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강해

고난의 한 가운데 있는 이의 심정

아브라함-la 2024. 9. 26. 22:08

024,9,22,주일

본문 : 욥7:1-21

말씀 : 라인권목사

 

전도자는 세상에는 학대와 학대의 눈물은 있으나 그 눈물을 닦아 줄 위로자가 없는 것이 폐단이라고 하셨습니다. 학대받는 세상에 위로자가 없는 건 무엇 때문일까요? 우선 세상은 타인의 고통을 강 건너 불 보듯 하는 방관과 무관심 때문입니다. 내 발에 불똥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방관하고 방치합니다. 이게 고통당하는 이에게 소외감을 느끼게 합니다, 그리고 세상은 불행을 당하는 사람을 나쁘게 생각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행을 당하는 건 다 그럴 이유가 있다고 여깁니다. 이것이 우월감을 가지고 고통하는 사람을 충고하고 가르치려고 하게 합니다. 이게 불행으로 비참한 사람을 더욱 비참하게 합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세상은 값싼 동정심으로 불행한 사람을 한 인간이 아니라. 순전히 구제의 대상으로 취급합니다. 이것이 오 핸리의 말과 같이 자선이 굴욕이라는 세금을 내게 합니다. 무엇보다도 세상은 남의 불행을 즐기려는 사악한 근성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불행에 빠지면 당장 말거리가 됩니다. 마치 닭이 약자를 집단적으로 쪼는 것 같이 이지메를합니다. 넘어지는 울타리 같은 이들을 밟고 싶어 하고, 아주 넘어지게 합니다. 세상인심이 이렇습니다.

 

이게 다 “남의 염병이 내 고뿔만 못하다”는 속담처럼 고난당하는 이의 아픔과 그 심정을 몰라서입니다. 고통하는 세상을 사는 사람이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여 아픈 사람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비인간적인 사람이 되고 있는 겁니다. 이점이 우리가 욥기를 공부할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6장에서도 고난당하는 욥의 심정이 역력히 드러나고 있지만, 7장에서 계속되는 욥의 반론은 고난의 한가운데 있는 사람의 심령을 절절하게 노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고난의 고통과 고통하는 사람의 그 아픈 심정을 헤아리게 됩니다. 그러면 욥에게 닥친 큰 재앙은 욥으로 하여금 어떤 심정이 되게 했습니까?

 

나는 내일이 없는 소망없는 사람이다  

첫째, 고난의 한가운데 있는 사람은 자기를 내일이 없는 소망이 없는 사람으로 인식합니다.(1-6) 욥은 상피병으로 고통 중에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자신의 처지를 하루 벌어 하루를 먹는 장래가 없는 품꾼의 날과 같다고 하소연합니다. 막장 인생이라는 거지요. 내일이 없는 삶은 일회용 인생일 뿐입니다. 자기가 일회용품 같이 여겨지는 것은 얼마나 비참하고 참담한 일입니까? 인생이란 소망으로 사는 존재입니다. 소망이 없는 삶은 살았으나 죽은 겁니다. 소망이 없는 이는 존재하나 존재가 없고, 참 자기가 아닙니다. 욥이 이런 상태가 된 겁니다.

 

그래서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에서 “희망을 포기하는 것은 죄악”이라고 했고, 실존주의 철학에서는 죽음을 “비존재”라고 한  겁니다. 내가 내가 아닙니다. 이것처럼 아프고 죽을 맛은 없는 겁니다.  이게 고난의 한가운데 있는 사람의 심정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충고는 더 아득한 절망에 빠지게 할 뿐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동정하는 처량함

둘째, 고난의 한가운데 있는 사람은 깊은 자기 연민에 빠집니다. (7-10) 욥은 자기 생명이 바람같이 덧없다고 합니다.(7) 다시는 예전의 행복한 날을 보지 못할 것 같습니다.(7) 내가 죽으면 사람들이 다시 나를 볼 수 없음같이(8) 내가 죽어 스올 즉 무덤에 내려가면 하나님이 다시 자기에게 은혜를 베푸시려고 해도 소용이 없게 되어, 하나님께서 자기를 너무 심하게 다루신 것을 후회하실 것이라고 합니다.(8) 이게 고난의 한가운데 있는 사람의 심정입니다. 자기가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고, 자기를 동정해야 합니다. 사람이 자기가 자기를 동정하는 것같이 처량하고 참담하게 하는 겁니다. 아예 자기가 싫은 겁니다. 그래서 자기 생명을 싫어하고, 죽음을 갈망합니다.(15,16)세상에 이걸 알아줄 이가 없으니 고독하고 고통이 심해지는 것이 인생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이 고통이 됨 

셋째, 무엇보다도 고난의 와중에 고통하는 사람은 무상의 행복과 감격인 하나님의 관심이 견디기 어려운 짐으로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축복은 하나님의 관심입니다. 제사장은 이렇게 축복했습니다,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민6:25,26) 이렇게 축복은 하나님의 관심인 것입니다. 다윗은 이 하나님의 관심에 이렇게 감격했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시8:4,5)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관심은 무상의 행복이며, 감격인 겁니다. 그러나 고난의 한가운데서 신음하는 욥은 이 하나님이 관심이 견딜 수 없는 고통이라고 합니다.

