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6,7,31 주일강론
본문 : 엡1:3-14
말씀 : 라인권목사
폭염에 수고들 많으셨지요? 지난 주간은 복이라는 것이 무엇이며 누가 축복 받은 복인이냐를 곰곰이 생각하게 해주는 주간이었습니다, 잘 나가던 검사장이 비리로 구속되는가 하면, 세인들의 선망과 부러움의 대상이던 이 나라 최고기업의 회장이 자신의 안가에서 성을 매수했다는 뉴스가 화면을 장식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보도를 보며 우리가 가끔은 박복하다는 생각을 하고, 재력가나 권력을 선망하고, 부러워 할 때가 혹 있지만, 우리 성도들이야말로 이 세상 재벌들과 비교할 수 없는 복을 받은 복인들이요 잘 사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재확인 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왜 우리 성도들은 세상 재벌보다 복 받은 복인들입니까?
우리 성도들에게는 자타가 공인하는 이 세상 복인들이 받지 못하고, 소유하지 못한 절대적인 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3절 말씀이 이를 증거 합니다.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이 말씀은 성도들이 검사장이나, 재벌회장들 같은 물질적이고 육신적이고, 세상적인 복은 부족하고, 받지 못한 복이 있을지라도,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 만큼은 빠짐없이 다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신령한 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구원계획 안에 있게 하신 것입니다.(4)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신 복입니다.(5) 하나님의 기업이 되게 하신 복입니다.(11) 보증으로 성령을 주신 복입니다.(13) 이 모든 신령한 복을 받을 수 있게 믿음을 주신 복입니다.(8,9,) 이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은 인생의 영원한 생명의 사활이 걸린 절대적인 복입니다. 돈이나 권세는 없어도 되고, 찰라적인 것이며,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에 도움도 위로도, 의지도, 소망도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연회를 열던 부자가 지옥가지 않았습니까? 우리 하나님께서 이 세상 재벌에게 없는 이 절대적인 복을 우리 성도들에게는 빠짐없이 몽땅 주셨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 신령한 복의 재벌입니다. 그러므로 행운아는 믿음과 구원이 없는 재벌이 아니라, 우리 성도들입니다. 세상에 우리 성도들 같은 복인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자신을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 복 받은 복인으로 자신을 아는 것입니다. 자기를 신령한 복의 재벌로 아는 성도는 복된 사람입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 성도들이 받은 신령한 복은 재벌의 보화로 살 수 없는 복이기 때문입니다. 재벌의 돈으로 생명을 살 수 있습니까? 재벌의 돈으로 사죄의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까? 왜 다윗이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겨진 자는 복이 있도다”고 사죄를 행복이라고 했겠습니까?(시32:1,2)다윗은 왕입니다. 보통 왕이 아니라 부와 권세가 극한 왕이었습니다. 다윗이 그 권력과 돈으로 자신의 간음하고 피 흘린 죄를 숨겨보고 무마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권력과 돈으로도 죄를 무마하고, 하나님의 진노는 무마 되지 않고 그는 죄책으로 여름 가뭄에 마름같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때 그의 권세와 부는 어떤 위로도 되지 못했고, 통회하는 심령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사죄와 평안을 입을 수 있었기 때문에 사죄를 복이라고 고백했던 겁니다.
이번 재벌회장 뉴스는 이 점을 여실히 보여 주었습니다. 그는 돈으로 법망을 여러 번을 잘 빠져 나왔습니다. 재벌의 돈으로 쾌락을 사서 자신을 위안할 수 있었습니다. 그 돈으로 못할 일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재벌의 돈으로도 사랑은 살 수가 없었습니다. 재벌의 돈과 권세로 젊음과 건강과 생명을 살 수 있고, 돈으로 믿음과 사죄의 평화를 살 수 있습니까? 재벌의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은 허접한 것에 불과했고, 진짜 소중하고 결정적인 것은 살 수 없습니다. 얼마나 위로가 필요했으면 쾌락을 돈으로 샀겠습니까? 얼마나 가련하고 불쌍한 사람입니까?
