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어떤 몸으로 다시 살까?

아브라함-la 2015. 4. 5. 17:27

2015, 4,5, 부활절 강론   

본문 : 고전15:35-49 

말씀 : 라인권목사


할렐루야!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한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 우리 부활의 처음 익은 열매가 되셨습니다. 예수께서 부활의 처음 익은 열매라는 것은 주님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이 별개가 아니라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부활은 우리 부활의 보증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요14:19) 이렇게 우리는 죽을 자가 아니라 살 자입니다. 오늘 복된 부활주일에 이 살게 하시는 부활의 능력이 임하여 살아나기를 축복합니다.


이 부활이 무엇이지를 분명히 하기 위하여 오늘의 말씀을 소개하기 전에 부활의 개념을 먼저 정리하려고 합니다. 부활이라는 말은 영혼에 대하여 쓰는 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영혼은 불멸의 존재입니다. 따라서 부활은 육신, 즉 몸이 다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서 아리마대 요셉이 자기 무덤에 장사지낸 예수님의 그 죽은 몸이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 했습니다.(행4;10) 그래서 사도신경은 “몸이 다시 사는 것과” 몸의 부활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활을 믿는 다는 것은 정신적이거나 실존적이 아니라 몸의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부활 때 다시 사는 것은 이 몸이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몸의 부활을 믿습니다. 몸이 다시 사는 것이 우리의 최후의 소망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몸의 부활을 믿는 다고 할 때 부활에 대하여 심각한 오해와 오류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그 오해가 몸의 부활을 완전히 육신적인 것으로 아는 것입니다. 부활한 몸이 단순하게 지금과 같은 육신의 몸인 줄로 안다는 것입니다. 만약 부활의 몸이 지금과 같은 육신이라면 어떤 문제가 생길까요?

우선 부활을 믿을 수가 없게 됩니다. 육신은 죽으면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면 그 양분으로 초목이 자라고, 그 초목을 동물이 먹고, 그 동물을 사람이 먹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부활이 설명이 안 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고린도교회가 몸의 부활을 믿지 못한 이유입니다.

그리고 부활이 지금의 육신의 몸의 연장에 불과하다면 부활은 정말 심각한 문제를 유발하게 됩니다. 이 문제를 논리적으로 제기한 사람들이 사두개인들입니다. 이들이 왜 몸의 부활을 부정했습니까? 한 사람이 결혼하고 자식이 없이 죽어서 고엘의 율법에 따라서 칠형제가 한 여인의 남편이 되었다. 그러면 부활이 있다면 부활 때 이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냐는 겁니다. 그러니 몸이 다시 산다면 부활은 도리어 곤란해진다는 것입니다. 부활을 육신적으로 생각하면 부활은 이렇게 만화같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육체 이대로라면 부활해도 피곤하기도 하고, 아프기도 할 것이고 결국은 다시 죽을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부활이 의미가 없어 집니다. 이것이 부활을 육신적으로 알기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들입니다. 그래서 고린도교인들이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떤 몸으로 사느냐고 한 이유입니다.


본문은 바로 이 문제에 대한 사도바울의 답변입니다. 어떻게 죽은 몸이 다시 살며 그 부활의 몸은 어떤 몸이요, 어떤 몸으로 다시 살게 되느냐를 설명하는 것이 오늘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죽어 무덤에 묻혀 흙이 된 몸이 어떻게 다시 살 수가 있습니까?

 

