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1,3,7일 주일
본문 : 출6:7, 시8:1-9
말씀 :라인권목사
지난 주일에 자연에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공부했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 이전에 창조주이시므로, 신앙고백의 첫 조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게 중요한 것은 자연은 삶의 터전이기 때문에 자연에서 안다는 것은 삶의 자리가 하나님을 아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연에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역사가 중요하고 역사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자연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을 구원의 하나님으로 경험했을 때 하나님을 창조의 하나님으로 알게 되고. 창조의 하나님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구원하시기에 능하신 하나님으로 알게 한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이 삼대 절기를 지키는 것도 창조의 하나님보다 구원의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신 이유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창조의 지혜와 권능으로 오늘의 구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자연은 어떻게 경험하게 합니까? 이것을 창조의 하나님을 강조하는 성경에서 사례별로 찾아보겠습니다..
첫째 자연은 인간은 연약함과 비천한 존재임을 직시하여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해 줍니다. 욥기가 이걸 증거 하는 성경입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께서 “내가 죽기 전에는 나의 온전함을 버리지 않겠다.”는 (욥 27:5)욥을 어떻게 입술을 가리고 엎드리게 하셨는지 아십니까? 이때 하나님은 욥의 친구들과 같이 권선징악이나, 칭의를 논하시거나 신학적인 논리로 설득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욥 38:4)“땅의 너비를 네가 측량할 수 있느냐” “네가 눈 곳간에 들어가 보고 우박 창고를 보았느냐” 이렇게 욥을 자연 앞에 딱 세우십니다. 이때 욥이 “나는 비천하오니-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욥 40:3)고 엎드립니다. 그리고 네가 암사슴이 새끼 낳는 것을 네가 본 적이 있느냐? 이렇게 욥을 야생 앞에 세우십니다. 이렇게 욥이 야생에 직면하자 나는 스스로 알지도 못하는 것을 말했다며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했습니다.(욥 42:2,6) 즉 하나님이 임하시고, 하나님의 자연 앞에 세우자 욥은 자기 죄를 알고, 자기를 부정하고 회개했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자연 앞에 서기만 해도 작아지고 연약한 존재에 불과해지는 것입니다. 지구는 십 만개의 별로 구성된 은하계의 일부입니다. 그런데 우주에는 이런 은하계가 백만 개가 넘습니다. 망원경으로 볼 수 있는 별이 일천억 개가 넘습니다. 이런 지구별에서 내 땅이 있으면 그게 대수이고, 내가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습니까? 점 하나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뉴욕의 하이덴 천문대의 한 천문학자는 무신론자인이 천문학자들을 만나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자연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알게 합니다. 그래서 다윗이 주의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다.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한다고 한 것입니다. 거듭난 사람은 자연에서 자연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사람입니다. 이때 자연은 특별 계시가 되는 겁니다. 자연에서 창조의 하나님을 보고 겸손해지고, 기도하게 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둘째, 자연은 한 인간의 존귀함과 영광스러움을 깊이 인식하게 합니다. 시 8편을.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돌보시나이까 저를 천사- 하나님 -보다 조금 못하시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시8:3-5) 다윗이 하늘과 하늘의 달과 별을 볼 때 한낱 점과 같고 티끌 같은 인생이 하나님의 형상이요,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임을 절감했다는 겁니다. 이게 대단히 중요합니다. 사람이 자기를 귀하게 알아야 귀하게 살 수 있습니다. “존귀한 자는 존귀한 일을 도모하나니 그는 항상 존귀한 일에 서리라”고 하셨습니다.(사32:8) 자기를 존귀하게 알아야 존귀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참된 자존감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주님은 공중의 새를 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새도 먹이고 들꽃도 입히시는데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6:23) “하물며 너희랴” 염려하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마6:30) 이렇게 인간은 자연 앞에서 천하보다 존귀해집니다.
이게 자연의 치유력입니다. 자연은 인간을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존재로 높여줍니다. 자연은 나를 천사도 부러워할 구속의 사랑을 입은 자로 알게 합니다. 자연은 이 하나님의 사랑의 관심 속에 있는 자로 자기를 알게 합니다. 이렇게 자기를 알 때 일어나고 귀하게 처신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려울수록 자연을 벗해야 합니다. 어두울 때 자기가 비루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므로 어두울수록 하늘을 보고, 하늘의 별을 봅시다. 그래야 자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살아나는 것입니다.
셋째, 자연은 삶의 위기와 염려에서 돌보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하고, 구원하시기에 능하신 분으로 알고 신뢰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구원이 요구될 때에 내가 창조주임을 기억하라고 하셨습니다.(사40:28,43:1,19) 이 창조의 지혜와 권능으로 구원이 되시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삶이 염려될 때에 공중의 새를 보고 들의 백합화를 보라고 하셨습니다. 자연을 보며 사고하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고하면 자연은 능치 못하심이 없으신 하나님을 알게 합니다. 자연은 위기에서 하나님을 창조의 하나님으로 알게 하여 구원을 확신하게 하고 경험하게 합니다. 그래서 “눈을 늘어 산을 보라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라”고 하신 겁니다.(시121:1,2) 이게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의 여유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려울 때에 산을 보고, 하늘을 보고 달과 별을 보는 서정이 있고, 여유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게 곧 영성입니다. 이 영성이 자연에서 창조의 권능으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합니다.