 

12절은 하나님께서 마치 자기를 위험한 바다와 바다의 괴물같이 감시하신다고 합니다. 유일한 안식과 위로가 잠드는 것인데 자려고 하면, 하나님이 꿈과 환상으로 두렵게 하여 불면의 밤이 되게 하시니,(13,14)내가 내 생명, 즉 사는 것이 싫고, 죽음이 소망이라고 합니다.(15,16) 그러니 죽을 수 있게 제발 자기에 상관 말아 달라고 합니다.(17-19) 말하자면 하나님이 임재가 욥에게는 마치 노예를 감독하는 감독의 날카로운 눈초리와 채찍과 같이 느껴져서 견딜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죄가 있다고 해도, 하나님께는 손해 되실 것이 없는 분이시니 제발 자기를 놓아주시고(20) 죄가 있다면 용서하셔서 스올에서 하나님을 찬송할 수 없으니, 내가 죽어 스올에 내려가면 그때 하나님께서 제게 은혜 베푸시려고 해도 소용없으니, 지금 저를 놓아 달라고 합니다.(21) 이렇게 고난의 한가운데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임재와 관심도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되는 겁니다.

 

이게 고난의 한가운데 있는 사람의 상한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관심도 괴로운 사람을 말거리로 삼고 있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사람들이 자기를 두고 수군수군합니다. 만나는 사람은 위아래 없이 다 왜 그렇게 했느냐고 책망하고, 충고하고 가르치려 듭니다, 값싼 동정으로 인격을 짓밟습니다. 넘어지는 울타리 같은 자를 아주 넘어지게 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고난당하는 사람 앞에 비인간적인 사람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런 비인격적이고 비인간적인 태도에서 구원받고, 고통하는 사람을 도우려면 고난당하는 사람의 고통과 그 심정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죄성 때문에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기보다, 정죄하고, 충고하고, 선생질하고 싶어 합니다. 이런 우리가 고난당하는 사람의 고통과 심정을 이해하게 하는 길은 오직 하나 이 세상에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는 겁니다.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을 가져야

우리 하나님은 당신을 대적하며 범죄 하여 원수가 된 세상을 강 건너 불 보듯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죄에 빠진 인간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죄와 사망에 빠진 인간을 걸인 취급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거역한 인간의 죄와 사망과 비참의 고통을 즐기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죄와 사망 중에 있는 인생을 긍휼히 여기서 독생하신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이 은혜로 죄와 사망의 고통에서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고난당하는 사람이 이해가 안 되면, 하나님이 죄인인 나를 긍휼히 여기셔서 아들을 주신 것을 생각합시다. 그러면 하나님 나를 아시고 아들을 주신 것 같이 고난당한 이를 이해하고 함께하려는 마음과 자세가 될 줄로 믿습니다.

 

체휼 하신 예수의 마음과 태도를

이 하나님의 마음을 갖는 것이 예수의 마음을 갖는 겁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사망의 고통을 체휼 하시려고,,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셨습니다.(히4:14,15) 우리의 고통을 당하시려고, 가난해지고, 배척당하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이렇게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셔서 구원이 되시고 시험당하는 자를 능히 돕는 구주가 되신 겁니다. 우리는 이 은혜로 사망의 고통에서 구원의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고난당하는 사람을 볼 때에 이해가 안 되면, 이 예수님의 마음을 가집시다. 그리스도인은 주님과 같이 고통 중에 있는 사람과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고통하는 세상에서 이 예수의 마음을 가지는 것이 고통하는 사람을 밟는 비인간적인 죄에서 자신을 구원하고, 주님의 형상을 닮게 할 것이요, 학대를 당하나 위로자가 없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위로가 되는 사람이 되게 할 줄로 믿습니다. 이런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이 세상에 행운일 겁니다. 그는 학대를 받으나 위로가 없는 이 세상에 예비하신 하나님의 위로이기 때문입니다.

 

참 친구 되시는 예수님을

그리고 위로자가 없는 냉혹한 이 세상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세상이 나의 고난과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고 위로하지 못해도 우리에게는 참된 친구이신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욥의 그 큰 재산과 욥의 행복이 욥의 고난을 위로하지 못했습니다. 욥의 아내도 위로가 되지 못했고, 위로하려고 불원천리 하고 온 친구들도 위로자가 아니라, 정죄자가 되었습니다. 이게 세상인심입니다. 내가 정말 어려워지고, 가난해지면, 부모도 미워합니다. 형제도 멀리하고, 친구는 벌써 멀어졌습니다, 가까운 이가 모르는 사람같이 됩니다. 도와주어도 멸시합니다. 이게 제 경험이며, 이런 때에 저의 친구와 위로자는 주님뿐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정죄하는 죄인과 세리의 친구이십니다. 주님은 실패한 베드로를 위로하고 세워주셨습니다. 주님은 약하고 의지가 없을 때의 친구이십니다. 주님은 내 억울함을 나보다 더 잘 아십니다. 고통하는 내 심정을 알아줄 이는 예수뿐이십니다. 예수는 친구를 위해서 죽은 참된 친구이십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위로받는 자가 아니라, 위로하는 자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내가 위로받아야 할 처지가 되었을 때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로 갑시다. 거기서 우리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겁니다. 제가 고난으로 외인처럼 되었을 때에 주님은 제게 이렇게 위로가 되셨습니다.

 

 

뼈아픈 눈물을 흘릴 때와               

쓰라린 맘으로 탄식할 때               

주께서 그때도 같이 하사               

언제나 나를 생각하시네                

 

내 맘의 비창함 아시는 주              

못 고칠 질병이 아주 없네             

괴로운 날이나 기쁜 때나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네               

 

언제나 주는 날 사랑하사                

언제나 새 생명 주시나니               

영광의 기약에 이르도록                

언제나 주만 바라봅니다.                

- 아 멘 -

 

 

 

 

 

 

 

 

 

'욥기 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욥, 중보자의 필요성을 절감하다!  (4) 2024.10.15
빌닷의 섣부른 신학의 처방  (4) 2024.10.06
만수 무강한 욥의 의  (4) 2024.09.19
엘리바스의 축복의 신학  (1) 2024.09.08
사랑의 막대기 아래로  (2) 2024.0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