몸의 부활은 파종과 같이 지극히 당연한 창조의 법칙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은 부활은 파종과 같이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창조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농부가 파종하는 것은 씨를 땅에다 묻는 것입니다. 땅에 묻으면 썩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새싹이 나옵니다. 이것은 창조주가 정한 창조의 법칙입니다. 종자 땅에 묻히면 거기서 새 생명이 나오게 그렇게 창조하셨습니다. 밀을 심으면 밀알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 싹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되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농부가 씨를 땅에 심을 때에 썩어서 없어질까 슬퍼하고 근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놓고 소망 중에 기쁨으로 심는 것입니다. 이게 자연을 유지하는 창조의 법칙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죽어 장사지내 그 피가 마르고 육신이 흙이 되면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새로운 몸으로 다시 살아나도록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자연은 이 부활의 실제적 표상이요 증거입니다. 따라서 죽은 사람의 몸이 다시 사는 것은 이상한 일도 아니요, 불가해한 일이 아니라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인 것입니다. 이것을 못 믿는 오히려 이상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소멸이 아니라 심는 것입니다. 심어야 사는 것 같이 죽어야 부활이 있습니다. 죽음은 육신의 몸을 새로운 몸으로 다시 살게 하는 수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은 성도를 슬픔과 절망으로 장사지내는 것이 아니라 파종하는 농부와 같이 기쁨과 소망으로 장사하여 다시 살도록 심는 것입니다. 때가 되면 주님의 부르는 음성에 죽은 나사로가 무덤에서 살아나옴 같이 주님의 음성에 죽은 자가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올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죽은 자가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올 때 어떤 몸으로 다시 살아 나올까요?


부활한 몸은 어떤 몸인가

부활한 몸은 우리 영이 천국에 적합한 몸을 입는 것입니다

37-41절은 좀 복잡한 본문입니다. 정리하면 하나님은 각 종자에게는 그 종자에 이 세상에서 생존하기에 적합한 형체 즉 몸을 주신 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동물도 각각 그 동물이 이 땅을 살기에 가장 적합한 육체를 가지게 합니다. 그래서 새는 날기에 적합한 몸이요, 물고기는 물에서 살기에 적합한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표범은 잘 달릴 수 있는 영광을 가졌으나 물속에서 숨을 쉬면 죽습니다. 물고기가 물에서는 최적이나 땅에 나오면 죽습니다. 정리하면 우리 영이 이 땅에서 사는 동안은 이와 같이 우리 영에게 물질세계에 최적인 육의 몸을 주셔서 육의 몸으로 땅, 물질계에서 살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영의 집인 육신의 장막이 낡아져서 무너져서 더 이상 우리 영이 육신의 몸에서 살 수 없게 되어서 육신의 장막을 벗고 천국으로 이사해 있다가 부활의 날에 부활로 우리 영이 천국에서 다시 몸을 입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어떤 몸을 주시겠습니까? 당연히 세상에서는 세상에 맞는 몸을 주신 것과 같이 천국에서는 우리 영에게 천국에 맞는 몸을 주실 것이 아닙니까? 부활의 몸이 이 육신 이대로만 이라면 부활 후에 병들고 죽게 될 것입니다. 천국에서 병들어 심방가고, 죽어서 “몇 칠 후 몇 칠 후”하고 장례식하면 천국에 맞겠습니까?. 부활은 마치 새가 공중을 마음껏 비행하는 것과 같이 천국에 적합한 몸으로 살게 하시는 것이며, 부활은 물고기가 유영하는 것 같이 천국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몸을  구원 받은 영에 입혀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장차 이 몸을 입을 것입니다. 그러면 천국에 적합한 몸은 어떤 몸입니까? 바울사도는 본문에서 이것을 찬란하게 소개하여 우리의 가슴이 뛰게 해주고 있습니다.


천국에 적합한 몸은 천국과 같이 신령한 몸

부활의 몸은 신령한 몸입니다. 이것을 44절이 단적으로 증거 합니다.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신령한)몸도 있느니라” 이 신령한 몸을 주시는 것은 천국의 신령계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물질계이므로 적합한 육의 몸을 주셨습니다. 이렇게 천국, 신령 계에서는 천국과 같은 성질의 영의 몸, 신령한 몸을 입어 천국에 적합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신령한 몸은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까? 