그러나 우리 성도들에게 있는 신령한 복은 재벌의 돈으로도 살수 없는 소중한 복입니다. 구원으로 택정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과, 믿음으로 사죄 칭의 새 생명 받아 하나님의 자녀 되었고, 구원에서 나오는 기쁨과 평안과 소망이 있습니다. 이 복은 재벌의 돈, 금이나 은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라, 어린 양 되신 예수의 보혈과 믿음으로 되었습니다.(벧전1:18,19) 값이 아닌 은혜로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 은혜 받기에 합당한 사람이었나요? 재벌 같은 문벌도, 재력도 심지어 경건도 없는 우리가 이 은혜를 받은 것은 행운입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은혜의 부자요 재벌인줄로 믿습니다. 우리야말로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 복 받은 복인인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결정적인 복이 있습니다. 그 복이 우리 성도들에게는 이 세상 복인이라고 일컬음을 받는 사람들은 알지도 못하고 살수 없는 거룩한 삶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신령한 복은 죄인을 거룩한 사람이 되게 하여 세상과 다른 거룩한 삶에 이르게 했기 때문입니다. 이 복을 받은 사람을 “성도”라고 부릅니다.(1)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4)하시는 사람이요,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이 다 거룩한 삶. 성화라는 구원이 되는 사람입니다.(10)이로 인하여 하나님께 찬송이 되게 하는 사람입니다.(6,12,14) 이 말씀들은 신령한 복은 신령한 삶, 거룩한 삶을 살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성도의 복됨입니다. 구원 받은 성도는 더 이상 육신의 정욕을 따라서 본능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거룩한 삶이 본성이 되고 행복이 된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에게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실례입니다. 이 거룩한 구별된 삶은 이 세상 사람이 모르고 죽었다 깨어나도 살 수없는 성도의 비밀이고 축복인 줄로 믿습니다.
보십시오. 재벌의 돈과 권력은 재벌을 거룩한 삶에 이르게 한 것이 아니라 퇴폐에 이르게 하여 칭송이 아니라 비방과 가십거리가 되었습니다. 이게 우리 사회 소위 상위1%의 민낯입니다. 이게 그들의 정신세계요. 윤리수준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돈은 많은데 세월은 가고 인생이 갑니다.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그래서 “먹고 마시자!”가 철학이 되는 것입니다. 재벌의 돈을 가지고도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게 삶의 수준입니다. 동물과 다름없는 겁니다. 이렇게 육신을 따라서 살다가 사망에 이르는 열매를 거둘 수밖에 없는 겁니다. 재벌의 돈을 가지고도 이렇게 밖에 못사는 겁니다. 여러분! 이게 잘 사는 겁니까? 못 사는 겁니까? 이게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 이게 일류입니까? 삼류도 되지 못하는 겁니까? 돈으로 쾌락을 사는 재벌이 잘사는 사람입니까? 죄를 미워하며 의롭고 성결하게 사는 우리 성도들이 잘 사는 재벌입니까? 거듭난 성도는 돈 없어도 이렇게 살지 않습니다. 땅에 있어도 하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분들, 못 살고, 참 없는 사람들이며 가련하고 불쌍한 사람들이 아닙니까?
재벌의 돈과 권력으로 이렇게 동물과 같이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충격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이런 죄악 된 삶에서 구원 받은 것은 행운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거룩한 하나님의 성품의 사람이 되어 이런 죄악 된 삶에 구토를 느끼고 미워하여 원수로 알고 싸우는 삶을 사는 것이 성도만의 축복이라고 믿습니다. 이 거룩한 삶을 사는 우리 성도들이야 말로 진짜 잘사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어쩌다 세상 친구들 만나면 벌써 세계가 다릅니다. 우선 말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취미가 다릅니다. 재벌의 돈으로 쾌락을 사는 이가 복인이 아니라 죄의 낙을 거절하고 상 주심을 바라고 거룩한 길을 가고 사는 삶을 행복으로 아는 사람이 복인인줄로 믿습니다. 재벌의 돈과 권력이 없어도 거룩한 길을 가는 우리 성도들이야 말로 왕같이 사는 사람인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재벌의 돈으로 살지 못하는 거룩한 백성의 거룩한 삶을 사는 우리 성도가 진짜 잘 사는 재벌입니다. 믿음으로 거룩한 성도가 되어서 거룩한 길을 가고 거룩한 삶을 사는 성도된 나를 진짜 잘사는 재벌로, 황제로 아시기를 축복합니다.
