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강론

주여 나를 도우소서!

아브라함-la 2016. 3. 13. 15:36

주여 나를 도우소서

2016,3,13, 주일강론   

본문 : 시12:1-8 

말씀 : 라인권목사

“여호와여 도우소서” 이 부르짖음은 자기 한계에 직면해서 더 이상 어쩔 수가 없는 상태에서 나오는 영혼의 부르짖음입니다. “ 더 이상 못 버티겠습니다. 나 좀 살려주세요!” 이런 비명소리입니다. 이런 때는 자기의 무능을 뼈저리게 절감하는 때입니다. 세상의 험하고 악함에 압도 되었을 때 이렇게 됩니다. 소명의 길을 가고 선한 일을 하다가 감당할 수 없는 큰 세력을 가진 대적과 원수를 당할 때 이렇게 됩니다. 엘리야가 그랬지요? 그래서 죽자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 지경이 되도록 보고만 계셨다는 것입니다. 아기가 울면 그방 달려와 해결해주는 엄마와 같이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한계에 직면할 때까지 마치 외면하시는 것 같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한계에 직면하기까지 외면하시는 하나님?

이 사실을 오늘 본문의 다윗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다윗이 왕이 되고 싶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이 하나님의 부름에 순종하는 것도 왕이 되어 권력을 잡으려는 것이 아니라, 사울이 자기 왕국으로 만들어버린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왕국으로 다시 세위기 위한 하나님과 백성들에 대한 순종이고 헌신입니다. 이러면 힘들 때면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해결해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현실은 어떻습니까? 사울이 다윗을 반역자로 오해하고 죽이려 해서 다윗이 군급할 때 다윗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손 보아주시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너 다윗을 건드리지 말라! 만약 손대면 내가 그냥 안두겠다!” 또는 당장 하늘에서 벼락을 내리시는 것이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사울의 박해의 세월이 계속되어 다윗과 뜻을 같이 하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자기를 떠나갑니다. 변절합니다. 사울에게 가서 아첨하고 다윗을 고소합니다. 다윗이 이것을 힘들어 할 때에, 하나님이 이탈을 막아 주시는 것도 아니고, 깨닫고 돌아오게 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백성들도 마찬가집니다. 다윗은 쫓기고 있는데 하나님은 블레셋과 싸워서 그일라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 불레셋과 싸워 그일라를 구원합니다. 그런다고 하나님이 다윗을 사울에게 넘기려는 그일라 사람들 막아서 다윗편이 되게 하시는 것이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악인들이 사울에게서 이득을 얻기 위하여 사울에게 다윗을 참소하고 밀고합니다. 다윗이 이것을 고통스러워 할 때에, 하나님께서 이런 악인들이 망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악인들이 형통하고 번영하고 득세합니다. 그래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한계를 느낍니다. 자기가 작아집니다. 세상에 다윗 자기 하나 뿐이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우리 성도들의 현실입니다. 내가 죽게 되었다고,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아침에 해가 그대로 뜨고 집니다, 세상은 그대로 여전히 돌아갑니다. 나를 해롭게 한 사기꾼을 온 세상 사람이 왕따 시키고 내 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원수와 이웃으로 잘삽니다. 하나님이 나를 내버려 두고 못 본체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칩니다. 더 이상 맞설 용기가 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포기하고 싶습니다, 아니 포기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낙심하고 포기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믿음이 의미를 가지는 겁니다. 믿음의 사람은 그 한계점에 굴하지 않고 일어서는 것입니다. 다윗이 그랬습니다.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사울과 의연하게 맞서나갔습니다. 

 

기도로 일어서는 다윗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다윗이 어디서 일어섰느냐? 자기 한계점, 여기서 일어섭니다. 그 자리에서 다윗이 무엇으로 일어섭니까? “여호와여 나를 도우소서” 기도로 일어섰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우리가 작아져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을 만나며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방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내가 작아져서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고 할 수 있는 능력도 없을 때도 그리스도인은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성도로 하여금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때 낙심하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짚고 일어나 하나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형통할 때도 하나님께로 가고, 절망의 날에도 하나님께 기도로 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문제는 그런 때 어떻게 기도로 일어설 수가 있느냐입니다. 사실 기도하면 되지만 어려울수록 낙심 될수록 안되는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가 시험이 듭니다. 이때 기도로 일어서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5절을 보시면 “주의 말씀이”이라고 합니다. 6절은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라고 말씀의 순수성 진실성을 찬양합니다. 기도는 말씀의 진실성과 확실성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믿음은 기도하기 어려울 때에 이 언약의 말씀을 붙잡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씀을 붙잡으면 말씀을 잡으면 믿음이 생깁니다. 소망이 살아납니다. 이때 “주여 나를 도우소서!”기도로 일어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절망의 자리에서 기도로 바닥을 치고 일어서는 방법입니다. 이때 하나님이 힘을 주십니다. 도와주십니다. 붙잡아 할 수 있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로운신 심판을 믿는 것이 기도로 일어서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혀를 끊으신다. “지키사” “보존 하신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살아 계시다는 것은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심판은 구원과 승리를 믿게 합니다.(7) 이것을 심판과 구원을 믿고 “주여 나를 도우소서”라고 기도 하게 만들고, 기도하며 원수와 맞서게 합니다. 쟁투하게 합니다. 다윗은 이 믿음으로 “여호와여 나를 도우소서”라고 기도하고 사울과 당당히 맞서나갔습니다. 심지어 불쌍히 여기고 선대하게 했습니다. 자기를 모함하는 원수들 앞에 당당히 맞서 나갔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승리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자기 한계의 자리에서 기도하고 있는 것만이 아니라, 기도로 일어나서 기도로 맞서나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기도로 일어나 맞서 나가는 것

