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강론

이사야가 본 위로자 예수 그리스도

아브라함-la 2022. 10. 21. 20:53

022,10,16, 주일 강론

본문 : 사 40:1-5

말씀 : 라인권목사

평안입니다. 하나님의 사중 계획 안에 있음을 축하드립니다. 하나님의 사중 계획안에서 다 잘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은 이사야서에서 예수님을 만날 시간입니다.

 

구약의 복음서 이사야서

성경이 66권인데 이사야서도 66장으로 되었습니다. 성경은 구약 39권, 신약이 27권입니다. 이사야서도 1-39장까지 전반부는 심판의 경고이지만, 후반부인 40장- 66장까지는 위로와 소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이사야서는 예수께서 이새의 가지에서 오시되 동정녀에게 나신다고 메시아의 예언이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고, 골고다 십자가의 고난과 그 의미를 생생하게 예언한 사 53장도 있고, 도래하는 하나님의 왕국이 찬란하게 계시되어있습니다. 이렇게 이사야서에는 예수로 가득한 구약의 복음서이지만, 오늘은 위로의 시작인 사 40장에서 우리 예수님을 만나려고 합니다.

 

내 백성을 위로하라

이제까지 범죄 한 이스라엘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한 선지자는 이제 어조를 바꾸어 “내 백성을 위로하라”라고” 심판받은 이스라엘에 임할 하나님의 위로의 메시지를 선포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이 위로를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정다히-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고 하십니다. 이 위로의 말씀을 정리하면, 바벨론 포로 되게 한 죄악이 사하여져서 이제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기적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신 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창조의 하나님이 이루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포로 된 세상에서 해방시키는 위로자 예수

여기의 광야-사막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보는 것은, 우리가 보니 독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이라는 요 1:14 말씀과 같이 예수님의 성육신으로 이루어졌고, 외치는 자의 소리는 선구자 세례 요한에게서 성취되었다고 예수님이 친히 증거 하셨습니다.따라서 이 위로의 말씀은 일차적으로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어 돌아오므로 이루어졌고,, 이차적으로는 예수는 죄악에 포로 된 세상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는 위로를 베푸시는 위로자로 오신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이사야가 위로자 예수를 본 것입니다. 이사야가 이 위로자 예수를 예언했습니다.  이 예수는 죄악 된 세상에 포로 된 우리들에게 어떤 위로자가 되십니까?

 

첫째, 예수님은 우리를 율법과 죄와 사망의 복역의 때를 면키 하시는 위로자이십니다. 지금 성경은 “노역의 때”라고 했지만, 개역과 구역은 “복역의 때”라고 했습니다. 이 히브리말 “체바아흐”는 군대, 전투, 군대에 참가한다는 뜻입니다. 영화 글래디에이터에 이 말의 뜻을 보여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주인공이 죽으며 전역하여 처자가 기다리는 고향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으로 바뀝니다. 싸이프러스 나무 길을 따라 언덕 위에 그림 같은 집이 있습니다. 주인공이 바람에 흔들리는 평화로운 밀밭 사이로 집으로 갑니다. 이렇게 “체바아흐”는 징집되어 전쟁에 나가 치열한 전쟁터에서 복무하던 군인이 전역하여 군무를 벗고 평화로운 고향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왜 세상이 바벨론 포로 생활 같고, 전쟁터와 같을까요, 그것은 모든 인생은 율법과 죄와 사망에 복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이 율법과 죄와 사망이라는 복역의 때를 끝내주셨습니다.

 

예수는 율법의 무거운 복역에서 복음이라는 은혜 아래로 우리를 전역시킨 위로자이십니다. 바벨론 포로는 율법의 요구 앞에 전폐된 이스라엘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요구를 이루지 못해서입니다. 율법은 사람이 질 수 없는 무거운 짐입니다. 이 율법의 영적, 도덕적 요구를 이루지 못함이 바울이 고백한 인생의 곤경이요 곤고함입니다. 이런 인류를 위하여 예수님이 육신으로 나셔서 율법 아래 들어가서 사람이 이루지 못하는 모든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셔서 예수께서 우리의 의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율법과 선지자는 세례 요한 때까지가 되게 하셨습니다.(마 11:13)그래서 지금 우리는 율법이 아닌 은혜 아래 있습니다. 믿는 자는 모든 율법을 이룬 의인으로 여겨주시는 칭의로 위로하십니다.. 여기에 평안과 안식이 있습니다. 이 은혜 아래서는 율법이 무거운 짐이 아니라, 은혜와 축복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율법에서 자유입니다.

 

그리고 예수는 죄의 무거운 짐에서 해방시켜 주신 위로자이십니다.(2) 율법의 요구를 이루지 못한 것이 죄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거슬러 불순종한 것입니다. 이 죄와 죄책은 도덕과 윤리, 수행과 고행으로 해결할 수없습니다. 인류는 이 죄에 복역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께서 이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대신 형벌을 받으셔서 모든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모든 죄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합니다.(요일 1:7) 눈보다도 더 희게 씻어 주십니다.(사 1:18) 우리의 죄와 죄책을 동에서 서가 먼 것 같이 멀리 옮기시고(시 103:12)깊은 바다에 던지셨습니다.(미 7:19) 이 예수로 죄는 죽고 의에 대하여 사는 자유와 평안과 안식의 위로가 되셨습니다.(롬 8:2,6:2,6,11)

 

