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4,10,13, 주일
본문 : 욥 9:1-359:1-35
말씀 : 라인권목사
샬롬입니다. 지난 목요일 밤에 스웨덴 한림원이 우리 한국의 작가 한강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발표했습니다. 우리 한국문학이 노벨문학상의 반열에 이른 겁니다. 인간의 가치에 대한 한강의 작가 정신은 세계적인 평가를 받았지만, 현재 이 땅의 인권의 가치는 퇴보하고 있는 중입니다. 한강의 작가 정신이 세계적인 평가를 받은 것에 걸맞게 이 땅의 인권도 세계적이 되게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욥기 9장은 빌닷의 하나님의 공의론에 대한 욥의 반론입니다. 이 욥의 답변은 친구들을 상대로 한 말과(9:1-24)하나님을 상대로 한 독백 형식의 욥의 기도입니다.(9:25-10:1-22)이 답변의 중간에 “판결자”라는 말이 나옵니다.(33) 이 판결자를 공동번역을 비롯한 현대 우리말 역본들은 다 “중재자”로 번역했습니다. 즉 “중보자”라는 말입니다.
중보자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부조화를 조화시키는 역할을 하는 이입니다. 구약에서 백성들이 제사장의 중보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서듯,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의 사역으로 하나님 앞에 섭니다. 따라서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도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하신 겁니다.(딤전2:5) 이렇게 중보자는 기독교 자체이고, 기독교의 핵심인 것입니다.
중보자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욥
욥이 빌닷의 말에 대한 답변에서 드디어 이 “중보자”라는 말을 썼습니다. 욥이 빌닷의 변론에서 드디어 이 중보자의 필요성을 절감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욥기는 욥의 자기 의를 깨서 믿음으로 전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라고 했지요. 이게 하나님께서 오실의 고난으로 욥을 황무지로 만드신 이유입니다. 따라서 욥이 “중보자”를 필요로 했다는 것은 욥을 그리스도에게 이르게 하시려는 이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되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드디어 욥이 중보자를 필요로 한 겁니다. 이것이 마침내 “내가 알기에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욥19:25)라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게 한 것입니다.
욥이 중보자의 필요성을 절감하기 시작했다. 이게 중요합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라야 의원이 쓸 데 있습니다. 중보자의 필요를 느껴야 예수께서 중보가 되십니다. 따라서 중보자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건, 구원이 가깝다는 뜻입니다. 중보자를 찾는 것은 그가 거듭났다는 뜻입니다. 구원은 중보자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중보자를 찾는 겁니다. 욥이 이렇게 된 겁니다. 그러면 왜 욥은 친구들과 두 번째 변론에서 중보자의 중재의 필요를 절감하게 되었습니까?
고난이 야기한 인간의 절연이
첫째, 욥의 고난으로 인한 인간 간의 절연, 절벽의 상태가 중보자의 필요를 느끼게 했습니다. 욥의 고난은 친구들과 말이 통하지 않는 절연의 상태, 절벽의 상태를 야기했습니다. 의 친구들은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 같이 하나님의 사법적인 공의를 절대적 진리로 알아서 욥의 경건과 의로움에는 눈을 감고, 욥의 말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욥의 재앙을 하나님의 정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이 아무리 재앙은 하나님의 정의라고 해도 욥의 양심은 욥에게 떳떳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욥이 죄가 있다고 하면 자기 양심을 속이고 부인하는 겁니다. 이 욥의 순전함은 하나님도 인정한 겁니다,(욥1:8) 그런데 친구들은 재앙은 하나님의 정의이므로, 재앙을 받았으니 범죄자라는 겁니다. 얼마나 답답한 일입니다. 그래서 욥이 자기에게는 이런 재앙을 당할 만한 죄가 없다고 해명하면, 욥의 자기변호는 오히려 친구들에는 하나님을 불의한 자로 만드는 불경한 자가 되게 했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철면피 같은 사람이 되게 했습니다. 즉 해명하면 해명할수록 더 나쁜 사람이 되게 하고 있는 겁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절벽이 절연의 상태가 되게 한 겁니다.
