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는 본래 전반적인 구원관에 대하여 쓰려다가 계획을 바꾸어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고 권하고 격려-더 정확히는 독전-하려는 목적으로 유다서를 기록했습니다. 유다서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일반으로 받은 구원”이라는 말과 여기에 상응하는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라는 말입니다.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는 “믿음의 대상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의 반응으로서 믿음이 아니라 공교회에 주신 구원을 받는 믿음의 도” “사도적 믿음”이라는 해석들은 아주 좋은 해석입니다. 이 도를 단번에 주셨다는 것은 “구원은 단번에 영원히 받은 것 이므로 사도적 믿음은 단번에 받은 것이다.” “사도들을 통해서 교회에 위탁된 불변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강조점이 다릅니다.
사실 성경의 구원계시는 단번에 일회적으로 받은 것이 아니라 역사의 진행에 따라서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통해서 점진적으로 완성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에서 단번에 이루어진 것은 중생과 사죄와 칭의 양자됨입니다. 성화는 점진적인 공정이요, 작업이기 때문에 칭의와 더불어 시작되었지만 완성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작일 뿐입니다. 따라서 “구원은 단번에 영원히 받았기 때문”이라는 해석은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것을 믿을 때 받은 칭의의 교리에 한정시키는 결과를 가져 올수 있습니다.
이렇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칭의의 교리에 한정시키는 것은 유다서 가르침을 제한하는 해석이 됩니다. 유다서의 본론은 은혜를 색욕거리로 만들어 그리스도를 부인 하는 모든 경건치 않은 자들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불경건에 받을 심판을 선포하고 “지극히 거룩한 믿음위에 자신을 세워-건축-가라고 가르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단번 받은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것은 “구원은 오직 은혜이기 때문에 삶은 상관이 없다” “구원 받는 것은 영혼이기 때문에 또는 영혼이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육신은 어떻게 하든 상관이 없다” 이런 식으로 믿음과 은혜를 왜곡할 뿐만 아니라,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이루어가야 하는 성화구원이라는 경건생활을 놓치고 실패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싸우되 힘써 싸우라는 것입니다.
칭의는 믿음과 은혜로 단번에 영원히 되었지만 성화는 인간의 행위가 요구되는 성령의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이 받을 구원을 요구하고 격려하는 성경 말씀들을 보십시오, <두렵고 떨림으로 순종하여 너희 구원을 이루라,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가라, 자기를 쳐서 복종시켜라, 옛 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으라, 영생을 취하라, 선한 싸움을 싸우라> 이 싸움을 힘써 싸우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은 구원을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이 구원관이 우리의 믿음과 생활을 아주 역동적이며 적극적이 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영어 성경의 “contend” 번역된 “엪아고니제스다이”는 신약에서 여기 단 한번 나온 말로 권투나 레슬링 같은 투기 경기에서 투기자들이 분투력전 하는 것을 말합니다. 뒤에서 말하겠지만 이 싸움은 단순하게 이단들과 싸우는 방법이 아닙니다. 구원 받은 성도는 이 구원을 위하여 “contend"하는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유다는 이 거룩한 전사들에게“fighting”을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유다는 성도들이 이 거룩한 싸움을 잃어서 은혜를 방종으로 바꾸고 있는 현대교회와 성도를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이단들과 일부의 성도들이 구원관이 잘못되어서 믿음과 은혜를 오해하고, 이 성화라는 싸움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이 성화라는 구원의 경건을 잃은 교회는 결국 육체와 세상 것을 따르게 되어 은혜를 색욕거리로 만들고, 육신만 기르는 기복주의가 종착역이 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교회가 경건을 상실하고, 육체와 맘몬과 기복주의에 빠진 근본적인 원인입니다. 경건을 회복하고 물질주의와 기복주의에서 벗어나려면 천국 가는 것이 구원 전부인 것 같이 구원을 편협하게 아는 구원관에서 벗어나 구원을 전체적으로 아는 온전한 구원관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구원에서 구원에 이르도록 싸우게 하는 것입니다. 이 싸움을 피 흘리기까지 싸우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 싸움을 싸운 만큼 우리는 영육 간에 성장할 줄로 믿습니다. 이 성장한 양에 따라서 받을 상급이 다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루고 받아가야 할 이 큰 구원의 단번에 받은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도록 서로 파이팅을 외쳐줍시다. 지금 내가 갈아야할 구원의 사래 긴 밭을 내다보며 영생의 열매를 거두도록 힘써 싸우시는 은혜로 가족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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