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십 의 가을, 윤기로 반짝이는 갈꽃과 억새 꽃이 그리워 몇 년 만에 구월 말의 신성리 갈대밭을 찾았습니다. 억새도 그리웠지만, 가는 가을이 아쉽고, 정년을 앞두고 자주 흔들리는 내 영혼을 흔들리는 갈대밭 앞에 세워 보고 싶어섭니다. 한산에 도착하니 이미 점심때가 기울어서 식사할 곳을 찾았지만, 그곳은 식사할 만한 식당이 보이질 않았습니다, 겨우 찾아든 식당에서 주문한 식사는 찬은 좋았으나, 본 메뉴는 돈 받고 파는 음식이랄 것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으로 시장끼를 메우고 갈대밭으로 갔습니다.
한산에서 갈대밭에 이르는 너른 들에 꾀꼬리 빛으로 익어가는 풍요로운 들녘이 아름답고 상큼했습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강둑에 올라서니, 아직 따가운 햇볕 아래 연한 보랏빛 갈꽃 위에 가을 햇살에 빛나고 있었습니다. 볕이 너무 따가워 잠시 그늘 진 벤치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갈대밭을 걸었습니다. 전에는 갈대가 물억새보다 많고 잘되었는데, 금년은 갈대는 거의 망하고 물억새가 주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갈대꽃을 볼 수 없어 서운 했으나. 물억새는 잘 되었습니다. 옅은 보랏빛 물억새 꽃 위에 반짝이는 가을 햇살! 간간이 부는 강바람에 흔들리는 물억새의 물결, 호수 같은 금강 하구가 가을의 정취를 더해주고 있었습니다.
물억새가 잘 되어 옅은 보랏빛 꽃이 장관인 곳에 아내를 세우고 가을을 담았습니다. 그렇게 금강에서 부는 갈 바람과 물억새를 즐기다가 이런 생각에 들었습니다. 내가 몇 살까지 운전해서 이곳을 찾을 수 있을까? 앞으로 열 번 정도는 손수 운전으로 올 수 있을까? 그러자 정년으로 은퇴할 일이 떠오르고 머리가 복잡해졌습니다. 억새를 즐기고 있지만 갈대같이 흔들리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실은 요즘 걸핏하면 흔들리는 내 영혼이 괴로워서 흔들리는 갈대밭을 찾았습니다만, 이렇게 흔들릴 줄은 몰랐습니다. 겉으로 웃지만 속으로 우는 게 인생인가 싶습니다.
그러나 자연은 위대했습니다. 흔들리는 영혼을 안고 신성리 물억새밭 길을 걷는 동안 불안하고 알 수 없는 여수는 사라지고 안식과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흔들리는 갈대도 이렇게 꽃을 피우고 결코 쓰러지지 않고 서게 하신 분이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아! 평생을 은총으로 산 내가 아직도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사는 믿음의 방식이 시험이 된다니. 인생이 흔들리는 갈대임을 새삼 절감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갈대는 생각하는 갈대 인생과 많이 닮았습니다. 주님은 인생을 "상한 갈대"라고 하셨고,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느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라고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믿어야 할 것을 믿지 못함을 갈대라고 하셨습니다. 흔히들 바람에 흔들리는 연약한 갈대라지만, 바람에 흔들리기는 철갑을 두른 노송도 일반이 아니겠습니까? 태풍에 꺾이는 건 갈대가 아니라 노송이지요. 오히려 흔들림에 갈대의 갈대 다움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흔들림을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했지요. 돌아보면 흔들림으로 더욱 기도의 손을 모으고, 더욱 주께로 가고 서왔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길을 나선 목사는 이 신성리 갈대밭에서도 진주를 주은 셈이 되었습니다.
그 갈대밭에서 천상병 시인의 시 “갈대”가 떠올랐습니다. 평생 흔들리는 불안정한 삶을 살았던 불우한 시인이 갈대를 두고 읊은 이 시는 그의 영혼이 흔들리는 한줄기 갈대임을 그대로 표출하고 있어서 독자의 가슴을 짠하게 합니다.
