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7,주일
본문 : 렘17:19-27
말씀 : 라인권목사
신년 들어서 두 주일을 제사장의 축복으로 흔들어 넘치게 축복했기 때문에, 오늘은 부담이 되는 주일성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제가 이 주일성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지난해 2월부터 시작된 코로나19로 한해를 넘기는 동안 비대면 예배를 드려왔기 때문에 우리의 성수주일이 잘 있는지 매우 걱정되는 처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선 우리의 성수주일이 안녕한지 점검하기 전에 주일성수가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도록 합시다. 주일성수가 어떤 것인지 알아야 우리의 주일성수가 안녕한지를 바로 점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주시고, 이 날을 성별해서 거룩하게 지키도록 하신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안식일을 성별케 하신 뜻
첫째, 안식일, 주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신앙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안식일 성일로 구별해서 지키라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며 하루는 하나님의 날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은 이 하나님의 주권을 부정하는 것이요, 지키는 것은 긍정이며 순종입니다. 이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 주일 성수의 정신입니다. 둘째, 안식일을 지키게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려 하심입니다. 출31:13에 “너희는 안식일을 지키라-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게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들의 성화를 위해서 안식일을 성별하게 하셨습니다. 일주일의 첫 날을 구별해서 드리면 나머지 엿새가 거룩해져서 거룩한 시간을 살게 되어 거룩하신 하나님을 닮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성수주일이며, 주일성수의 정신입니다.
셋째, 그래서 안식일 준수가 하나님의 택하시고 구원하신 거룩한 백성이라는 표징, 즉 배지이기 때문입니다.(출31:13) 왜 안식일 준수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이며 신앙고백이 되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의 나라, 천국의 본질이 안식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안식하는 나라입니다. 이 안식이 있어야 천국백성이며 간증이 됩니다. 그래서 안식 법을 주셨습니다. 이 안식 법은 오직 여호와 종교에만 있는 유일한 법입니다. 따라서 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배지요, 고백이며 간증이 되는 것입니다.
넷째, 안식일을 지켜서 일을 그치게 하신 것은 사람이 사는 것이 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에 있다는 신앙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일에 생계가 걸려있습니다. 이 일을 그치는 것은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산다는 신앙고백입니다. 따라서 주일성수는 선악과와 같은 성질의 것입니다. 주일 성수는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공식적으로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주일성수는 이 시험에서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사랑과 순종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시험에서 하나님이 주제이시다! 나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다! 이렇게 자기를 구별해 나가고, 나는 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산다! 고백해 나가는 것이 성수주일입니다. 이걸 고백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셔서 약속한 복을 상으로 주시는 겁니다.
한국교회의 아름다운 주일성수 전통
우리 한국교회는 이런 주일성수신앙을 강조하고, 주일성수를 철저히 하는 청교도적 전통을 가진 교회입니다.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 제 21장 8조는 주일성수를 이렇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주님께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 이를 위하여 사람들은 그들의 마음을 합당하게 준비하고, 그들의 일상적인 모든 일들을 정돈한 연후에 그 날에 하루 종일 그들 자신의 일과, 그들의 세상적인 일에 대한 말이나 생각, 그리고 오락을 중단하고, 거룩하게 안식할 뿐만 아니라, 모든 시간을 바쳐서 공적으로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과 부득이 해야 필요가 있는 일과 자비를 베푸는 일을 해야 한다.” 이 청교도적 신앙고백을 우리 한국교회는 철저하게 성수해왔습니다.
살아 있는 순교자로 유명한 거창제일교회의 주남선 목사님은 주일에 두루마기 옷고름이 떨어지자 바느질하지 않고, 그냥 동여매고 나오셨답니다. 이 교회에 주문한 장의자가 주일에 도착했습니다. 이를 교인들이 나서서 하차를 했습니다. 그러자 이들을 다 책벌했습니다. 이렇게 성수주일을 철저히 했습니다. 이 교회 출신은 아니지만, 이 주 목사님을 흠모한 배추달 집사는 주일날 부역을 거부해서 내무서로 끌려갔습니다. 거기서 공산군이 내무서 마당을 쓸면 100리길을 짐을 지고 가는 부역을 면제해준다고 유혹해지만, 주일에 마당을 쓸 수는 있지만 이는 시험하는 것이라며 거절해서 결국 순교의 면류관을 쓰셨습니다. 이렇게 주일이면 새벽예배로 시작해서 저녁 찬양예배까지 주일 하루를 예배로 사는 것이 우리 한국교회의 아름다운 전통이었습니다. 그러면 이런 아름답고 귀한 우리한국교회 주일성수는 지금 얼마나 안녕할까요?
