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강해

보이는 욥이 전부가 아니다!

아브라함-la 2024. 7. 15. 10:56

-레옹보나의 <욥> 1880,유화

024,7,14, 주일

본문 : 욥1:6-12

말씀 : 라인권목사

 

하나님의 사중계획 안에 있음을 감사합시다. 내일이 초복이고 휴가철이라서 이때면 늘 드리는 당부인 기도 하시고 상식과 예절을 지키는 것이 덕이요, 안전이요, 평안의 길이라는 걸 잊지 마시기를 당부합니다. 물 좋고 정자 좋은 데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산이 좋으면 물이 좋지 못하고, 물이 좋으면 산이 좋지 못하더라는 겁니다. 사람이 그런 겁니다. 인물은 좋은데 재주가 없거나, 재주는 있는데 인물이 안 됩니다. 부한데 교양이 없고, 교양은 있는데 빈한해서 애석합니다.

 

구비되고 완벽한 욥

이런 면에서 우스 사람 욥은 참 행운아입니다. 교중에는 신앙은 좋은데 가난해서 안 됐는데 욥은 신앙도 좋고 거부입니다. 부를 쌓으려면 양심을 속이고, 못 할 짓을 해서 부해도 지탄을 받지만, 욥은 정직한 부와 존경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부하면 경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욥은 가장 번성하고 부할 때도 경건하기까지 합니다. “내 종 욥과 같은 자는 세상에 없다”하나님께서 인정하셨을 정도입니다. 완벽합니다. 부족하거나 모자라는 데가 없어 보입니다.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흠모의 대상입니다.

 

하늘에서 보니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님

이렇게 욥의 경건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던 욥기의 연출자는 장면을 땅에서 하늘로 바꿉니다. 거기에 복되신 하나님의 보좌 앞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모셔 서 있습니다. 그 자리에 사탄도 서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탄에게 욥을 자랑하시고, 사탄은 욥을 참소합니다. 하나님은 참소자사탄에게 욥을 시험하도록 허락하십니다. 욥을 하늘에서 본 겁니다. 즉 욥기의 연출자는 하늘의 관점으로 욥을 보게 합니다. 지금까지 육신의 눈으로 보이는 욥을 보았지만, 이제는 하늘의 관점, 하나님 편에서, 신령한 눈으로 욥을 보자는 겁니다. 이렇게 하늘에서 욥을 보니 그렇게 완벽해 보이던 욥이라는 사람이 시험을 받을 필요가 있는 사람으로 있습니다. 욥기의 첫 장면에서 본 욥과 욥의 모든 것이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또렷하게 보여 주고 있는 겁니다.

 

보이는 소유가 전부가 아님

우선 하늘에서 보면 보이는 욥의 소유가 전부가 아닙니다. 보이지 않지만, 여호와 하나님이 욥의 옹호자로 하늘에 엄존하시는 겁니다. 이 하나님께서 욥을 다 아시고, 자랑스러워하시며, 사탄의 청구를 허용하시되 소유에 제한하여 욥의 생명에는 손을 대지 못하게 하십니다. 말하자면 여호와 하나님이 욥의 뒷배로 하늘에 계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욥의 편이시고, 욥의 하나님이십니다. 보이지 않지만 욥의 진짜 소유는 이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자신의 소유로 하는 건 가장 원대한 꿈이요, 위대한 일입니다. 요셉이 비록 감옥에 있어도 이 하나님 때문에 당당한 자유자로 있었습니다. 이 눈을 가지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보이는 소유만으로 사람을 평가해선 안됩니다. 하나님이 없이 가진 것이 보이는 것이 전부인 사람은 정말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이요. 세상 보기에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도 하나님을 소유했다면 무명하나 유명하고 가난하지만 부요케 하는 사람입니다. 이 시간 이 눈으로 자신을 보면 나는 있는 자입니까? 없는 자입니까? 나는 복도 없는 사람입니까? 나 같은 행운아는 없습니까? 세상이 부러워하는 것들을 다 소유했어도 하나님이 없는 나를 가장 가련하고 불쌍한 자로 인식합시다. 비록 가진 것은 없어도 하늘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으로 압시다. 보이는 소유가 전부가 아니라는 이 사실을 결코 잊지 마시기를 축복합니다.

 

