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칠년대한 가뭄 날에 비 안 오는 날 없다”는 옛 사람들의 말이 참 실감나는 때입니다. 방송들은 연일 굴삭기로 개울 바닥을 파는 모습을 보도하며 이번 가뭄을 “젖은 수건의 물을 쥐어짜는 형국”이라고 요란을 떨고 있습니다. 이렇게 심각한 가뭄인데도 일주일에 한 두 번은 먼지도 잦지 않게 비를 뿌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서 소나기가 장대 같이 내려 메마른 대지를 흠뻑 적셔 주기를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물을 구하기 위하여 개울을 굴삭기로 파는 모습을 시청하다 문득 어릴 적 가뭄이 들었을 때 일이 떠올랐습니다. 고향은 유등천 상류인 버드내가 휘돌아 나가는 물이 풍부한 지역이어서 웬만한 가뭄에는 물 걱정 하지 않는 동네입니다. 이런 고장이지만 한 해는 보통 가뭄이 아니었던지 상보 뜰 지역에서 개울을 파서 물을 구하는 작업을 했는데 여기에 학생들을 동원했습니다. 삼그루 판이라 낮에는 보리를 베어 낸 논에 모를 내고, 밤에는 횃불을 들고 개울 바닥을 파서 물을 푸던 왁짜지껄 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아마 그해였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가뭄이 심했지만 우리 논이 있는 배내미 양짓보 뜰은 차례물 대 면 되는 정도였습니다. 양짓보와 조금 아래의 음짓보는 아래쪽의 보들을 위하여 오히려 보를 터 줄 만큼 여유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아버님이 제게 논에 가서 물을 대라고 하셔서 논에 나가서 물꼬를 열고 물꼬에 지켜앉아서 물을 대고 있었습니다. 그때 양지 봇뜰 맨 끝자락인 신랑 바위 쪽에 논이 있는 윗말 사는 누나가 왔습니다.
이 누나는 고향마을 뒤쪽의 재 넘어 마을에 있는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독실한 신자였습니다. 이 누나가 저 한테 와서는 “인권아! 너희 논은 물꼬 바로 밑에 있으니 우리 논에 먼저 물을 대자.”면서 우리 논으로 들어오는 물꼬를 막아 자기네 논 쪽으로 물을 돌렸습니다. 그러곤 자기가 잠깐 다녀올 터이니 그때까지 물꼬를 막지 말고 기다라 고 하고는 자기네 논으로 가서 물꼬를 보더니 신랑바위를 돌아 마을로 가는게 아니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물꼬에 앉아서 하염없이 그 누나가 오기를 기다리며 물꼬를 지켰습니다. 그러나 금방 오겠다던 이는 땅거미가 지고, 마침내 해가져서 어둑어둑해져도 오질 않았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그 누나의 다녀오겠다는 말이 진심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서둘러 물꼬를 트고 서마지기 논에 물이 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곳은 마을에서 족히 십리는 넘게 떨어진 무인지경의 외진 산골로 나이 많은 어른들이 "무돌이 갱변"이라고 부르는 곳입니다. 이 "무돌이 갱변"이라는 명칭은 이곳이 옛 전쟁터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실제로 양짓보 위의 산 위에는 남매 장사의 전설이 어린 무너진 작은 산성이 있고, 거기서 동으로 시오리 상거에는 조헌과 영규의 의병이 왜군과 전투를 치룬 금산성 싸움이, 서쪽으로 시오리 상거에 저 유명한 권율의 이치 대첩지가 있습니다. 당나라와 함께 백제의 명줄을 끊으려는 신라군이 상주, 옥천을 거쳐 황산벌에서 계백의 결사대와 격돌했다면, 저는 신라군이 이곳을 거쳐서 황산벌에 이르렀다고 봅니다. 이 루트가 옥천에서 진산을 거쳐 연산에 이르는 가장 빠른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른들은 이곳이 '부슬 부슬 비 내리는 저녁이면 군사들이 갱변에서 창을 들고 서 있는 것을 본다."고 들했습니다. 헛것을 보는 곳이라는 애깁니다. 귀신이 나오는 곳이라는 거지요. 이런곳에 어린애 혼자 있게 된거죠.
여름밤이 깊어 사위는 적막하고 캄캄한데 커다란 물새들이 불길한 소리를 내며 어두운 하늘을 날고, 건너편 음짓보의 깎아지른 벼랑위에서는 부엉이가 부엉 부엉 울어대기 시작했습니다. 이 부엉이 우는 소리에 부엉이 뒤에 호랑이가 따른다는 말이 기억났습니다. 그리고 여기가 옛날 전쟁터이기 때문에 귀신이 있다는 말과 이곳이 호랑이가 지나는 길목이라는 어른들의 이야기가 떠올라 으스스해졌습니다. 그래도 무서운 마음을 꾹꾹 누르며 논에 다 물이 들기를 기다리며 물을 잡아야 했습니다.
그 칠흑같은 어둠속에서 끝 배미까지 물을 다 대고 물꼬를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오자 어머니가 동구 밖으로 저를 마중 나오셨습니다. 그때 고향 모교회가 저희 집에 있었습니다. 고향 모교회는 우리 집 사랑방에서 시작하여 예배를 드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날이 수요일이라서 삼일예배를 마치고 헤여졌는데도 제가 돌아오지 않자 걱정이 되신 어머님이 저를 마중 나오셨던 겁니다. 그러니 제가 도착했을 때는 아마도 밤10시는 족히 되었을 겁니다. 그날 밤참같은 저녁을 먹고 웬지모를 뿌듯한 가슴으로 꿈나라로 갔습니다. 교회 잘 나가던 누나가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 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어린애가 그 외진 곳에 밤까지 있을 수도 있다는 걸 전혀 배려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지금도 신기합니다. 아마 그 누나는 자기가 사라지면 제가 곧바로 물꼬를 열것이라고 여기지 않았을까요?
지금도 여름밤이면 이제는 아름다운 추억된 그 일이 어쩌다 생각날때가 있습니다. 그날 어두운 시냇물 위를 날던 그 무수한 반디불이들은 지금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음짓보 벼랑에서 부엉부엉 울다 커다란 날개를 펴고 어디론가 어두운 밤하늘을 날아가던 부엉이 소리도 지금은 그립습니다. 그리고 어서 이 메마른 땅에 단비가 내리기를, 메마른 우리네 심령과 어린애에게 아무렇치 않게 거짓말 할 수 있는 신자들의 영혼에 내려야 할 성령의 단비를 그리워합니다. 그리고 그 누나는 지금 어느 하늘아래 늙어 가는지, 그리고 집사님일까 아니면 권사님일까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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