우리의 주일성수는 안녕할까?
우리는 이것을 오늘의 본문의 거울로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은 유다가 포로 되기 직전의 유다의 안식일 준수의 형편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이 때에 선지자 예레미야가 보니 유대인들이 안식일임에도 불구하고 평일이나 다름없이 짐을 지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오는 형편이었습니다. “짐을 지고”이 말은 “짐을 옮긴다.”는 뜻이지만, 짐을 옮긴다는 것은 현대적으로 말하면 물류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활발하게 경제적인 활동하고 있다는 거고, “통상을 한다.”는 뜻입니다. 즉 사업을 한다는 겁니다.
이것을 어떻게 했다고요,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며”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거룩한 도성입니다. 성문은 재판도 하는 곳입니다. 율법은 안식일을 범하면 죽이라고 했습니다. 만일 여호수아 시절이나, 다윗 왕 때 같으면 맞아 죽지는 않아도 사람들의 눈이 무서워서 못할 일입니다. 그런데 안식일에 짐을 지고 이 성문을 들어와도 아무런 제제도 없고, 뭐라고 하는 이도 없다는 겁니다. 안식일에 통상하는 것이 일상적이 되었다는 겁니다. 사계명은 있으나 마나해서 사문화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안식일에 “버젓하게” “공공연하게”가사를 하고, 사업하고 통상을 하는 형편이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선지자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그 성문에 불을 놓아서 궁전을 삼킬 것이라고 예언 했다는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 이 예레미야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대하36:19-21)안식법을 지키지 않으니, 하나님께서 바벨론 포로로 강제로 그 땅을 안식하게 한 겁니다. 예배일인 안식일이 안녕하지 못하니, 성문도, 그 나라와 사회도 성전도 안녕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거지요.
여러분! 이렇게 우리의 주일성수가 안녕하지 못한 형편은 아닐까요? 돌아보면 칠십 년대 후반에서 시작된 주일 오후 예배로 우리 한국교회의 주일성수는 쇠퇴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경제적 수준이 높아져서 레저가 자리를 잡고, 주5일제 근무가 정착하면서 주일성수는 더욱 쇠퇴했습니다. 대형교회들은 주일에 빠질 신자들을 위해서 금요일이나 토요일에 예배시간을 마련해 주는 교회도 있습니다. 지금은 마치 예레미야 때와 같이 주일에 버젓이 사업하고, 놀러갑니다. 이렇게 해도 이것을 책망하거나, 책벌하는 교회는 단 한 곳도 없습니다. 이렇게 주의 날과 주일예배를 등한히 하고, 예배가 형식적이 된 것이 코로나를 불러서 성전 문을 닫게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회개하고 더욱 주일과 예배를 귀하게 여기고 온전한 예배자가 되어야 할 터인데, 지난 일 년 간 코로나19로 온라인 예배를 드려 온 것이 더욱 우리의 주일성수를 위협하고 안녕하지 못하게 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우리가 코로나로 주일에 교회에서 모일 수 없다면, 이를 안타가워하고, 더 교회와 예배를 사모하는 것이 바른 믿음이라고 믿습니다. 주일예배를 온라인으로 드려도 교회가 궁금해서라도 평일이라도 교회를 찾고, 교회를 살펴보고, 기도하는 것이 정상적인 신앙이지요, 그런데 두 달, 석 달을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려도, 단 한 번도 교회를 찾지 않습니다. 마치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는 말처럼 아예 온라인 예배에도 참여하지 않는 신자들이 많고, 들로 산으로 바다로 나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한국교회의 아름답던 주일성수 풍경은 찾기 어렵게 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주일이 안녕하지 못합니다. 주일이 안녕하지 못하니 예배가 안녕하지 못합니다. 예배가 안녕하지 못하니 신앙도 안녕하지 못하고 경건도 안녕하지 못하고, 결국 생활도 안녕하지 못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대면예배 고수 교회에서 배울 점이