보이는 평안과 행복이 전부가 아님

그리고 하늘에서 보는 욥은 보이는 욥의 평안과 행복이 전부가 아닙니다. 욥기의 첫 장면은 꼭 시144편을 보는 것 같습니다, 곳간은 백곡이 가득하고, 들에는 양 떼가 덮이고 수소는 무겁게 실었고 나가서 막는 일이나 슬피 부르짖음이 없다고 했습니다. 욥이 그랬습니다. 들에 덮인 욥의 우양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열 자녀들이 화목하게 생일잔치를 하고, 아버지 욥은 이를 느긋하게 지켜보며 만면에 미소를 짓고 있습니다. 안전하고, 평화롭고 행복이 흘러넘칩니다. 모든 사랑이 이를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늘로 장면을 바꾸니, 하늘에서는 욥을 두고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사탄은 하나님 앞에서 욥을 훼방하고, 참소하며 대적합니다. 사탄은 때가 되기까지 하나님께서 허용한 공중권세로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고 있습니다. 하늘에 보는 욥은 안전하고, 평안하고 평화로운 것이 아니라, 폭풍 전야입니다. 이게 욥이라는 이름을 실감 나게 합니다, 욥이라는 말이 히브리어 '아에브'에서 파생된 것으로 본다면 ”많은 핍박을 받는지“ 또 '미움을 받는 자'라는 뜻이 되며, 아람어 '아바'에서 파생된 것으로 본다면 '회개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휘방자 사탄 대 핍박을 받는 자 욥이 이 능동 대 수동의 관계 속에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일의 모든 뿌리, 즉 죄와 모든 비참의 뿌리가 사탄이라는 겁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사람, 권세, 정치, 경제가 뿌리인 것 같지만, 다 영적인 문제라는 겁니다. 그리고 인간의 생사화복, 모든 것이 다 하늘의 하나님의 주권에 있다는 겁니다. 부하게 하는 이도 하나님이시며, 없게 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과 관계에 사활이 걸려 있습니다, 눈으로 보이지 않지만, 이 큰 싸움이 있습니다. 이 세계, 이 싸움을 보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이 전쟁을 인식하지 못해서 주님을 부인하는 시험에 빠졌습니다. 이 눈으로 보고 영적으로 접근합시다, 이 세계를 보아서 이 영적인 전투를 인식하고 깨어 있고, 하나님 두기를 싫어해서 하나님과 틀어지려는 자기를 못 박아 하나님과 맞추어 나가는 싸움에서 승리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보이는 신앙과 경건이 전부가 아님

무엇보다도 하늘에서 보면 보이는 욥의 신앙과 경건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의 몸, 즉 건강과 생명을 제외한 모든 것, 재산만이 아니라, 심지어 욥의 자녀 십 남매를 한날한시 한자리에서 죽이는 시험을 허용하셨습니다. 이는 욥이 그토록 경건했어도 욥이 이 큰 고난의 시험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는 겁니다. 그 경건한 욥에게 근본적 결핍과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대체 무엇을 시험하여 무엇을 얻게 하실 목적으로 ”욥의 고난“으로 일컬어지는 큰 고난을 주셨습니까?

 

욥의 인내를 들었거니와 라는 말씀을 따라서 인내를 배우게 할 목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욥도 결국은 이 고난을 인내하지 못하고 생일을 저주했습니다. 인내를 배우는 데 욥의 고난이 필요할까요? 그 욥의 고난을 인내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갑절의 축복이 욥에게 고난을 주신 목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물질적인 축복이라면 지금 이대로 충분하고 만족합니다.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 욥의 의를 드러내시려는 목적이라는 이도 있습니다. 물론 종장에서 욥에게는 욥의 친구들이 생각한 그런 죄가 없고 욥이 정당했다고 욥을 신원하셨지만, 욥의 고난은 욥의 의를 드러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욥의 영육 간의 무지와 한계를 노출했습니다. 오히려 욥의 고난은 욥이 믿음의 상극인 자기 의에 빠져 있는 것을 드러냈습니다.

 

따라서 욥에게 시험을 허가하시는 이 하늘의 장면은 욥과 견줄만한 경건은 세상에 없을 정도이지만, 이 사람 욥이 이 참혹한 고난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욥의 신앙과 경건에도 불구하고, 있으면 전부가 되고 없으면 전실, 전무가 되게 하는 이 결정적인 것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욥의 고난이라는 이 대가를 지불해서라도 욥이 사야 하고, 소득 해야만 할 전부가 되는 것이 없다는 겁니다. 모든 것을 잃고서라도 반드시 얻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그걸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합니다. 예수가 계시면 전부요 전득이지만, 그리스도가 없으면 전실이요, 전무입니다. 하늘에서 보니 욥에게 이 예수가 없다는 겁니다. 이 예수라면 욥의 고난이 이해가 됩니다.

 

사람이 이 그리스도를 얻는 길은 마음으로 믿어 입으로 고백하는 ”믿음“이라는 한 길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본 욥에게는 이 믿음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믿음의 원수, 상극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게 자기를 옳게 여기는 자기 의입니다. 믿음이란 자력이 없어서 생사를 적의 자비를 바라고 투항하듯 하나님께 투항하는 것입니다. 빈손으로 죄인으로 오라는 겁니다. 자기 의를 포기해야 비로소 그리스도를 의뢰하게 됩니다. 그런데 욥의 경건이 욥을 자기를 의롭게 알게 한 겁니다, 뒤에서 보겠습니다만은 자기가 옳다는 자기 의가 욥을 지탱하는 보루였습니다. 말하자 먼 욥은 교만한 성자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게 욥이 시험당할 이유입니다.

 

이 자기 의, 자기를 깨야 합니다. 이 자기가 죽어야 합니다. 헹그스텐베르그는 이 영적 교만은 설 때려서는 안 되고 아주 예리하게 때려야 고치는 병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욥의 고난으로 욥을 황무지로 만들어 버린 겁니다. 욥의 고난으로 자기를 의롭게 여기는 욥을 깨 주시고, 죽여주셔서 하나님 앞에서 변백 하는 입술의 고백인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게 해 주셨습니다. 욥이 이 한 길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소득 하자 예수는 욥에 전득이 되셨습니다. 이게 욥기입니다. 이게 욥기의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이 시간, 이 하늘의 관점으로 보면 우리는 있는 자입니까? 없는 자입니까? 일의 뿌리가 하늘에 있는 것을 보시고 영적으로 접근하여 허공을 치는 일에서 자신을 구원합시다. 전득이신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잃고서 반드시 얻어야 할 소득입니다. 어려서부터 경건해도 그리스도를 소유하지 못했으면 전무입니다. 이 분이 계십니까? 이 하늘의 눈이 열리시고, 이 눈이 밝아지시기를 축복합니다. -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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