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강론

요시야에서 보는 목자 예수

아브라함-la 2022. 7. 31. 15:39

022,7,31, 주일강론

본문 : 대하35:20-27 말씀 : 라인권 목사

 

    평강입니다. 이 대단한 더위를 무릅쓰고 예배에 나오신 여러분을 우리 하나님께서 은혜 주셔서 남은 더위 중에 강건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어저께 천정 등을 LED로 바꾸니 이렇게 예배실 분위기가 바뀌었습니다. 이 나라에 사람이 하나 바뀌었을 뿐인데, 이제 외국 언론이 이 나라를 걱정하는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더욱 위정자와 나라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제가 노 회장이던 해에 하노이의 호찌민 기념관을 돌아보며 놀란 것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대통령이나 장관을 지내거나 한 이들은 대부분은 재산가가 됩니다. 그런데 베트남을 프랑스와 미국을 이기게 한 베트남 독립의 아버지라 불리는 호찌민이 남긴 것은 오두막 하나와 소박한 침상과 책상과 걸상이 전부였습니다, 이 호찌민을 베트남 인민들은 “호 아저씨”라는 애칭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혁명가 호찌민이 이렇게 청빈과 검소로 나라와 국민을 섬 건 것이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의 영향이었답니다. 목민심서를 늘 가까이했다고 합니다. 다산은 관리를 목자로 인식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목자

이것은 성경과도 일맥상통합니다. 겔 34장은 이스라엘의 목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입니다. 여기서 목자는 왕을 비롯한 백성들의 지도자들을 말합니다. 성경은 왕을 목자로 인식하고 있는 겁니다. 이게 바로 이 세상 왕국과 이스라엘의 다른 점입니다. 세상 나라는 백성은 왕의 소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인 이스라엘은 나라와 백성은 하나님의 소유이고, 왕은 그 백성에게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나타내는 종, 목자일 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만왕의 왕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이스라엘의 목자”라고 했고,(마2:6) 주님도 “나는 선한 목자라”고 당신을 목자로 아셨습니다.(요10:14) 목자가 예수님의 자기 인식입니다.

 

가장 목자다운 유다 왕 요시야

그러면 이스라엘에서 가장 목자다운 왕은 누구일까요? 유다는 다윗부터 치면 약 380년을 존속했습니다. 다윗을 비롯해서 모두 22명의 왕들이 있었습니다. 이 중에서 가장 하나님께 대하여 진실하고 충성되고, 오로지 백성들의 목자로 산 왕은 누구겠습니까? 우리는 흔히 다윗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난 시간에 보았듯 다윗은 신하의 아내를 빼앗기도 하고, 인구조사로 자기 백성을 죽게 한 왕입니다. 그다음으로는 아사와 히스기야를 생각할 수 있지만, 성경이 전무후무한 왕으로 꼽는 이는 오늘 본문의 요시야 왕입니다. 왕하 23:25를 보겠습니다. “요시아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그래서 요시야 치세에서 백성들은 역사상 가장 행복한 때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모든 왕이 다 예수의 예표이나, 이렇게 볼 때에 유다의 마지막 별 요시야는 유다 왕들 중에서 선한 목자이신 우리 예수님을 가장 잘 예표하는 왕이었습니다.

 

선한 목자 예수의 예표로서 요시야

첫째, 예언 된 출생이 예수님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출생이 선자자들을 통해서 예고된 것 같이, 요시야는 그가 출생하기 300년 전에 선지자가 요시야라 이름 하는 왕이 날 것을 에언했습니다.(왕하13:2) 둘째, 예수님과 같이 생애 전체가 백성을 위한 헌신이었습니다, 요시야는 팔세에 왕이 되어서 재위 31년을 오르지 우상을 파하고 여호와께 대한 예배를 회복하는데 헌신했습니다. 나이도 비슷합니다. 예수님이 33세를 사셨는데 요시야는 39세를 살았습니다, 셋째,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위하여 죽으신 것 같이, 요시야는 오늘 본문에서 보듯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싸우다가 전사했습니다, 유다에서 외적과 싸우다가 전사한 왕은 요시야가 유일합니다. 이렇게 요시야는 오실 선한 목자 예수를 가장 잘 예표하는 왕입니다. 그러나 이 이스라엘의 선한 목자 요시야가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게 이 요시야의 죽음입니다.

 

몰락과 파멸로 이끈 죽음과 생명으로 이끈 죽음

요시야의 죽음은 유다의 종말을 불러왔지만, 우리 예수님의 죽음은 오히려 모든 백성을 영혼을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선한 목자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양을 위하여 생명을 바치는 것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10:11,15) 이렇게 목자의 희생과 죽음이 선한 목자의 기준입니다. 요시야는 앗수르가 망하는 것이 유다에 이익이라고 생각해서 갈그미스로 앗수르를 구원하려고 출정한 애굽의 바로 느고를 막으려다가 이 전투로 전사했습니다. 요시야가 국제정세를 잘못 읽기는 했지만 백성을 위하여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요시야의 희생과 죽음은 유다에게 생명과 부흥을 가져온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요시야의 죽음으로 평생을 바친 요시야의 개혁은 무너지고 맙니다. 그의 세 아들 엘리아김, 여호아하스 시드기야가 왕이 되지만 부친을 따르지 않아서 겨우 22년여 만에 시드기야를 마지막으로 586년에 바벨론에 멸망했습니다, 그래서 왕궁과 성전은 불타고, 3차에 거쳐서 바벨론에 포로 되고 말았습니다. 요시야는 살아서는 이스라엘의 선한 목자이지만, 죽음은 그 백성의 종말이었습니다. 이게 인간 메시아의 한계입니다. 인간 목자는 죽는 것이 아니라 살아야 목자입니다. 죽으면 목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목자 되심이 온전히 나타난 것은 살아서보다 십자가에 죽어서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심이 우리의 대속이 되었습니다. 그 죽음이 자기 백성의 죄와 사망을 죽게 했습니다. 예수의 죽으심이 백성의 원수 사탄을 죽게 했습니다. 즉 요시야의 죽음은 몰락과 파멸을 가져왔지만, 예수님의 죽음은 원수 죄와 사망과 사탄에게 파멸을 가져오시고, 당신의 백성들에게는 구원과 구원의 행복을 가져왔습니다. 죽으심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영생과 영원한 복 낙으로 인도하는 선한 목자가 되셨습니다.

