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전승에 의하며 사도요한이 노쇠하여 일어설 기력도 말할 기력도 없을 때, 그를 부축하여 회중 앞에 세우면 그가 했던 단 한마디 말씀이라고 합니다. 결국 기독교를 단 한 단어로 말한다면 “사랑”이라는 것이지요.
사도는 여기서 다시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할 이유를 설파합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거라서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이 사랑이신 하나님과의 연합이므로 그는 하나님의 성품의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생각하라고 하십니다.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셔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저주와 형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인데도 아들을 화목제물로 주셨습니다. 이것이 죄인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사랑에 빚진 자”들이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는 것이 지극히 합당하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사도가 강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는지, 어떤 방법으로 사랑하셨는지, 얼마나 사랑을 받았는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사랑하게 만든다는 겁니다. 즉 사랑은 감정적인 것이 아니라 이성적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원수 된 우리가 좋아서 아들을 주신 것이 아니라, 사탄과 죄에 종이 되어 멸망하는 것이 걱정이 되고 불쌍해져서 아들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은 이성적인 것입니다.
사랑을 감정적으로 아는 것이 사랑을 실패하는 근본적인 원인입니다. 솔직히 우리는 심지어 배우자마저 항상 좋아할 수 있습니까? 가족과 친구를 언제나 좋아할 수 있나요? 심지어 원수, 즉 내게 잘못하는 이를 좋아할 수가 있습니까? 원수를 좋아하면 그는 정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곁에 있는 사람을 좋아할 수는 없지만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사랑은 이성적으로 하나님이 나를 대하신 방법과 같이 사람을 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탄절은 이 사랑의 계절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사랑의 방법을 보여준 것이 성탄입니다. 이번 성탄절에 이 하나님의 사랑과 사랑의 방법을 깊이 아시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님으로 나를 대하신 그 방법으로 내 곁에 있는 이들을 사랑할 수있는 사람이 됩시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항상 좋아 할 수는 없어도 항상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는 완전하게 사랑할 수는 없어도 완전한 사랑을 알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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