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6,3,8 주일
본문 : 약5:10-11
말씀 : 라인권목사
춘설이 분분해도 꽃 소식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봄꽃은 꽃샘추위 속에서 피어납니다. 이게 욥의 인내가 아름다운 이유입니다. 욥의 인내는 완벽하거나, 영웅적인 인내가 아니었습니다. 욥도 한계가 있고, 절대로 참을 수 없는 것이 있었고, 하나님께 대한 신뢰도 흔들리고, 믿음의 사고도 흔들려 버렸습니다. 이렇게 흔들리면서도 욥이 인내한 것이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것을 본받으라고 하신 겁니다. 그래서 오늘은 야고보가 본받으라고 한 욥의 인내가 무엇인가를 공부해야 하지만, 욥의 인내가 무엇에 대한 인내인지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 욥이 인내해야 했던 고통이 무엇인지를 다시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욥이 재앙에서 찬송한 건 상식 수준
흔히들 욥의 인내를 하나님께서 내리신 재앙을 참고 찬송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욥은 그 재앙의 고통은 훌륭하게 참았습니다. 잘 참던 욥이 친구들이 온 후에 갑자기 절망해서 생일을 저주했습니다. 이건 재앙 자체가 욥을 절망시킨 것이 아니라, 재앙과 다른 고통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욥이 인내한 고통을 재앙을 참은 것으로 여기는 건 욥의 인내와 신앙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낮추는 것이 됩니다. 빈손 들고 왔다가 빈손 들고 간다? 이건 대단한 게 아닙니다, 상식 수준이고, 인생을 달관한 사람의 수준으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욥이 재앙을 잘 참다가 친구들이 온 후에 낙심한 건 욥에게 소유나 건강을 상실한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소유나 건강은 욥에게 시험이 되지 못함
따라서 욥을 진짜 아프게 하고, 절망시킨 고통, 욥의 신앙으로도 참을 수 없고 시험이 되는 고통이 따로 있었다는 거지요. 그게 재앙 자체가 아니라 그 재앙이 낳은 고통입니다. 이 고통이 욥을 절망에 빠지게 한 고통입니다. 이 고통이 욥에게 인내가 요구되는 고통이고, 인내를 배워야 할 고통이었습니다. 이 욥의 고통을 욥기에서 가장 적나라하게 표출하고 있는 것이 욥19:1-22입니다. 그러면 욥과 같은 믿음의 사람도 절망케 하는 재앙이라는 고난이 낳은 고통, 우리가 진짜 인내를 배워야 할 고통은 어떤 고통입니까?
욥에게 시험이 된 고난이 낳은 고통은
첫째, 가까운 사람들의 비난과 정죄라는 폭행이 재앙이 낳는 고통입니다. 욥이 재앙을 당하자 제일 먼저 욥을 위로하러 왔던 친구들이 욥을 정죄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엘리바스는 죄 없이 망한 자가 없다, (4:7) 빌닷은 욥의 자식들이 죗값으로 죽었다고 하고, (8:4) 두 번째 연설에서는 욥의 고난을 “악인의 집에 임하는 하나님의 형벌의 본보기”라고까지 했습니다. 이 정죄의 고통을 호소하는 것이 19:1~6절입니다. 이 정죄가 욥의 마음을 괴롭히며 욥이라는 사람을 짓부수었습니다. (2) 이게 얼마나 아팠던지 욥을 이를 “학대”(3) “폭행”(7)이라고 했습니다. 이 정죄의 폭행을 하나님처럼 했다고 합니다. (22) 하나님처럼 한다는 건 욥을 자기들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고 여겼다는 겁니다.
이게 고난이 낳는 고난이며 고통입니다. 한 사람이 큰 고난을 당하면 우선 가까운 사람들이 자기는 의롭다는 상대적 의를 느끼고, 이게 자기를 선생으로 알게 해서 선생의 자리에 앉아서 정죄하기를 마지않고, 그다음에 여기서부터 말이 펴져 나가서 그 사람을 말거리로 삼습니다. 이게 너무 고통스러워서 다윗은 구설의 다툼에서 벗어나기를 기도했고(시 31:20) 교만하고 완악한 말로 무례히 의인을 치는 거짓 입술이 벙어리가 되게 해달라고 했습니다.(시 31:18) 내가 비둘기같이 날개가 있으면 날아가서 광야에서 피난처를 찾고, 광야에 거하기를 구한 것도 이 구설의 아픔 때문이었습니다.
욥이 이 무자비한 고통에 욥이 상처받고, 낙심하고, 절망했습니다. 왜 재앙의 고통을 잘 참은 욥이 이 고통은 참지 못했습니까? 그것은 이 친구들의 정죄가 욥을 지탱하는 기둥인 자기 의라는 자부심을 부정해서입니다. 이건 욥이 다 참아도 이 고통은 참을 수 없습니다. 이 고통이 욥에게 인내가 필요하고, 인내를 요구한 고통이며, 욥이 인내를 배울 고통이었습니다. 욥이 이 고통에 상처받고 낙심하고 절망하면서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하나님이 자기를 신원해 주실 것을 바라고 참고, 하나님을 기다렸습니다. 여기서 중보자를 만난 겁니다. 이게 욥의 인내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를 본받으라고 하신 겁니다. 그러므로 내가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닥치면, 그것에서 자기를 인내를 배워야 할 사람으로 압시다. 거기서 인내를 사용해서 인내를 이루어 가시기를 축복합니다.
