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9,20, 주일강론
본문 : 살전 2:17-20
말씀 : 라인권목사
다들 평안들 하시지요. 여러분들 얼굴을 본지가 벌써 한 달이 지났습니다. 당국은 이번 주일에 꼭 비대면 예배를 드리라고 요구하고 있지만, 코로나19로 인한 이 “사회적 거리두기”는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습니다. 이 사회적 거리두기는 “사회적 단절”을 가져올 위험이 있습니다. 사람은 육신인지라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집니다. 심지어 부부도 서로 떨어져 지내면 마음이 멀어질 수가 있지요, 그래서 코로나19 방역지침은 이 사회적 단절을 극복하기 위해서 “거리는 멀어도 마음은 가까이”하자고 했습니다. 만나지는 못하지만 서로 안부하고, 소외된 이웃을 살피자고 합니다.
마음은 가까이가 절실해진 교회들
지금 이 “거리는 멀어도 마음은 가까이”가 그 어느 곳보다 필요한 곳이 교회입니다. 우리가 한 주일 예배에 빠지면 보름을 못 봅니다. 거의 반달이 소요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리가 생깁니다. 이런 형상이 늘어 가면 이 갭이 더욱 커집니다. 그래서 내 교회가 아니라 손님 같은 느낌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모이기를 폐하면 몸이 멀면 마음이 멀어지듯이 하나님과 멀어집니다. 교회와 거리감이 생깁니다. 그만큼 세상으로 빠져들게 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10:25)고 하신 겁니다. 따라서 지금 “거리는 멀어도 마음은 가까이”가 가장 절실한 곳이 우리 교회들입니다. 이런 위험에 처한 우리는 몸과 얼굴은 떠나 있어도 마음은 더욱 가까이 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사도 바울의 본
오늘의 말씀은 이에 대한 좋은 본입니다. 본문은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어얼국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보기를 열정적으로 더욱 힘썼노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데살로니가교회가 세워진 내력을 알아야 합니다. 데살로니가교회는 사도 바울이 제 2차 전도여행 시에 세운 교회입니다. 빌립보에서 쫓겨난 사도 바울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 이 데살로나가 이르러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때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시기하여 소요를 일으켜서 사도바울은 겨우 세 주일 만에 밤중에 베뢰아로 빠져 나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행17:2,10)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은 정말 눈물 밭에 떨어진 씨입니다. 그런데 이런 환난 중에 기쁨으로 복음을 받은 성도들이 신망애의 신앙을 가졌습니다.(살전1:6,3)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면 이렇게 기쁨으로 거두게 하시는 겁니다. 이런 형편에 사도께서 거기에 이 제 막 믿은 성도들을 두고 떠나 왔으니, 얼마나 미안해고, 그들이 염려되고 걱정되겠습니까? 이걸 해명하는 것입니다.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지 마음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너희 얼굴보기를 열정적으로 더욱 힘썼다. 두 번이나 너희를 보려고 가려고 했지만 사탄의 역사 때문에 가지 못했다. 너희는 내 자랑이며 면류관이다.’ 몸은 떠났지만 마음은 떠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간절하게 보고 싶어 하고, 열정적으로 더욱 힘써 보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여기, 이 사도의 본에서, 몸이 교회에 나오지 못하는 때에 우리가 하나님과 교회를 가까이 하고 마음과 영으로 만나는 길이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 마음으로 입니다.
사람은 마음입니다. 우리는 이 마음으로 믿고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마음이 있고, 마음이 원하면 결국 몸이 따라가는 것이 사람입니다. 우리가 비록 몸은 떠나있어도 이 마음이 하나님과 교회에 있다면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사도께서 그랬습니다. 사도는 얼굴로는 떠났어도 마음은 떠난 것이 아니라, 데살로니가 교회에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을 “착념”이라고 합니다. 마음을 붙이는 것입니다. 이 말은 “보물이 있는 곳이 네 마음이 있다”(마6:21)는 말씀과 같이 내 마음을 주장하는 것을 말합니다. 돈이 크면 돈에 마음이 가는 것 같이 하나님과 교회가 크고 중하면 그곳에 내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가 마음을 주장하게 해야 합니다.