 

신령한 몸은 불패성을 가진 몸입니다. 부활의 날, 우리 영은 썩지 않을 몸을 입을 것입니다. 썩을 몸을 심어 이 썩지 않을 신령한 몸으로 나옵니다. 이 신령한 몸은 영광스러운 몸입니다. 육의 몸은 욕됩니다. 피곤하고 지치고, 병들고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신령한 몸은 이것들의 영향을 받지 않는 영광스러운 몸입니다. 약한 몸이 아니라 강한 몸입니다. 무엇보다 신령한 몸은 불사성을 가진 몸입니다. 이 죽을 몸이 영원히 죽지 않는 몸을 입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멋집니까? 이 얼마나 가슴 설레는 말씀입니까? 우리의 이 약하고 썩을 몸, 욕되고 죽을 몸이 이 신령한 몸을 입게 됩니다. 생각만 해도 좋지 않습니까? 나이 많은 권사님들 조금만 참으시면 이 사람이 됩니다. 질병으로 고생하는 분들 조금 후면 이 사람이 될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그러면 우리는 부활의 날에 어떻게 신령을 몸을 입게 됩니까? 

 

부활의 날에 예수님으로부터 신령한 몸을 입음

사도 바울은 45절부터 이것을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우리가 육신의 몸은 어디서 왔습니까? 아담에게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 영이 땅에서 살 동안에는 아담에게 온 육신의 몸을 입게 됩니다. 그러나 부활 때, 천국에서 살 때는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신령한 영의 몸 입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게 된 것은 아담 때문이지만 천국에 살게 된 것은 예수님 때문입니다. 이 예수님으로부터 신령한 몸을 입습니다. 그래서 우리 영은 먼저 육신의 몸을 입었다가 그 다음은 신령한 몸을 입습니다.(46)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므로 흙에 속하여 신령한 몸을 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늘에 속해서 본래 신령하십니다. 그래서 자기 사람들에 신령한 몸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는 흙에 속한 아담의 형상을 입은 것과 같이 부활 때, 천국에서는 하늘에 속한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 영광의 몸을 입혀주시려고 하늘에서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이 신령한 몸을 입혀주시려고, 고난 받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여 신령한 본래 하늘의 몸을 입으셔서 마지막 날에 우리에게 이 신령한 몸을 우리 영에 입혀 주십니다. 이 부활로 썩을 몸을 가지고 썩지 않을 몸으로 살게 하셨습니다. 약한 것을 심어 강한 몸으로 살고, 천한 이 몸을 심어 영광으로 몸으로 살게 하시고, 죽을 몸을 심어 죽지 아니할 불사의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게 하셨습니다. 이 은혜를 찬양합시다. 이일을 이루신 주님을 경배 합시다. 이 영광의 소망을 찬양합시다.믿음으로 부활의 주님을 모셔 주님께 이 신령한 몸을 입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부활은 분명, 현재, 이 몸의 부활입니다. 부활한 예수님은 영이 아니라 육체이셨습니다. 살과 뼈가 있었습니다. 그분이 승천하셔서 그 몸무게만큼 지구무개가 줄었습니다. 이렇게 부활은 확신한 몸의 부활입니다. 동시에 그 몸은 현재 이 육신과 육신의 관계의 연속이 아니라 천국과 같이 분명한 영의 몸입니다. 주님의 몸과 같이 신령한 몸입니다. 세상에서는 육의 몸으로 살게 하시고 부활 이후 천국에서 영의 몸으로 살게 하십니다. 이 썩을 것을 심어 썩지 않는 것으로 살게 하시고, 죽을 것을 심어 죽지 않을 것으로 사게 하셨습니다. 이 이치를 알아야 육신으로 이 세상사는 동안 영으로 살아 하늘의 집을 준비하는 영생의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이 부활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을 육신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신령한 것으로 아시기를 바랍니다. 부활을 육신적이 아니라 신령한 것으로 알면 부활을 믿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오히려 부활을 못 믿는 것이 이상합니다. 이 부활의 믿음이 우리로 영의 몸으로 다시 살 부활의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이 부활의 소망은 우리를 요동하지 않게 할 것입니다. 이 신령한 몸으로 천국을 살 소망이 이 썩고 죽을 몸을 심어 썩지 않고 죽지 않는 몸을 예비하는 영원한 부활의 신령한 삶을 살게 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신령한 몸 정도가 아니라 부활의 그 영광의 날에 우리는 하늘에 속한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고 주와 함께 신령한 천국을 다스리는 영광을 누릴 것을 확신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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