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6,3,22, 주일
본문 : 약5:10-11
말씀 : 라인권목사
평강입니다. 어젯밤 광화문에서 BTS에 열광하는 사람들을 보며 내가 예수님께 저렇게 감격하고 저렇게 찬양하고 있는지를 성찰하며 부족함과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오늘 예배가 하나님을 만나는 감격과 환희로 충만한 예배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지난 주일 말씀을 정리하면 욥의 인내는 시험에 흔들리고 무너지면서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믿음의 지속이었습니다. 고통에 무너지고 항의하고 질문하지만, 끝까지 하나님을 상대로 합니다. 정죄의 고통은 하나님께 변백 하는 기도로 인내했고, 내게 원수 같으신 망상의 하나님의 고통은 선하신 하나님 찾는 기도의 투쟁으로 인내할 수 있었고, 세상에서 소외되는 고통은 침묵의 기도로 인내했습니다. 기도가 해소이었고, 안식이자 위로이고 시험이 되는 고통을 참게 하는 방법이자 능력이었던 겁니다. 이 사실에서 분명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의지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내의 근거
그게 기도로 욥이 인내할 수 있었다는 건 , 욥의 인내가 욥의 영웅적인 의지력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이셨다는 겁니다. 바로 이 점을 보여 주는 것이 본문의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욥의 인내의 근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인내가 가능했다는 거지요. 이렇게 인내의 근거가 하나님이시라면, 여기서 우리가 해결하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그게 시험이 되는 고통 속에서 우리가 인내할 수 있는 근거가 하나님이시라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서 어떤 하나님 되심이 시험이 되는 고통을 인내할 언덕이시냐는 겁니다.
능력적 완전이 아닌 자비와 긍휼이라는 성품이
우리는 하나님이 능치 못하심이 없으신 전능자이시기 때문에 고통 중에 구원이 되시고, 의지할 언덕이시라고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구원에 능하신 전능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전능하심이 환난의 고통에서 의지가 되고, 소망이 되기 때문에 고통을 인내할 수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을 고통 속에서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으로 압니다. 이게 위기나 고통에 직면하면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를 외치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사도 야고보는 이런 상식과 달리 인내의 근거가 되는 하나님 되심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이라는 능력적 완전이 아니라, 자비와 긍휼이라는 성품, 인격적 완전이라고 하셨습니다. 전능한 하나님이 우리가 피할 높은 바위시라는 건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왜 사도는 하나님의 능력적 완전이 아니라, 자비와 긍휼이라는 인격적 완전이 인내의 근거라고 했을까요?
우리는 이 문제의 답을 욥기에서 분명하게 찾을 수가 있습니다. 욥기에서 친구들이 주장하는 하나님이 공의의 하나님이라면, 욥이 말하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욥기에서 몇 구절을 보겠습니다. 우선 욥이 생일을 저주한 것은 자기를 지으신 창조자, 즉 전능한 하나님을 원망한 겁니다.(3:4) 엘리바스의 첫 정죄에 욥은 자기가 하나님께 재앙을 받은 것을 “전능자의 화살이 내게 박힌 것”이라고 했습니다.(6:4) 그래서 무죄한 자기를 쏜 전능자에게 말하고 변론하려고 하고, (13:3) 과거 행복했던 시절에는 “전능자가 아직도 나와 함께 계셨지만 (29:5) 고통 날인 지금은 전능자가 낙심케 하고 두렵게 하신다고 합니다.(23:16) 그래서 27:2절은 “전능자가 내 영혼을 괴롭게 한다고 했습니다.
이 구절들은 고통 속의 욥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변론의 주제로 삼고 있지만, 하나님이 전능자라는 것이 고통을 인내할 언덕이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험이 되고 고통이 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욥에게 있어서 환난의 날에 하나님의 능력적 완전하심은 위로와 의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시험이 되고 고통이 되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시험과 고통이 된다는 것은 충격이지만 실은 이게 우리 모두의 경험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의 하실 수 있다는 능력적 완전이 도리어 시험과 고통이 됩니까?