 

시 23편의 선한 목자 예수

이걸 예언한 것이 시 23편의 목자의 노래입니다. 시 23편 앞에는 갈보리의 노래라고 할 수 있는 골고다가 있습니다. 그리고 시 23편 뒤, 24편은 시온성의 승리의 노래입니다. 이 골고다 산과 천국의 상징인 시온산 사이에 푸른 초장이 펼쳐지고 맑은 시냇가가 흐릅니다. 거기서 한 목자 아래 풀을 뜯기도 하고 편하게 누워 있기도 평화로운 양 떼가 있습니다. 이것은 골고 다산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께서 시온산에 재림하시는 그날까지, 이 세상을 다 가기까지 선한 목자로 계실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28:20에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신 줄로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선한 목자 요시야의 죽음은 백성들에게 파멸을 가져왔지만 우리 예수님은 죽으심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과 영원한 지옥불에서 우리 영혼을 영생과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가 되셨습니다, 죄에 빠진 모든 영혼은 계6:8과 같이 사망이라는 청황색 말을 타고 음부, 지옥불에 장사 지내러 가는 존재입니다. 사망이 목자인 것입니다. 이 사망을 예수께서 죽으시고 사시므로 죽이시고, 사죄와 칭의와 새 생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렇게 우리 예수님은 음부에 장사 지내러 가던 우리를 생명과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충족한 영혼의 목자이십니다. 이 한 목자로 영생에 이르기에 충족합니다. 믿음으로 이 한 목자 아래 있어서 영생과 천국에 이르시고 경험해 나가시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예수는 죽음으로 자기 백성들을 평안과 안식이라는 풍성한 삶으로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가 되셨습니다. 요시야의 죽음은 유다의 몰락과 파멸과 포로 됨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죽음은 자기 백성들에게 평안과 안식을 가져왔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인자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그렇습니다. 예수는 사죄와 구원에서 나오는 평안과 안식으로 인도하는 선한 목자십니다. 예수는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목자이십니다. 예수는 진리이십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시므로 진리의 영을 우리 가운데 보내셨습니다. 이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이 진리가 평안과 안식을 누리게 합니다. 이 진리가 이 악한 세상에서 의의 길을 가게 합니다. 이 행복이 목자이신 주님의 기쁨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목자로서 주님은 누이시고 쉬게 하시고 소생케 하신다고 하셨습니다.(시23:2,3) 이 말씀들은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하기보다 아들의 인도로 당신의 백성들이 구원받고 은혜 안에서 평안을 누리고 우리 영이 새로워지는 것이 소원이십니다. 이런 면에서 믿음 to do이기보다 to be입니다. 봉사가 귀하나 주님은 이 은혜를 받는 것이 우선이라고 하십니다. 이 선한 목자 예수 아래 있기를 원합니다. 이 목자 아래서 안식을 누립시다. 이 목자 아래서 이 세상을 사는 동안 평안과 안식이 넘시고 부족함을 알지 못하는 풍성한 삶을 경험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예수는 죽으심으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막대기와 지팡이로 함께 하시는 선한 목자가 되셨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무엇입니까? 질병, 위험한 일, 전쟁과 천재지변, 그리고 사망과 무덤입니다. 목자 예수는 푸른 초장에서만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함께 하시는 목자이십니다. 예수는 우리와 같이 되셔서 죽으셨습니다. 이로 질고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함께 하십니다. 예수는 죽으심으로 무덤에 내려가시고 거기서 부활하시므로 무덤이라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빛과 소망이 넘치게 하셨습니다. 무덤이 천국에 이르는 가장 안전하고 행복한 길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에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신다고 할 수 있었던 겁니다. 돌아보면 저는 몇 번이나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막대기와 지팡이로 함께 하시는 선한 목자이신 주님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이 선한 목자 아래서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구원을 경험합시다. 이 세상 다 가도록 이 선한 목자 아래 있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우리 은혜로 가족 여러분! 선한 목자 요시야의 죽음은 파멸을 가져왔지만, 우리 선한 목자 예수의 죽음은 죄와 사망과 시탄에게 파멸을 가져오고, 당신의 양 떼들에게 영생과 풍성한 삶과 천국에 이르는 안전을 가져왔습니다. 혹시 아직도 목자 없는 양같이 방황하십니까? 이제 믿음으로 이 선한 목자 예수의 양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선한 목자의 예수의 인도로 구원받아서 시온산에서 주님을 찬송하는 그 자리에 이르시를 선한 목자 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