믿음은 자기의 연약함 앞에 “주여 나를 도우소서”라고 기도를 외치며 포기하려는 자신과 맞서게 나가게 하는 능력입니다. 자신을 어쩔 수 없는 존재로 인식하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나의 죄악 됨과 무능의 인식입니다. 자신이 무능하다는 것이 자기를 낙심케 하고, 포기하게 합니다. 이 자기가 문제입니다. 원수와, 문제와 환경과 세상이 나를 낙심케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입니다. 믿음은 이 포기하고 절망하는 자기와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로 싸우고, 일어나서 세우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께서 버려두시는 것 같이 하시는 이유입니다. 어린애 돌보아 주는 것 같이 하시면 자기가 되지 않습니다. 그 어떤 존재와 환경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을 의뢰하는 강한 백성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자기를 포기하고 싶을 때 그 자기를 말씀과 기도로 이기고 일어서는 자기를 승리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시는 줄로 믿습니다. 자기를 세우고 승리하는 사람은 성을 지키는 것보다 나은 것입니다. 이걸 하는 것이 믿음이요, 기도입니다. 주여 나를 도우소서! 기도를 외치며 자기를 이겨나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믿음은 자신의 대적과 원수 앞에서 주여 나를 도우소서 기도를 외치며 맞서 나가게 하는 능력입니다. 루터가 낙심했습니다. 그때 부인이 상복을 하고 곡했습니다. 하나님이 돌아가셨다는 말에 루터가 정색하자 부인은 그러면 당신이 왜 누워있느냐고 했습니다. 그래서 일어났습니다. 교황청이 소환했습니다. 가면 죽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브름스 맞서 나갔습니다. 거기서 굴복을 요구할 때에 “내가 여기 있습니다. 주여 나를 도우소서”를 외치며 나갔습니다. “내주는 강한 성이니 방패와 병기되시니”맞서나가 진리를 주장했습니다. 이게 하나님이 포기하고 싶을 때까지 모르는 체 하시는 것 같은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최후의 순간에도 원수에게 굴하지 않고, 말씀과 기도로 맞서 싸워 이기는 강한 백성으로 세워 주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믿음은 이 세상과 세상의 죄악에서 기도를 외치며 담대히 맞서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랜드라는 회사를 잘 아시지요? 믿음으로 방법으로 경영하는 회사입니다. 뇌물 안주고, 세금 탈세 안합니다. 이 회사가 외환위기 때에 회사가 넘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외국 회사가 이랜드에 거액을 투자해서 살아났습니다. 박성수 회장이 물었답니다. 한국의 회사를 싸게 살 수 있는 기회인데 왜 우리 회사에 투자하느냐고? 그랬더니 다른 회사는 다 장부가 두 개라서 믿을 수가 없는데 이랜드는 장부가 하나라서 투자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하면 손해보고 안 될 것 같지만 믿음으로 맞서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배우게 하십니다. 이렇게 세상의 죄악과 맞서 이기는 승리하는 강한 성도로 만드십니다. 그러므로 세상과 맞서 한계점에서 “주여 나를 도우소서!”를 외치며 믿음을 지켜 나가시기를 배우시기를 축복합니다. 이때부터 구하는 대로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배운 사람은 이 방법으로 큰 산을 평지로 만듭니다. 이 사람 앞에 세상이 굴복합니다. 이 사람이 창조적인 소수가 됩니다. 왕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성화를 이루는 줄 믿습니다.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애기 울면 달려오는 어머니같이 우리를 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한계점에 직면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여기서 진짜 말씀과 기도로 자기와 맞서 이기는 사람, 원수와 맞서 이기고 세상과 맞서 이기는 백성이 되게 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기도와 응답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 같은 것이 아니라, 이 삶을 기도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로 맞서 응답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이게 믿음의 의미이며 기도와 응답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포기하고 싶을 때 기도로 일어설 수 있게 이번 갈멜산 기도회에서 기도를 훈련해야 합니다.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진짜 기도로 일어나야 할 때 기도의 지팡이를 짚을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과 구원을 신뢰하여 하나님께 기도로 나가도록 갈멜산 기도회에서 기도를 훈련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기도회를 맞서 승리합시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든지“주여 나를 도우소서!”라고 기도로 일어서고, 기도로 맞서 이겨나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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