그리고 죽기가 무서워 죽음에 종노릇 하는 우리를 십자가의 죽음으로 죽음을 죽이시고 부활하셔서 우리의 생명과 부활이 되셨습니다.(요 11:25,26) 믿는자는 죽어도 살 것입니다.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을 두려워하지 않고 순교도 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걸 구원이라고 합니다. 이게 예수의 위로입니다. 이 죄악 된 이 세상에서 우리 예수님으로 이 구원의 위로를 받으시고 이 구원의 위로로 이 세상을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둘째, 예수는 구속을 받은 우리를 천국에 이르기까지 이 광야 같은 세상을 지나는 동안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시는 실제적인 위로를 베풀어 주십니다.(3-5) 포로 된 바벨론에서 나온 이스라엘은 광야를 지나야 예루살렘에 이를 수가 있습니다. 이 광야-사막은 생존이 어려운 장소일 뿐만 아니라, 수많은 위험이 있고, 원수가 매복한 곳입니다. 그래서 에스라는 출발하기 전에 아하와 강변에서 금식하고 기도했고, 느헤미야는 왕게 호위할 군사를 청해야 했습니다. 이 광야를 출애굽 시에 만나를 내리고 불과 구름으로 인도하신 것 같이, 광야에 길을 내시고, 사막에 강이 흐르게 하시는 이적을 베푸시겠다고 합니다.(사 43:19,20) 이 영광을 보게 하십니다. 광야를 이 영광으로 위로하십니다..

 

이렇게 우리 예수님은 죄와 사망에서만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구속받은 우리를 이 세상에서 천국에 이르도록 기적적으로 구원하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라”라고” 확신했습니다.(딤후 4:18).(딤후4:18) 지금 마치 거친 광야, 메마른 사막 한가운데 있는 것 같습니까? 돌아보십시오. 지금까지 주님은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저를 인도하셨습니다. 공수인 제게 공급의 위로자가 되셨습니다. 사자의 입에서 건지셨습니다. 차가 사 차선 한가운데서 전복되는 사고에서, 캄보디아를 가는 전날 밤에 충수염으로 수술했습니다. 만약 제가 캄보디아 가서 충수염이 발생했다면 어쩔 번했습니다. 지난번 화재에서 우리 집사님이 이런 위로를 받으셨습니다, 세상이 험하고 곤해도 주님이 이 위로자로 계십니다. 이 주님의 위로로 이 악하고 험한 세상 가는 동안 승리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셋째, 예수는 풀의 꽃과 같이 무상한 인생이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히 서는 것을 보게 하는 위로자가 되십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이는 인생은 풀과 풀의 꽃과 같이 약하고 변해서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의 하나님이 창조의 권능으로, 창조적으로 이 말씀을 이루시겠다는 겁니다.(26,28)“ 그래서 주님이 천지는 변해도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 일획도 떨어지지 않고 다 이루신다고 하신 것입니다.(마 5:18).(마5:18) 그래서 이 말씀을 말씀의 진정성과 불변성을 강조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성경의 불변성을 넘어섭니다, 왜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합니까? 이걸 베드로 사도처럼 말씀한 분이 없습니다. 말씀이 영원한 것은 우리가 그 말씀으로 거듭났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않을 씨로 된 것이니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된 것이라“(벧전 1:23)“(벧전1:23) 말씀으로 거듭난 우리는 천국에서 영원을 누립니다. 따라서 거듭나게 한 말씀이 천국에서 영원히 섭니다. 그리고 이렇게 거듭난 성도가 말씀을 믿음으로 순종할 때에 썩을 것이 것을 썩지 않게 하고, 죽을 것이 죽지 않게 하는 성화 구원이 되었습니다. 순종한 말씀이 이 구원과 상급으로 천국에서 영원히 선 것입니다. 풀과 같고, 풀의 꽃과 같이 허망한 인생이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취하는 위로를 보는 것입니다. 이게 예수님의 위로입니다. 시들고 떨어져 썩을 인생과 인생의 수고가 영생하도록 있는 위로를 누리게 하십니다.

 

도스토옙스키의 까라마조가의 형제들에 파한 뿌리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제 초등학교 시절 교과서에 실려서 잊지 않고 있습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어머니가 죽어 지옥에 떨어졌습니다, 그 딸은 성녀 수준입니다, 이 딸의 탄원으로 하나님은 천사에게 창고에서 그 어미가 천국에 있게 한 선행을 조사하게 하니, 거지에게 던져 준 파 한뿌리가 전부였습니다. 천사에게 그 파를 잡고 지옥에서 올라오게 허락하셨지만, 그 여자는 자기를 잡고 따라 올라오는 자들에게 이 파는 내 파라고 떨쳐내다가 파가 끊어져 다시 지옥에 떨어졌습니다.. 얼마나 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천국에 보냈느냐가 문제입니다. 천국에 있게 된 것만 소망이 되고 위로가 됩니다. 예수는 썩어짐에 종노릇 하는 데서 이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취하게 구원이 되셨습니다. 이 예수로 썩을 것에서 썩지 않는 것을 취하고 죽을 것에서 죽지 않는 것을 취하는 영생의 위로와 소망의 위로로 이 세상을 승리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은혜로 가족 여러분!! 죄악에 포로 된 이 세상에서 위로자 예수께로 갑시다. 예수로 율법과 죄와 사망에서 해방된 위로를 누립시다. 이 예수로 광야 같은 세상을 가는 동안 모든 삶의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의 기적의 영광을 보는 위로로 살아갑시다. 이 예수로 풀의 꽃 같이 될 인생이 순종한 말씀이 천국에서 나와 함께 영원히 서는 위로로 영생을 취하시고 영원한 행복을 만들어 나가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