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나의 이야기

유월 숲은 밤꽃 향기 젖어

아브라함-la 2018. 6. 22. 18:32

 

 

 

신록의 숲에 아카시아꽃 향기가 사라지고 화려한 장미도 한물간 무렵이면, 초록이 지쳐 녹음이 깊어가는 유월의 숲은 진한 밤꽃 향에 젖어있습니다. 몇 년 전 생일을 맞는 주간에 철원의 한 수도원에서 한 주간을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흰 머리는 늘어 가는데 이룬 것이 없어 주님 앞서 설 것을 생각하니 초조해져 생일 주간에 수도원을 찾았었지요.

         

 

 

그때 저는 거기서 비로소 밤꽃도 아름답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수도원 마당가에 선 몇 주의 밤나무들에 밤꽃이 한창이었습니다. 꽃이 한창인 밤나무는 마치 초가지붕 같이 하얀 밤꽃 지붕을 이루거나, 둥그런 밤꽃 우산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참 장관이었습니다. 수도원뿐만 아니라, 길가의 밭이나. 산기슬의 밤꽃이 장관이었습니다

 

 

 

사실 밤꽃은 개별적으로 보면 꼭 기다란 벌레 같습니다. 밤꽃이 떨어저 땅에 널려 있는 모습은 마치 커다란 벌레들이 널려있는 것 같아 징그러운 느낌에 발을 피하고 싶은 충동이 일게 했지요. 장마 비에 불어 속이 거뭇하게 변색이 되어 땅에 널려 있는 밤꽃은 정말 벌레 같습니다. 게다가 밤꽃 내음은 어떻습니까? 익은 보리 내음 같기도 하고, 조금 달큰 한듯 하면서 약간 배릿한 밤꽃 특유의 향은 숨이 턱 막히게 합니다.

    

 

 

이런 밤꽃의 아름다움은 개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군집에 있음을 깨달은 겁니다. 밤꽃 개체로 보면 기다란 벌레 같지만 그것이 군집했을 때는 그 빛깔과 아름다움이 장관을 연출하는 겁니다. 장미 같은 꽃은 홀로 있어도 빛나고 향기롭습니다. 그러나 모든 꽃이 다 장미나 백합이 아니어도 군집하면 압도적인 아름다움을 이룹니다. 우리네 인생도 그렇지 않을까요? 내가 장미는 아니어도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의 부족을 채워가며 섬기는 한 공동체를 이루면 장미보다 향기로운 인생을 꽃을 피우는 것이 아니겠습니다.

 

 

 

 

 

이 함께의 미학을 시인은 이렇게 예찬했습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133:1-3) 망종이 지난 유월의 밤, 산 아래 마을까지 내려온 밤꽃 향이 아카시아꽃 만큼은 아니어도 기분 좋게 느껴지는 것은 이런 제 인식의 변화 때문일 것입니다. 밤꽃의 아름다움을 발견하자 그 냄새도 좋아진 것입니다.

 

 

 

 이 아름다움을 담고 싶어서 지난 화요일 저녁 무렵 산을 찾았습니다. 늘 기도하는 곳에서 기도를 마치고 둘러본 유월의 숲은 벌써 녹음이 깊었습니다. 솔숲에 연한 새순은 자랄 대로 다 자랐고, 초록의 귀여운 솔방울이 몸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산 아래의 밤꽃은 지고 있지만 산꼭대기의 밤나무꽃은 한창이었습니다. 이 밤꽃을 찍으려고 산성 작은 골짜기를 내려가니 작은 군락을 이룬 백당나무 숲에 잔뜩 달린 열매가 밤꽃 향기에 취해 바람에 흔들리며 여름을 찬양하고 있었습니다.

 

 

 저무는 유월의 숲은 밤꽃 향기에 젖어있고, 그 숲에서 나는 한 동안 여름의 추억에 젖어있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장미는 아니어도 주님의 지체 안에서 아름다울 수 있는 꽃일 수 있음을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내게 향기로움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의 향기로우심 때문이며, 내게 아름다움이 있다면 그 아름다움은 모자라는 나를 채워주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들의 아름다움 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