자신을 복 받은 성도로 알 때 누리는 유익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 복 받은 우리 성도여러분! 우리 성도들을 하나님과 성경은 어떻게 알고 있을까요? 성도들 존귀한 자라(시16:3)부릅니다. 행복자(신33:29)로 부릅니다.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라고 부릅니다.(벧전2:9) 천사도 우리를 부러워하고 이 은혜를 알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렇게 복 받은 복인들입니다. 예수 믿는 우리가 자신을 이렇게 복인으로 알 때 어떤 유익을 누립니까? 고후4:7-10의 사도바울과 같은 사람이 됩니다. 이 사람은 싸여도, 싸이지 않습니다. 낙심하지 않습니다. 망하지 않습니다. 고후6:8-10절의 사람 같이 됩니다. 속이는 자와 같으나 참 되고, 무명하나 유명하고, 죽은 자 같으나 살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가 같으나 모든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 이게 예수의 사도로 사는 바울의 삶의 능력이자 기백이요, 저 또한 이 세상을 목사로 사는 이유의 하나이자 제가 이 사람, 이 기백으로 목회자로 살고 있는 중입니다.
은혜로 가족여러분! 저는 이것이 우리 성도의 자아상이라고 믿습니다. 이것이 성도의 긍지요, 성도의 투지입니다. 성도는 이 정체성으로, 이 기백으로 세상을 살고 맞서나가는 사람입니다. 이게 공연한 허세가 아닙니다. 우리가 부자도 재벌이 아니라도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지 않습니까? 재물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것입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는 외에 세상 재벌에게 없는 이복과 거룩한 삶이 있는데 꿀릴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성도는 복인 중에 복인 인줄로 믿습니다. 이 복을 몰라서 성도가 상갓집 개처럼 세상 것에 기웃대는 것은 통분한 일입니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기독교가 돈과 권력 앞에 기웃거리는 것을 슬퍼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본문 뒷부분에서 성도들이 성도된 은혜를 깨달아 아는 것이 소원이 되어 이 은혜를 깊이 알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한 것입니다.(15-19)이 은혜, 이 성도됨을 알아야 감격이 있고, 성도답게 살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성령께서 성도된 이 은혜, 이 축복을 깨달아 환히 알아서 오히려 세상이 성도된 나를 부러워하고 선망해야 할 사람으로 아시기를 축복합니다.
지금 당신이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신 성도라면 당신은 재벌이 소유하지 못한 신령한 복을 전부 받은 영적 재벌입니다. 당신은 재벌의 돈으로 살 수 없고 은혜로만 되는 절대적인 복을 받은 은혜의 재벌이요. 복인입니다. 당신은 이 세상 재벌이 알지도 못하고 살 수 없는 거룩한 삶을 사는 진짜 재벌보다 잘 사는 사람이요. 있는 사람이요. 진짜 귀족같이 황제로 사는 사람인 줄로 믿습니다. 이것을 바울처럼 확신하는 사람은 바울과 같이 무명해도 유명한 자요. 없고, 가난해도 모든 사람을 부요하게 채워주는 부자로 사는 복을 누릴 줄로 믿습니다. 80년대 후반부터 한국교회가 잊어버린 찬송이 하나 있는데, 요즘 이 믿음이 없고. 이 감격이 없고, 이 기백 없는 현대교회와 교인들이 다시 배우고 찾아야할 찬송이 하나 있습니다. 진심으로 이 찬송을 부를 수 있는 우리 은혜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세상사람 날 부러워 아니하여도
나도 역시 세상사람 부럽지 않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에
할렐루야 찬송이 저절로 나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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