다윗이 그랬습니다. 그는 사울의 박해로 성전에 나가지 못함을 땅 끝에 소외된 것으로 여기고, 그 땅 끝에서 성전을 향해서 부르짖고, 함께 성전에 올라가던 것을 그리워했습니다. 성전은 특별한 하나님의 주소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을 뵈올 수 있습니다. 여기에 성도의 생명이 있습니다. 여기에 성패가 있고, 화복이 있습니다. 그래서 악인의 장막에서 천 날보다 성전문지기로 하루를 살기를 사모한 겁니다.(시84:10) 이 진리, 이 이치를 알고 이 영적인 실제가 있는 성도는 교회에서 마음이 뜨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마음이 뜨는 사람은 그 영과 인생이 부초와 같이 되지만 마음이 교회에서 뜨지 않는 성도는 그 영은 흔들리지 않는 만세반석 같이 서고, 뿌리 깊은 나무 같을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교회에서 몸이 먼 이 때에 몸이 멀수록 마음은 더욱 교회에 두시기를 바랍니다.
제 신학교동기 강정훈목사 이야기를 한 적이 있지요. 이분이 한국일보 신춘문예에서 동화로 등단한 분입니다. 이분 고향이 제주입니다. 제주는 바람이 많습니다. 봄에 바람이 나면 지붕이 날아간답니다. 그래서 제주의 초가는 동아줄로 맵니다. 강목사님은 소아마비입니다. 아버지도 소아마비랍니다. 한해 봄에 바람이 불어서 지붕이 막 날아가려고 합니다. 그러자 소아마비 아버지가 홀로 지붕에 올라가서 쩔쩔매시는데, 자기는 교회가 날아 갈까봐 절뚝거리며 교회로 달려갔답니다. 이렇게 마음이 교회에 있으니 결국 작가도 되고 목사도 되었습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교회 못 나올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때는 마음은 더욱 간절해야 합니다. 몸이 교회에서 머니 더욱 마음을 교회에 붙여야 합니다. 주일에 몸은 나오지 못해도 마음은 나오시기 바랍니다. 수요일에도 마음은 교회에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공예배를 모이지 못하는 교회를 염려하시고 걱정하시며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마음과 영으로 하나님을 뵈올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몸이 교회에 모이지 못하는 때의 영적인 위험에서 우리를 지키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게 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과 같이 주안에서 형제 된 성도들의 얼굴보기를 열정적으로 힘쓰는 겁니다.
사도는 떠나 있어 얼굴로 함께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열정적으로 보기를 힘썼습니다. 보고 싶어 했다는 겁니다. 그리워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얼굴을 마주대고 만나기를 열정적으로 더욱 힘썼습니다. 이럴 때 사도는 마음과 영으로 성도들과 함께 있고, 성도의 교제를 나눌 수가 있었음을 성경은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 거기 있는 것 같이 이런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고전5:3) 몸은 떠나 있어도 영으로 함께 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얼굴로 함께 할 수 없을 때에 얼굴보기를 힘쓰는 것, 마음과 영으로 만나기를 힘쓰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첫째 주안에서 형제 된 성도를 사랑하는 것이 마음과 영으로 얼굴을 보는 것입니다.
왜 사도가 데살로니가교회 형제들을 보기를 힘썼나요. 그들의 믿음과 안위가 염려되어섭니다. 이게 사랑입니다. 그들의 영혼을 사랑하기 때문에 환난 때문에 시험 들어서 낙심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그들을 만나고 싶어 한 것입니다. 사랑은 이렇게 염려하고 걱정해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따라서 사랑은 관심입니다. 사랑하면 관심사가 됩니다. 살펴보고, 염려하고 걱정하고 궁금해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달을 만나지 못했는데 걱정이 안 되면 사랑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어려운 때에 서로 관심을 가집시다. 서로 살핍시다. 서로 염려해주고 걱정해주시므로 몸은 멀리 있어도 마음은 가깝고 마음과 영으로 서로 만나는 교회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둘째, 서로 문안하는 것이 마음과 영으로 얼굴을 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얼굴로는 보지 못해도 서로 문안하므로 교제하고 만났다는 걸 그의 서신의 말미의 안부가 분명히 증거 합니다. 사도바울 당시는 몸이 멀리 있을 때 안부는 서신을 인편으로 전하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그래도 사도는 안부를 빠뜨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사회관계망은 몸이 아무리 멀어도 마음만 있으면 쉽게 돈들이지 않고 얼굴도 볼 수 있고, 대화할 수 있고, 문안할 수 있습니다. 지난 번 미국 갔을 때에 돈 안 들고도 손녀의 얼굴을 매일 보았습니다. 전화도 할 수 있습니다. 다양한 SNS를 사용해서 교제할 수 있습니다.
