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13, 주일
본문 : 애3;19-23
말씀 : 라인권목사
입동을 지나서 다음 주가 추수감사절입니다. 여러 지표들이 어두운 겨울을 예고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사중 계획안에서 잘되는 겨울이 되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사전적으로 이 절망을 불투명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봅니다.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습니다. 이때 포기하고 체념하는 상태를 절망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흔히들 키르케르고의 말을 인용해서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키르케르고가 말한 절망은 이거와는 좀 결이 다릅니다. 그는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지만, 그가 말한 죽음은 자기를 상실했거나 자기이기를 원하지 않거나, 자기 자신이기를 원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인간만이 절망을 알고, 그 절망에 이르지 못하면 종교적 실존도 구원도 없으며, 절망이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게 한다고 했습니다,
오늘의 본문 애가서의 예례미야가 그렇습니다. 이 본문은 먼저 선지자 예레미야의 깊은 좌절과 절망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20절은 “내가 낙심 되오나”라고 했습니다. 이 낙심은 19절의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 때문입니다. 이 말은 성경에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으로 인한 고통의 상태를 의미하는 말로, 여기서는 바벨론 포로 됨의 고통을 말합니다.(40-47) 이 바벨론 포로가 선지자를 어느 정도 절망하게 했습니까? 부르짖어도 기도를 물리치시고, 다듬은 돌을 쌓아 길을 막으시고, 하나님이 마치 곰과 사자같셨습니다.(8-10) 그래서 18절에서는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라고 했습니다. 마지막 보루인 하나님이 소망이 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완전한 절망입니다. 그래서 “내가 낙심되오나” 이 말은 넘어졌다는 말입니다. “내 심령이 내 속에서 너무 졌다 “고 한 것입니다. 이게 절망입니다. 자기가 자기가 아닌 것이 되었습니다. 자기를 원치 않고, 자기 자신이기를 원한 겁니다. 이걸 죽음- non being 비존재라고 합니다.
그런데 21절을 보면 예레미야는 여기서 죽는 것이 아니라, 이 절망에서 소망으로 마치 불사조와 같이 찬란하게 살아 나옵니다. 왜 소망이 있게 되었습니까? 21절입니다.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중심에 회상한 즉 바베 론 포로 되게 한 것을 생각했다는 겁니다. 바벨론에 포로되게 한 것을 마음에 회상하고 담는 것이 왜 소망이 됩니까? 그 이유를 보여주는 것이 22절입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궁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즉 포로 됨이 진노하심만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이셨다는 것입니다. ”인자와 긍휼“은 헤섿으로 언약을 이루는 하나님의 사랑을 뜻합니다. 바벨론 포로가 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겁니다. 이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무궁한 사랑이 아들이신 예수를 주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로서는 소망이 없지만 하나님으로서 오히려 소망이 있습니다. 이게 복음입니다. 예레미야가 포로 됨의 눈물과 절망에서 구원하시는 은혜, 언약의 사랑의 긍국인 예수를 본 것입니다.
그리고 예레미야는 절망의 고통 중에 이 하나님의 사랑을 묵상했습니다. ”기억한다 생각한다 “라는 말을 보십시오, 이 사랑을 사고했습니다. 선지자는 자기가 넘어질 때에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언약을, 사랑을 생각한 것입니다. 이때 넘어지는 자기는 죽고 은혜라는 소망 중에 있는 자기가 살아난 것입니다. 이걸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도다 “라고 찬양하게 된 것입니다. 절망에서 불사조와 같이 살아나고 새로워진 것입니다. 이걸 시편은 매일 죽고 산다고 했습니다.(시 73:14) 이걸 다윗은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고 했습니다.(시 110:3)이 작업이 예레미야가 절망에서 메시아 예수를 보고 이 소망으로 죽지 않고 살아 나오게 했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하나님과 말씀에 충성했습니다. 이렇게 예레미야가 절망 중에서 소망이신 예수를 만난 겁니다.
따라서 예수는 우리 인간의 죄와 죽음의 절망에서 우리의 소망이십니다. 여러분! 예례미야가 언제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까? 절망에서지요. 예레미야의 절망은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절망입니다. 바벨론 포로는 율법에 이르지 못하는 이스라엘의 한계라는 절망에 이르게 했습니다.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그 부패한 마음은 처방도 약도 없습니다. 이 중상에 하나님도 하룻밤 유숙하는 나그네와 같고 구원하지 못하는 용사 같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 대한 소망도 끊어졌습니다. 완전한 절망입니다. 이걸 키르케르고가 죽음 non-being “비 존재”라고 했습니다. 이 절망에서 예례미야가 언약을 이루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고 이 언약의 사랑의 극치이시며 완성이신 예수의 구원을 만났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죄의 절망에서 구원의 소망이신 예수를 만나는 겁니다. 세례문답에서 “그대들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줄 알며 당연 그의 진노를 받을 만하고 그의 크신 자비하심에서 구원 얻을 것 밖에는 소망이 없는 자인 줄 아느뇨?”라고 묻습니다. 믿음은 죄에서 자기에 대하여 절망한 것입니다. 이 절망이 예수를 보게 합니다. 이 절망이 예수가 구원의 소망이 되게 합니다. 예수는 죄와 사망에 절망한 사람의 구주요 구원이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죄인도 예수 안에 소망이 있습니다. 단 예수는 죄를 절감하고 절망하여 오직 예수만 바라는 사람에게 구원의 소망이 되십니다. 믿음은 죄에 대하여 죽고 거기서 예수를 의지하여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 중에서 낙심되고, 절망하여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절망에서 예수께 소망을 두고 살아 나오시는 구원을 경험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예수는 인간의 무능과 실패로 인한 환난의 절망에서 구원의 소망이 되십니다. 예레미야가 바벨론 포로라는 실패의 절망에서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고 오히려 소망을 가졌습니다. 이스라엘을 보면 소망이 없지만 하나님과 언약의 사랑을 보니 소망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렇습니다, 실패와 그로 인한 환난은 자기 비하와 연민에 빠지게 합니다. 이것이 예레미야의 경험 같이 하나님도 소망이 못 되게 합니다. 기도해도 듣지 않으시고 다듬은 돌로 길을 막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절망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그 절망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랑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보면 소망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아들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고 했습니다. 이렇게 살아 나옵니다. 이걸 생각하고 기억합시다, 사고합시다. 그러면 실패와 환난의 눈물과 절망에서 예수를 현재적 구원으로 경험할 줄로 믿습니다.
은혜로 가족 여러분! 이렇게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니라, 생명에 이르는 길입니다. 예수는 죄와 사망의 절망에서 소망이십니다. 삶의 절망에서 소망이십니다. 절망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 이신 예수를 생각합시다. 그래서 울음이 기숙하는 절망의 밤에서 소망이신 예수를 더욱 깊이 만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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