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를 구원하는 믿음
2016,3,9 수요강론
본문 : 눅18:35-43
말씀 : 라인권목사
소경 바디매오가 빌어먹으며 사는 것 같이 인생은 자신의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이란 우리 인생과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좋은 답변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주님께서 소경 바디매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믿음은 내 삶과 인생의 문제의 해답이며, 해결하는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의 믿음은 삶에 동 떨어지고 상관없는 형이상학적이며 이데아적인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삶과 그 정황에 자신을 나타내셔서 당신을 알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성경에서의 믿음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체적인 삶에 대한 하나님의 방안이시고 능력으로 나타나는 실제적이라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입니다.
믿음은 내 인생 병에 대한 하나님의 방법
인생의 문제 인간 병은 바디매오의 것만은 아닙니다. 사실 세상에서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의 인생병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그 병을 앓고 있는 자기 자신입니다. 남의 염병이 내 고뿔만 못한 법입니다. 믿음이란 이것을 고치고 해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소경이 바디매오 한 사람 뿐이 아닙니다. 그러나 고침 받은 소경은 불과 몇 사람이 안 됩니다. 그런데 왜 다른 사람들은 예수께 나와 고침을 받지 못하고 바디매오는 고침을 받습니까? 똑같이 신앙 생활하는데 자기 인생 병고치고 사는 이도 있고, 고치지 못하고 사시는 이들도 많습니다. 이차이가 믿음의 차이입니다. 내 인생을 고치고 구원하는 믿음이란 어떤 것입니까?
내 인생을 구원하는 믿음은
자기 인생을 구원하는 믿음은 자기 인생의 기회를 붙잡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예수께서 여리고를 가까이 가셨을 때” 기회가 왔다는 말이지요. 이렇게 인생을 고치고 만회할 기회가 있습니다. 이 기회를 주장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시므로 기회는 누구에게나 다 동일하게 균등히 주십니다. 그래서 기회가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고치는 사람은 이 기회를 잡지만, 고치지 못하는 사람은 이 기회를 잡지 못하고 놓치고 흘려버릴 뿐입니다. 다른 소경들은 이 기회를 잡지 못했지만 바디매오는 잡았습니다. 왜 잡을 수가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디매오는 최선의 삶이 아니면 결코 만족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소경으로 남의 동정의 기대어 구걸하는 삶에 결코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항상 보는 정상적이고 최선의 삶의 상태를 소원했습니다. 이 소원과 추구성이 항상 해결방안을 찾았을 것입니다. 그런 마음에 예수님의 소식은 복음이었을 것입니다. 예수가 해답이었습니다. 눈은 보지 못하지만 마음은 예수를 본 것입니다. 눈이 뜨였다는 겁니다. 믿음은 이 눈이 뜨이는 것입니다. 언제 예수를 볼 수 있을까 기회를 엿보았습니다. 이런 그 앞으로 예수께 오십니다. 놓치겠습니까? 말라면 말겠습니까? 소리 지르고 더욱 소리칩니다. 이것이 믿음의 의미입니다.
이것이 고치는 사람과 고치지 못하는 사람, 해결하는 사람과 해결하지 못한 사람의 차이입니다. 고치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의 삶을 불평하고 불만하면서도 그런대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소경이라고 못 사는 건 아닙니다. 최선이 아니라도 죽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대로 살면 살만합니다. 마치 노예가 노예를 직업으로 알고 노예근성으로 살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최선의 삶을 체념했습니다. 추구가 없습니다. 찾지 않습니다, 그래서 방안을 보지 못합니다. 보지만 안생을 보지 못하고 방안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결국 기회가 와도 놓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구원하는 믿음은 최선의 삶이 아닌, 보지 못하는 것과 보지 못하는 상태의 삶을 못 견디고 최선의 삶을 추구하는 것이며, 그 방안에 눈이 뜨여 기회를 붙잡는 것인 줄로 믿습니다. 이게 자기를 구원하는 믿음, 해결하는 믿음입니다.
따라서 자기를 구원하는 믿음은 자기가 구할 것이 무엇인지, 자기가 할 일이 무엇인지를 명백하게 아는 것이며 그 일을 구하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에 바디매오는 “보기를 원하나이다”고 했습니다. 정확하게 자기 인생을 해결하기 위하여 근본적으로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은금이 가득한 집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만족할까요? 은금이 가득해서 누릴 수 있어도 보지 못하면 참 만족 할 수 없습니다. 자유하지 못합니다. 장애가 있습니다. 최선이 아닙니다. 보아야 하는 겁니다. 이게 해결이요, 살길입니다. 믿음은 이걸 알고 이걸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를 잘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진정으로 자기를 모르는 것이 인생입니다. 이 보지 못함, 어두움, 무지가 자기 인생 병이 무엇인지, 자기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적인 일이 무엇인지 모르게 만들과 착각하게 합니다. 이 보지 못함이 해결이 안 되는 일을 해서 임시방편이 되고, 언 발에 오줌 누기가 될 뿐입니다. 오히려 더 자기를 악화시킵니다. 마치 다윗이 급하니 불레셋 땅을 피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방 땅에서 어찌 이스라엘의 왕이 되겠습니까? 해결이 아닙니다. 왕 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왕 될 사람은 왕 될 일을 해야 합니다. 목회하는 사람은 목회가 될 일을 해야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목사가 투잡 해서 근본적으로 해결되겠습니까? 전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게 바디매오의 믿음입니다. 최선의 삶에 이르는 근본적인 일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구하고 하는 것이 자기를 구원하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외쳐 부르게 합니다. 못하게 하면 더 소리칩니다. 예수님을 서게 합니다. 주목하시게 합니다. 이게 바로 구하게 합니다. 바로 추구하게 하고 할 일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도깨비 방망이 같은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근본적인 문제를 아는 것이요, 그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일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자기 인생을 고치고 해결 합니다. 즉 구원이신 예수를 모시게 합니다. 구원의 능력을 입게 합니다. 그 후로 비천하고 비루함으로 유명한 것이 아니라, 은혜로, 행복으로 유명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유명인이 되는 것입니다. 고치면 대우가 다른 것입니다.
이외수는 이렇게 읊었습니다. “오늘도 자신이 만든 고치 속에 갇혀 굳은 의식으로 불만의 풍선껌이나 불어대고 있는 그대여. 언제까지 그 모습 그대로 살아가실 건가요” 사람이 보지 못해도 죽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은 그냥 그런대로 사시겠습니까? 최선의 삶이 되도록 고치시겠습니까? 내가 만족하지 못하는데 하나님께서 만족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만족하지 못하시는데 만족하시겠습니까? 이 최선의 삶에 대한 소원과 추구가 믿음입니다. 이 믿음의 소원과 추구가 방안에 눈을 뜨게 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자기를 고칠 기회를 잡는 것입니다. 믿음은 인생을 해결할 근본적인 일을 알게 하고, 구하고 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자기를 고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믿음, 자기를 구원하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으로 고치고 해결해서 최선의 삶이 되어야만 우리 하나님께도 만족하시리라고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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