둘째, 고난의 시험이 만들어 내는 망상의 하나님이 고통이 낳는 고통입니다. 이 고통을 호소하는 것이 6-12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억울하게 하시 그물로 나를 에워싸셨다.(6) 내 길을 막고 어둡게 하시고, (8) 영광을 거두어 가시고(9) 죽게 하시고 희망을 나무 뽑듯 하시고(10) 원수처럼 진노하시고(11) 군대처럼 치셨다고 합니다.(12) 이 원수 같은 하나님은 실존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 하나님은 고난으로 하나님이 시험이 되었을 때에 만들어 낸 망상 속의 하나님에 불과합니다. 이 망상의 하나님이 의혹과 의심과 회의를 불러일으킵니다. 내게 원수 같은 이 상상의 하나님이 절망에 빠지게 만듭니다.
이게 왜 못 견딜 고통입니까? 하나님이 내게 원수 같으시다. 하나님이 나를 외면하셨다! 하나님에게서 끊어지는 고통! 이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크고 참지 못할 고통입니다. 이게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호소하신 유일한 고통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이 자기를 십자가에 내어 주고 외면하셨을 때에, 예수님은 지옥을 경험하시고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라고 외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환난 중의 의지이신 저 높은 바위로, 산성으로 방패로 믿어온 사람입니다. 이렇게 의지하던 하나님이 내게 원수같이 시면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고통을 모르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욥이 이 고통 속에서 인내로 그 회의와 의심과 시험과 싸워서 자기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하시는 구원의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23-29절을 보세요, 이 절망 속에서도 욥은 중보자를 염원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땅에 서실 그리스도를 보게 하고,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겠다는 찬란한 신앙고백을 하게 했습니다. 야고보는 이 인내를 본받으라고 한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을 고통은 고난이 만든 망상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시험이 되고, 내게 원수 같은 하나님이면 인내를 배울 자로 알고, 인내로 망상의 하나님과 싸워서 망상의 하나님 너머의 선하신 구원의 하나님에 이르기까지 인내를 배워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셋째, 나 혼자라는 절대 고독이 고난이 낳는 고통입니다. 이 고통을 보여주는 것이 13-19입니다. 고난을 당하면 형제들이 멀어지고,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이 내게 낯선 사람이 됩니다.(13) 친척과 친지들이 버리고 잊습니다.(14) 심지어 가솔들도 낯선 사람으로 여기고 종도 무시하고, 가족인 아내가 숨결도 싫어하고 자식이 불쌍하게 봅니다. 아이들까지 업신여기고 가까운 친구들이 미워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원수가 됩니다. 즉 고난은 모든 사회적인 관계 인간관계가 끊어지게 하고 거기서 나를 소외시켜 버리는 겁니다.
이 고통이 죽을 맛입니다. 제일 친하고 가까운 사람이 모르는 사람같이 낯설게 됩니다. 가난하면 형제도 미워하니 친구는 벌써 없어졌다는 잠언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 집니다. 왜냐면 내 존재 자체가 그냥 부담스럽습니다. 불행을 불러오는 불길하고 재수 없는 사람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고난은 사람을 소외시킵니다. 혼자로 만듭니다. 이걸 절대 고독이라고 합니다. 카프카의 “변신”이 고독을 “벌레”가 된 것으로 묘사했습니다. 이게 고통이 낳은 고통, 욥의 고통입니다.
욥이 이 절대 고독의 고통에 절규하지만, 이 고통에 욥이 아주 먹혀버린 게 아닙니다. 그 고통과 절규 속에서 잠잠히 침묵하고 고독하게 하나님을 향했습니다. 그 고독한 침묵에 하나님께 폭풍 속에 임하셔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게 야고보 사도가 우리에게 본받으라고 한 욥의 인내입니다. 이 절대 고독이라는 고통이 우리가 인내로 싸울 고통입니다. 이 고독의 고통 속에서 침묵하는 욥의 인내를 배웁시다. 이 고독으로 인내하며 기도합시다. 이것이 고통에서 구원의 하나님을 경험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아는 신앙에 이르게 할 줄로 믿습니다.
은혜로 가족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인내하고 싸울 대상은 고난 자체가 아니라, 그 고난이 낳는 고통입니다. 이 고통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가중됩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하면 왜 예수 믿는 사람이 이렇게 되냐고 합니다. 원수 같은 하나님의 고통은 신자만 아는 고통입니다. 신앙은 여기서 발생하는 고통과 투쟁해 나가는 여정입니다. 이 고통을 인내로 싸울 때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깊이 알고 아들의 형상을 이루는 구원에 이릅니다. 이번 사순절이 이 거룩한 싸움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아는 신앙이 되어 눈으로 보는 것 같이 하나님을 아는 신앙에 이르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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