전능하심이 시험과 고통이 되는 까닭
첫째,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것이 고통을 주시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셔서 내가 의롭고 경건하여 무죄한 걸 다 아시는데 왜 내게 재앙을 주셨느냐는 겁니다. 이게 우리가 고난이 오면 전능한 하나님이 시험이 되는 이유입니다. “내가 믿음으로 살려고 애쓰는 것 잘 아시는데, 왜 내게 이런 일이 있게 하시는 거지?” 이렇게 낙심되고 시험이 드는 겁니다. 전능하신데 왜 병을 고쳐 주시 않으신지라거나, 심지어 복권 사놓고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둘째, 전능하셔 연약한 인생이 재앙의 고통을 오랫동안 견딜 수 없다는 것을 잘 아시는 하나님이 왜 이 큰 재앙을 주시고. 이 정죄와 치욕을 당하도록 버려두시냐는 겁니다, 이 고통을 절절하게 애소하는 것이 욥7:12-21입니다. 행복하게 살아도 짧은 인생에게 재앙의 날을 주시고, 연약한 인생이 이 고통을 견딜 수 없다는 것 잘 아시는데, 왜 어릴 적 참외 설이 한 죄까지 찾아내 벌주시냐며, 어서 이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제발 내게 관심 끊고 죽게 해달라고 합니다. (7:12-21) 그렇습니다. 신앙의 위기는 하나님이 하실 수 있다는 확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선하시다는 확신이 흔들릴 때 일어나는 겁니다.
셋째, 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내게 원수 같으신 망상의 하나님을 만들게 했습니다. 나의 무죄함과 나의 약함을 잘 아시고 하나님께 진실한 것을 아시는 전능자가 재앙을 주시고, 친구들과 사람들에게 정죄와 치욕을 당하게 하시고, 그 하나님을 찾으면 피하여 숨고 도망치시는 것 같으니 꼭 하나님이 나를 원수 대하듯 하시는 것만 같은 겁니다. 무엇보다도 전능자가 내게 악의를 가지셨다는 것이 두렵고, 고통스러운 겁니다. 이 전능한 하나님의 권력 때문에 무죄한 자기에게 재앙을 주시는 하나님을 법정에 세울 수도 없고, 죄 없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정죄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9:8,10,19-20) 그래서 16:6-17에서 내 근심이 풀리지 않고 아픔이 줄지 않는 것은 나를 적대시하고 이를 갈고 원수가 되어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감시해서 무리들이 나를 능욕하고 내 뺨을 치게 하신다며. 전능자가 내 영혼을 괴롭힌다고 했습니다, ( 27:2)
정리하면 욥이 낙심이 되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건 전능자가 내게 악의를 가지고 대하시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이게 망상의 하나님을 만든 겁니다. 하나님의 능력적 완전은 시험이 되는 고통을 인내하는 언덕이 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시험이 되어 낙심하고 절망케 하고 의심과 회의에 빠지게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라고” 욥의 인내의 기반이 하나님의 능력적 완전하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완전하신 성품 인격성이라고 하신 겁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선하신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구원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시험이 되는 고통의 날에 하나님의 능력적 완전하심이 아니라, 선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의지할 언덕 삼으신다면 못 견딜 고통은 없을 줄로 믿습니다.
자비와 긍휼이라는 하나님의 성품은
그러면 이제 사도가 말한 인내의 근거인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라는 성품을 알아봅시다. 먼저 이 자비라는 말 “폴뤼스플랑크노스”는 문자적으로 풀면 “창자가 움직인다”라는 뜻으로 인간의 고통을 강 건너 불 보듯 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의 고통에 사랑이 발동하고 발작한다는 겁니다. 말하자면 자비란 하나님의 사랑의 동인으로서의 사랑인 겁니다. 이 사랑이 아들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동인입니다. 그리고 긍휼 “오익티르몬”οἰκτίρμων은 마음의 뱡향성 행동성이 강조된 말로 불쌍히 여기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자기와 동일시해서 행동한다는 뜻입니다. 자비 “폴뤼스플랑크노스”가 느끼심의 사랑이라면 긍휼 “오익티르몬”은 개입하시는 사랑입니다.