따라서 지금 우리는 대면 예배를 고수하다가 정부로부터 폐쇄명령을 받은 교회를 비난만 할 것이 아닙니다. 이분들이 이 코로나19 상황에서 대면예배를 고수하는 것은 분명히 성경적이 아닙니다. 안식법은 둘째 돌비에 상충하면 이웃사랑의 원리를 따름을 우선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죽을 사람을 살리는 것은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 이루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참된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주일성수와 주일대면예배를 고수하여 폐쇄 당하는 것은 순교적인 신앙이 아니라, 한마디로 “불쌍한 순교자”가 되는 것이요, 주관적 자기 열심이며 자기 의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분들에게서 배울 점이 있습니다. 그게 적어도 이분들은 자기의 확신대로 한다는 점입니다. 지금 정부가 비대면으로 예배하게 하는 것을 탄압이며 교회를 해체하려는 음모라고 주장하며 욕하는 목사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렇게 욕하면서도 대면예배를 드리지 않고 온라인 예배를 드리는 것은 믿음대로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건 불신앙입니다. 비양심입니다. 하나님보다 정부가 무서워서 못합니까? 벌금이 무서워서 못합니까? 세상의 이목이 무서워서 못합니까? 교인이 무서워서 못합니까? 그건 비겁한 일입니다. 폐쇄 당한 이들의 열심이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기는 하지만 이분들은 자기 믿음과 양심에 진실했습니다. 그 열심은 귀한 것입니다. 이런 확신과 결기가 있어야 무슨 일이든 해내는 신자가 됩니다. 제가 근처의 큰 교회에 장로에게 “교인이 몇 천 명인데 20명 예배참석자를 어떻게 선정합니까?”라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분 대답이 이랬습니다. “알아서 안 옵니다.” 그런데 부산서부교회는 500명이 알아서 나옵니다. 알아서 안 나오는 교회가 안녕합니까? 알아서 오백 명, 천명 나오는 교회가 안녕합니까?
어떻게 주일성수 안녕케 할까
따라서 우리는 금년 새해에 주일을 안녕하게 하고 주일예배를 안녕하게 해야 합니다. 어떻게 주일성수를 안녕하게 할 수 있습니까? 첫째, 현장예배에 참여 못해도 주일 온라인 예배를 더 귀하게 여기고 참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 코로나19로 비대면으로 온라인 예배를 하는 것은 내가 코로나가 걸릴까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이웃사랑을 위해서 우리의 자유와 권리요 특권인 주일예배를 양보할 뿐입니다. 만약 예배냐? 생명이냐를 강요받는 다면 우리는 기꺼이 예배를 선택하고 하나님을 선택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주일을 지키고 예배로 살아 갈 때에 우리 하나님께서 본문에 약속하신 복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온라인예배라도 전심으로 드리는 것이 주일예배를 안녕하게 하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둘째, 가정예배를 살리고 가정예배의 제단을 힘써 쌓는 것입니다. 주일에 교회에 모이지 못하니 가정이 교회입니다. 가정에서라도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이게 주일예배를 안녕하게 하는 첩경입니다. 셋째, 주일에 공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고 온라인 예배를 드려도 주일성수의 신앙과 정신을 더욱 지켜가는 것입니다. 주일 성수 하나님께 절대 순종한다는 고백입니다. 나를 거룩하게 구별하고 성화시킨다는 고백입니다.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산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이게 신앙의 생명입니다. 이 고백을 지켜나가면 주일이 안녕하고, 주일예배가 안녕해 질 줄로 믿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여기에 화복이 있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예배일을 거룩하게 지키면 승리의 영광을 주십니다. 그 승리로 그 나라가 영원하게 하시고, 사람들이 각체에서 예물을 가지고 성전으로 나오는 부흥의 축복을 주십니다. 그러나 이 신앙, 이 정신을 잃고 주일을 더럽히면 성문에 불을 놓으십니다. 그 불이 궁전을 사르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주일에 화복이 걸려있습니다. 은혜로 가족 여러분! 이걸 명심합시다. 이 축복과 저주로 도전을 받아서 코로나19 비대면 예배시절에 주일성수를 안녕하게 하셔서, 예배를 안녕하게 하시고, 코로나19로 위협당하는 우리 생활과 사회를 안녕하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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