지탱하는 기둥인 자기 의를 공격하자 폭발해서 생일을 저주해 버리고, 나중에는 악담을 서슴치 않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자기 이를 건드리는 친구고 뭐고 없다는 거지요. 이렇게 다 참아도 참지 못할 것이 있는 사람은 결국 폭발합니다. 이 사람은 인내의 본 “휘포 그람몬이” 일 수 없는 겁니다.

 

셋째. 욥이 생일을 저주한 건 하나님께 대한 신뢰가 흔들리고 믿음의 사고가 마비되었다는 뜻입니다. 뒤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만, 성도가 고통을 참고 인내하는 게 가능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그 하나님으로 고통을 해석할 때에 가능합니다. 인내는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신뢰에 있습니다. 그런데 욥은 고통이 계속되자 하나님께 어서 죽어 고통에서 해방되게 제발 자기를 놓아달라고 하며, 하나님이 시험이 되어서 하나님을 원수 같으시다고, 낙심하고 절망했습니다. 즉 욥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지 못하고, 믿음으로 자기 고통을 믿음으로 해석해 나가지 못해서 하나님이 시험이 된 거지요. 이런 욥이 인내의 “휘포 그람몬” 일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을 부인하는 성경학자는 없습니다. 칼빈도 이를 인정하고, 헨드릭슨은 “욥은 자신의 인내 없음을 많이 드러내었고, 불평을 늘어놓았으며,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였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야고보가 욥의 인내를 본으로 삼으라고 할 때에 욥을 완벽한 인내의 영웅으로 보고, 그 영웅적인 욥을 인내의 본을 삼으라고 하신게 아닙니다.

 

(2) 야고보가 완벽한 인내의 본을 제시하려고 했다면 욥이 아닌 십자가의 고난을 참으신 예수님을 본으로 삼으라고 해야 합니다. 욥은 자기를 치는 친구들을 되받아치고 욕하고 저주했지만, 예수님은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참으시고 그 원수를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욥은 재앙으로 자기가 말거리가 되는 수치를 견디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모든 조롱과 십자가의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욥은 고난을 주시는 하나님이 시험이 되어 원수 같으시다고 했지만, 예수님은 자기를 외면 하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신뢰했습니다.

 

그러므로 완벽한 인내의 “휘포그람몬”은 예수뿐이십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부당하게 고난을 당할 때에 하나님을 생각하고 고난을 참을 때에 그리스도를 본으로 삼으라고 하신 겁니다.(벧전2:21) 예수님만 기준입니다. 그러므로 부당한 고난을 당하면 예수님을 보시기 바랍니다, 인내가 요구되는 때에 예수님을 본으로 삼으면 하늘 보좌에 앉으신 어린양 예수로부터 인내할 힘이 옵니다. 십자가 넘어 부활의 영광과 심판의 소망이 절망을 이기고 승리하게 하고, 예수님을 닮게 할 줄로 믿습니다.

 

2, 따라서 야고보가 본받으라는 욥의 인내는 처음과 끝이 동일하거나. 모든 고난을 극복하게 하는 기계적이거나 이적적인 아니라는 뜻입니다. 욥의 인내를 1장과 2장에 나타난 인내를 생각하고, 욥과 같은 인내를 가진다면 그 인내가 모든 고난도 이기고 극복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치 믿음을 도깨비방망이 같이 인식해서 믿음을 가지려고 산에 올라가서 소나무를 뽑습니다. 인내를 이렇게 인식합니다. 그래서 인내를 처음과 나중이 같은 정형화 된 것 같이 여깁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데로 욥의 인내는 정형화된 것도 아니고, 고난을 이기게 하는 신비한 능력을 갖춘 것도 아닙니다.

 

이건 인내라는 말을 생각해봐도 분명해집니다. 인내라는 말 “휘포모네‘ὑπομονή는 아래에 머무르다, 짐 아래 버티다, 끝까지 남아 있다는 뜻으로 무너지지 않는 지속성입니다. 즉 인내는 견딤이 아니라 아래에 머묾이며, 떠나지 않는 것, 자기 상황에서 관계를 지속해 나가는 겁니다. 그러나 욥기에서 우리가 만난 욥은 견고하게 선 사람이 아니라, 흔들리는 사람입니다. 생일을 저주합니다, 지금까지 확신하던 신학과 신앙이 무너집니다. 신앙도 신조, 신념도 다 흔들렸습니다. 경외의 대상이던 하나님이 논쟁의 상대가 되고, 항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즉 욥의 인내의 그 자체에 고난을 이기는 신비한 능력을 가진 것도 아니고, 처음부터 정형화 된 미덕이 아니라, 상황에서 발생하고, 시험받으며 형성되어 가는 미덕이라는 겁니다. 말하자면 인내란 신앙이 무너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흔들리고 무너져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욥이 고통으로 자기 신앙이 흔들리고 무너져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을 때에 하나님은 그 욥을 만나주시고, 이 만남으로 인내가 만들어졌다는 겁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걸 본으로 삼았다는 겁니다.

 

이게 야고보가 우리가 다 아는 욥의 인내가 부족함과 흔들려 생일을 저주한 한걸 언급하지 않은 이유입니다. 헨드릭슨은 이 이유를 “욥은 자신의 인내 없음을 많이 드러내었고, 불평을 늘어놓았으며,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라합의 거짓말을 보지 않고 신앙만 본 것 같이 단점이 아니라, 장점만 보시다고 했습니다, 칼뱅 선생도 욥의 인내가 부족한 것을 보지 않으시고, 연약해서 혼자 끙끙대며 하나님께 자신을 맡긴 것을 칭찬해서 본이 되게 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본받을 욥의 인내는 완전하고 영웅적인 인내가 아니라, 흔들리며 인내라는 믿음의 꽃을 피워낸 욥입니다.

 

도종환은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도 인내는 없습니다. 흔들려야 인내가 아름다운 꽃이 됩니다. 흔들림으로 낙심맙시다. 흔들림은 실패가 아니라 개화의 방식입니다. 흔들리면서 인내를 알아가고 만들어갑시다. 하나님은 이를 욥처럼 평가해 주시고, 그에게 욥과 같이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이 되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