이게 제가 블로그를 하는 이유입니다. 만나지 못해도 말씀을 전할 수 있습니다. 제가 유명 블로거는 아니지만, 그래도 통산55,860명이 제 블로그를 찾았습니다. 이번 달에는 제 블로그를 찾는 사람이 더 많아졌습니다. 이렇게 사회관계망은 복음과 성도의 교제를 위하여 있는 문명의 이기입니다. 이 좋은 도구를 오용할 것이 아니라, 성도의 교제를 위해서 사용합시다. 이런 시대에 한 달을 만나지 못했는데도 전화 한번 없다면 멤버쉽은 물론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함께 말세를 헤치고 나갈 형제들인데 이래서는 이 마지막 때를 이길 수 없습니다. 코로나로 어려운 이때 서로 문안하므로 마음과 영으로 만납시다, 서로 문안하여 격려하고 세워주므로 함께 합시다. 이것이 이 어려운 시절을 견디고 승리하는 길이요, 몸 된 교회를 세우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셋째, 서로 기도의 짐을 져줌으로 마음과 영으로 얼굴을 대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몸은 멀어도 기도로 서로 교통하고 영으로 만날 수가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만 교통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간의 교통입니다. 모세가 산에서 기도의 손을 들 때에 이스라엘이 아말렉을 이겼지요.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은 기도로 만납니다. 기도로 돕고, 기도로 통한다는 것을 베드로의 석방이 증거 합니다. 베드로가 옥에 갇혀 내일이면 처형일 때, 교회가 간절히 기도할 때에 천사가 옥에 있는 베드로를 풀어냈습니다. 이 기도가 있기 때문에 베드로가 사형을 앞둔 밤에 깊은 잠을 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도해 주는 이가 없는 사람은 지붕이 없는 집과 같이 인생이 처량하고 곤합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시절에 서로 위해서 기도하므로 사랑하는 사람의 지붕이 됩시다. 서로 기도의 짐을 지는 교회가 됩시다. 이런 가정, 이런 교회 고난의 바람과 환난의 비를 두려워하지 않을 줄로 믿습니다.
넷째, 어려운 성도가 있으면 서로 위로하고 그 어려움을 함께 하므로 마음과 영으로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코로나로 건강을 잃는 사람, 생활이 위기에 처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런 때에 유무상통한 초대교회와 같이 서로 섬기는 것이 참된 교회인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꼭 물질로 위로하는 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물질의 위로는 모멸감이라는 세금을 내게 할 수 도 있습니다. 진짜 위로는 어려움의 비를 함께 맞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저의 환난의 때에 알았습니다. 비 올 때 우산을 씌워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초대교회가 이렇게 서로 사랑했습니다. 여기에 세상이 감동했습니다. “보라 저들이 어떻게 서로 사랑하는가!” 이게 초대교회를 지탱하는 끈이었습니다. 우리 은혜로교회 성도들은 이 어려운 때 어려움이 있으면 나누고, 그 어려움을 함께 함으로 마음과 영으로 교제합시다. 이것이 이 난국에 우리의 신앙과 교회를 지키고, 가정과 사회를 지키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은혜로 가족여러분! 우리 공예배가 언제 정상이 될지 모르는 이때 자칫하면 하나님과 교회와 성도와 멀어지는 시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 시험을 얼굴이 멀수록 마음은 가까이하셔서 극복합시다, 모이지 못하고, 만나지 못할수록 서로 관심을 가지고 서로 문안하시고, 서로 기도하시므로 만납시다. 함께 이 시련의 비를 맞음으로 거룩한 교회의 본질인 성도의 교통을 이루시고, 이 험한 시절을 이겨 나가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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