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새벽이슬

은혜를 방탕으로 만드는 사람

아브라함-la 2016. 2. 15. 22:08

구약시대부터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온 망령된 죄가 복음의 빛 아래서 행하여지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은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다. 유다는 교회에 가만히 들어와서 은혜를 방탕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제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이 이 무서운 심판을 받을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은혜를 방탕-색욕-으로 바꾼다는 것은 “구원은 오직 믿음과 은혜로 받는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살아도 상관이 없다.” 또는 “구원받았으니 이제 어떻게 살아도 된다.” 또는 영지주의자들의 영향으로 “영혼이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육체는 어떻게 해도 상관이 없다거나, 죄를 죄어도 죄가 안 되는 상태에 도달했다.” 이렇게 실제적으로 율법(도덕)폐기론에 빠진 사람들은 입술로는 주제이신 그리스도를 믿고 존경하나 행위로는 부인 하는 자들이 심판을 피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이단들에게만 적용되는 말씀이 아니라 은혜와 믿음과 구원을 잘못 이해하여 경건한 삶을 잃은 모든 경건치 않은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말씀일 것입니다. 우선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이라는 교리주의에 빠져 은혜와 믿음을 기계적으로 만들어 버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성향의 변화와 회개와 투신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은혜와 믿음은 기계적이 아니라 전인적이며 인격적인 것입니다. 

 

이런 은혜와 믿음에 대한 오해가 “구원 받은 사람이 자신을 주님께 드려 주님을 위하여 살겠다고 하는 그 자기까지 죽는 것이 은혜다”라고 말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믿음은doing이 아니라 being이기 때문에 믿음은 행위가 아니다,”고 하거나 성화에서 순종의 의무를 부인합니다. 성화를 칭의 와 같이 알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들은 결국 천국의 상급도 부인합니다. 상급을 믿음이 아니라 공로주의라고 열을 냅니다. 이것은 다 은혜와 믿음과 구원을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결국 불경건에 빠집니다. 복음의 자유를 빙자하여 자기를 나코틴이나 알콜에 중독 시키면서도 “아디아포라”를 외치며 영의 소욕을 따르지 않고 육의 소욕을 따는 것입니다. 이것이 실제적인 율법폐기론이 되게 하여 삶, 생활이 없는 믿음이 되게 합니다. 성화라는 경건을 목표하지 않는 신앙은 결국 육신과 세상을 구하여 기복주의적인 신앙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현재의 삶을 잃고 이것이 영원을 실패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은혜와 믿음을 오해 하고 구원을 오해하는 것은 교리주의에 빠졌기 때문에 일어나는 대표적인 현상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지름길이 성경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으로 가서 성경적으로 은혜와 믿음을 이해하고 온전한 구원관을 가지셔서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꾸는 심판에서 자기를 구원하셔야 하겠습니다. 믿음과 은혜, 그리고 구원은 믿음에서 믿음에, 구원에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 양 만큼 천국의 상급이라는 영광의 심판을 받아 누리게 하는 것이 믿음이요, 은혜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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