갈 대
환한 달빛 속에
갈대와 나는
나란히 소리 없이 서있었다.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안타가움을 달래며
서로 애 떠지게 바라보았다.
환한 달빛 속에
갈대와 나는
눈물에 젖어 있었다.
이렇게 신성리 갈대밭에서 새벽이슬처럼 살아나 돌아온 어느 날, 아내를 따라서, 멀지 않은 여주의 산골 식당에서 점심을 하곤, 이포의 당남섬을 찾았습니다. 거기 이포보 쪽에는 넓은 핑크 뮬리 꽃밭이 한창이었습니다, 이게 우리 생태계를 교란한다지만, 참 곱습니다. 갈대와 억새 꽃이 한 해가 기우는 가을의 상징이라면, 이 핑크 뮬리는 가을의 정열이랄까요? 곡식을 익히는 가을 햇볕의 마지막 정열이 이 핑크 뮬리 빛일 겁니다. 내 칠십 대가 이렇게 붉게 타오르는 마지막 빛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가까운 이곳에 봄이면 유채꽃이, 가을 초입엔 메밀꽃이, 가을이 깊어가면 코스모스와 핑크 뮬리가 있는 건 행운입니다. 봄에는 남한강변을 따라서 끝이 보이지 않는 유체 꽃밭이 장관입니다. 차로 30분이면 와서 이 장관을 볼 수 있으니 행운이 아니겠습니다. 올 가을은 신성리 갈대밭과 이곳 핑크 뮬리를 본 것으로 가을의 정취를 충분히 만끽했습니다, 흔들리는 갈대! 핑크 뮬리! 이 둘처럼 가을의 이미지를 잘 담아내는 것도 없을 겁니다. 아내와 핑크 뮬리와 코스모스 밭을 걷다가 올 가을에는 갈대를 두고 시 한 편 쓰고 싶어 한 숙제를 꼭 하기로 했습니다.
가을날 갈대밭에서
- 라인권-
갈밭에는 대밭처럼 항시 소리가 난다.
부는 바람에 따라
서걱서걱하거나
때론 격정을 토하며
온몸을 굽혀 소리 내어 운다.
인생 초 여름 이든 시절
처음 본 갱경의 여름 갈밭에선
사 누대만큼 실히 자란 진 녹빛 갈대들이
밀물에 실려온 강바람 결에
나직 나직 낭만을 노래하고 있었다.
귀밑에 서리 내리게 된 시절
늦가을 신성리 갈대밭을 찾았다.
강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숲의
머리 센 갈꽃 무리들이 내게 물었다.
많이도 흔들렸구나!
흔들려도 제 자리에 서 있나?
흔들리긴 해도 가야 할 길을 가느냐고,
윤기가 있는 갈꽃이 보고 싶어
깊지 않은 가을날
이제 가을이 깊은 사람이
고희에도 흔들리는 영혼이 괴로워
그 갈대밭에 다시 섰다.
바람결인가?
‘갈대는 흔들림으로 갈대다.
사유하는 갈대들은
흔들림으로 서는 존재가 아니더냐.
착각 마라!
삶의 세월이 높을수록
제 바람에도 흔들리는 게 인생이니
흔들림으로 손 모아
주를 보지 않았느냐
흔들리며 반석이 될 것이다.’
나직이 갈대숲에서 나온 소리다.
한 줄기 갈 바람결에......
'나의 이야기 > 일상속의 아름다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엄니를 닮은 메밀꽃 밭에서 (1) | 2023.09.11 |
---|---|
삼 년 만에 만개한 11월의 국화 (3) | 2022.11.21 |
깊어 가는 가을 끝물 코스모스 (0) | 2022.09.30 |
해 질 녘 유월의 숲 (0) | 2022.06.27 |
우리 교회 능소화를 보며 (0) | 2021.07.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