비안개에 덮인 오름을 걷다 만난 하나님
제가 동창회 총무를 할 때에 수양회를 제주로 간 적이 있습니다. 수양회를 마치고 성읍의 동생네를 들렀더니, 근처에 백약이 오름이 있는데, 성산일출봉을 내려다보는 전망이 좋으니 가시자고 하여 이튼 날 새벽에 백약이 오름에 올랐습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오름에 오르자 비가 내리고 안개가 짙어서 전망이 전혀 없고, 분화구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비를 맞으며 안갯속의 분화구를 도는데 겨우 10미터 정도나 보니 도는 것이 아니라, 직진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환난의 시절을 하나님께서 어떤 식으로 헤쳐 나오게 하셨는지를 깨달았습니다. 안개로 길이 보이지 않아도 길은 있었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길 만 가니 그 보이지 않는 길을 가서 분화구를 다 돌아 나왔습니다. 이렇게 길이 없는 것 같지만 길은 있었습니다, 현재 직면한 일을 해 나가니, 그 길을 가게 되고, 문제가 해결되게 하셨습니다. 이게 주님이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수고는 그 날로 족하다고 하신 겁니다.(마 6:34)하신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자연을 가까이합시다.. 여행도 하시고, 자연을 보며 글도 쓰세요. 이게 믿음으로 사고하게 합니다. 제가 시는 쓰게 된 것이 환난의 한가운데 있을 때입니다. 주보에 실은 “봄을 위한 기도”가 그때 쓴 시입니다.
주님! 부한 사람들은 이젠
더 이상 봄을 기다리진 않습니다.
추위가 낭만뿐일
삭풍 휘몰아치는 광야에 홀로
속절없이 얼어 본 적 없는 이들이야!
겨울의 끝자락이 아쉬워
마음껏 내남은 겨울을 즐기며 아쉬워합니다.
겨우내 얼어 폐부에 한속이 든
시린 가슴의 사람들이야........
겨울의 마지막 고개 이른 언 가슴에는
값싼 고난의 신학일랑 논하지 맙시다.
새 봄이 와야 사는 가난한 이들
이남은 겨울은 차라리 마지막 시련일지니,
해동을 시샘하는 모진 한파에
하루도 아득히 천년입니다.
주님! 이 작은 자들의 봄을 위하여
추위를 명하사 ‘이제 족하다 그치라’ 하시고
해를 명하사 해토하여 파종토록
‘두 눈금 지온계를 높이라’ 이르소서!
당신 친히 남국의 바람을 안고
시린 가슴에 봄바람으로 오소서!
꽃샘추위도 금년만은 하는 둥 마는 둥 하시어
탈 없이 봄꽃이 피게 하시고
찬양의 종다리 봄 하늘 높이 날게 하소서!
이제 후론 추위를 타지는 않을 테요.
당신 우리 봄이시니
가슴엔 훈풍이 늘 일 터니까요!
이 시는 제 고통이 무엇이며, 그 환난에서 어떻게 불사조같이 살아 나오는지를 볼 수 있을 겁니다. 이런 작업이 제 마음을 따뜻하게 했습니다. 메마른 가슴에 영성이 살 수 없습니다. 서정이 살아야만 영성이 살고, 마음이 따뜻해야 영혼도 따뜻해지는 겁니다. 이게 제 지론입니다. 거듭나고, 삶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사람은 자연을 보며 하나님의 위대함을 보는 사람입니다. 삶에서 창조의 능력으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때 하나님이 말씀으로 창조하심을 믿음으로 알게 되는 겁니다. (히11:3) 저는 이를 거듭난 서정이라고 부릅니다. 이 믿음에서 고양되는 서정이 다윗처럼 달과 별을 보며 하나님의 위대함을 보고 시를 쓸 수 있는 서정적인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줄로 믿습니다.
저는 지금과 같이 어려운 때일수록 자연을 가까이하고, 이 거듭난 서정을 고양 시켜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 서정으로 자연에서 교만한 거짓된 사람은 깨지고, 참 사람은 살리시고 당신의 자녀를 돌보시는 하나님을 알아 가시고, 죄 많은 곳에서도 은혜가 넘치게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해 갑시다. 저 지천인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충만한데 이르기를 축복합니다. 이게 시19편에서 보듯 자연계시가 특별계시가 되게 하는 겁니다. 저는 우리 은혜로 가족은 다윗과 같이 하늘의 달과 별을 보며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해설해내는 시인의 영성을 멋진 그리스도인이라고 믿습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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