따라서 사도는 이렇게 말하는 셈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에 마음만 아픈 분이 아니라. 고통에 반응하여 행동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한 겁니다. 사도가 이 두 성품을 함께 사용한 것은 이 두 하나님의 성품이 인내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자비만 있다면 위로는 되지만 인내를 발동케 하기에는 부족합니다. 내 고통을 공감하시지만 행동하시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긍휼만 있으면, 행동하는 그 마음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뢰가 약해집니다. 그래서 사도는 자비와 긍휼을 함께 사용해서 하나님이 이토록 선하시고, 이토록 사랑하시니 고통 중에 마음 놓고 의탁하고 그 안에서 쉴 수 있는 하나님이라고 하신 겁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이토록 선하시고 이토록 사랑하신다는 인내 못 할 고통은 없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이제 이 하나님의 인격적 완전하심이 욥으로 하여금 어떻게 인내할 수 있었는지는 봅시다.
선하심이 어떻게 인내의 근거가 되었나
첫째,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라는 언덕이 죽어도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께 변백하게 했습니다. 마치 다윗이 하나님은 긍휼이 크시니 맞아도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맞겠다는 것 같이(삼하 24:14) 욥도 하나님 앞에 나가서 만약에 하나님이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를 그를 의뢰하여 나의 무죄함을 하나님께 말하겠다고 한 겁니다, (13:14,15) 이렇게 하나님의 선하심이 언덕이 되어서 신뢰를 포기하지 않게 하고, 하나님을 향해서 변백의 기도를 할 수 있게 하여 망상의 하나님의 고통을 인내하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고통 중에 이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확신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라는 언덕이 원수 같은 망상의 하나님을 장차 자신의 고난의 문제를 풀어주시고, 무죄를 신원해 주실 하나님으로 해석하여 인내하게 만들었습니다. 자기와 싸우는 것 같은 현재의 원수 같으신 하나님을 자기 호소를 들으시는 하나님으로 해석합니다.(23:6) 하나님을 자기 말을 듣고 죄 없다고 무죄 석방해 주실 하나님으로 믿습니다. (23:7) 자기를 피하여 도망치시는 것 같으신 현재의 하나님을 자기를 단련하여 순금 같이 나오게 하시는 하나님으로 해석합니다. (10) 이 믿음의 사고가 망상의 하나님 너머의 그리스도에게 이르게 하는 구원의 하나님에 이르도록 인내하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견딜 수 없는 고통의 날에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천부께서 좋은 것을 주심을 확신해 나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언덕이 망상의 하나님의 고통을 기도로 인내하며 싸우게 만들었습니다. 욥13:20-28의 욥의 기도를 봅시다. 지금 받고 있는 고통을 잠시나마 경감시켜 주시를 간청합니다. (13:21) 그러면 두려움이 줄어 하나님께 나갈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권력자가 권력을 과시하여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 같이, 하나님의 위엄 과시하여 공포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21) 하나님이 먼저 나를 불러 주시고, 하나님께 대답하여 말할 수 있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호소합니다. 이 기도가 가능한 건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진실하시고, 선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으로 기도에 낙심될 때도 전능한 하나님이 완전한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심을 확신하여 기도로 싸워나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은혜로 가족 여러분! 사도는 시험이 되는 고난에 성도가 인내할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향해 선하다는 확신이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신앙의 위기는 하나님이 하실 수 있다는 확신보다, 하나님이 내게 선하시는 확신이 흔들릴 때 옵니다. 하나님이 시험이 되는 건 언제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것 때문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하나님이 하실 수 있다는 확신의 싸움이기보다 하나님이 내게 선하시다는 확신의 싸움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으로 하나님이 시험이 될 때 하나님의 능력보다, 완전하신 성품을 봅시다. 시험이 되는 고통에서 나를 사랑하셔서 아들을 아끼지 않으신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붙잡고 묵상하고, 기도하며 그 성품을 주장해 나갑시다. 이것이 사순절 마지막 주간의 우리의 묵상의 주제입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버리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시며 십자가의 고통을 참으신 주님을 묵상합시다. 이 묵상이 내게 대한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더욱 깊이 확신하고 의지하게 할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어떤 고통도 인내하게 하는 어덕이 되고 능력이 될 줄로 믿습니다. -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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