1-4은 이 욥의 답답함을 토로한 말입니다. “나도 그런 줄 안다.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이 말은 엘리바스와 빌닷의 주장의 토대인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악인에게 심판으로 재앙을 내리시기 때문에 악인이 재앙을 당하고 종래는 망한다는 것을 동의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 동의는 친구들의 주장을 찬동하기 위한 동의가 아니라, 비꼬고 야유하기 위해섭니다. 너희들 말대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이 없다면 이 세상에 하나님의 정죄와 심판의 재앙을 당하지 않을 사람이 누구냐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 깨끗한 내가 재앙을 당하는 것은 의인이 복 받고, 악인이 재앙을 당한다는 진리에 역행하는 현상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의롭고 전능자이시니 악인이 망해야 하는데 왜 악인이 잘되고 의인이 고난을 당하느냐는 겁니다, 이렇게 욥이 친구들의 지론을 비꼬고 야유한 겁니다,
이게 욥의 답답함입니다, 사람이라 속을 보지 못하는 겁니다. 그 속을 버선 뒤집듯 뒤집어 보여 줄 수도 없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말하면 오해만 증폭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절벽이 되어 절연 상태가 된 겁니다. 이런 때 세상이 무어라고 하는 줄 아십니까? 하늘이 안다고 하는 겁니다. 사람과 사람이 통하지 않으면 하늘에 호소하는 겁니다. 지금 욥이 이렇게 된 겁니다. 친구들과 대화가 어긋나기만 합니다, 사람에게는 해결의 실마리가 없는 겁니다. 사람에게 절망한 겁니다. 이 절연이 중보자의 필요성을 느끼게 한 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옳으셨습니다. 이렇게 되게 하시려고 고난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욥에게 재난을 주신 목적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겁니다. 이게 고난의 유익입니다. 고난은 사람과의 절연을 야기시킵니다. 이 절연이 사람에게 해결의 실마리가 없음을 절감하여 사람에 대하여 절망하게 합니다, 사람에게 절망하지 않은 사람은 중보자를 찾지 않습니다. 사람에게서 절연한 사람만 중보자 예수를 찾습니다. 사람은 사람에게 절망하고 자기 자신에게서도 절망해서 절연되어야만 비로소 하늘을 보고 중보자를 찾는 겁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고통으로 야기되는 절연으로 사람에게 해결의 실마리가 없음을 절감하여 중보자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그리스도께 귀의하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일어나는 절연이
둘째, 욥은 친구들과의 변론에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서 일어난 절연에서 중보자의 필요성을 인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욥은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자기의 고난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없고, 오히려 오해만 증폭시키기 때문에 하나님을 상대로 말하는데 해결이 있다고 확신하여 하나님과 변론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욥이 하나님을 상대로 말하려고 하니,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가 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절감합니다. 가까이해야 하나 가까이할 수 없는 당신이더라는 겁니다, 하나님께 해결이 있어서 하나님께 말하러 나가려 하나,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때문에 나갈 수 없고 말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걸 “초절”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인식과 경험의 건너에 계십니다. 이 초절에서 욥이 하나님에서 이 절연을 절감한 겁니다. 그러면 욥에게 절연을 느끼게 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은 어떤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욥기에서 욥의 친구들이 주장하는 하나님이 공의의 하나님이라면 욥의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욥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에서 절연을 느꼈습니다. 왜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욥에게 절연을 야기했을까요?
첫째, 전능하신 하나님은 그 지혜나 능력이나 행하심이 다 전능하시기 때문입니다.(5-14) 하나님은 이 전능하심으로 해를 뜨지 못하게 하여 밤이 오게 하시고, 별을 가두어 아침이 오게 하십니다. 이분이 하늘을 펴고 바다 물결을 밟으시고, 북두성과 오리온과 황소자리를 정하시고, 측량할 수 없는 크고 기이한 일을 행하십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전능하시므로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전능하시므로 욥의 순전함도 아십니다. 이분이 아무 잘못이 없는데도 재앙으로 욥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가십니다. (12) 이게 당혹입니다. 복을 줄 사람에게 재앙을 주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당혹한 욥이 하나님께 이렇게 묻고 싶은 거지요, ‘어 하나님! 지금 대체 무슨 짓을 하고 계십니까?’(12)
그러나 이렇게 그 하나님께 물을 수가 없습니다. (14,15) 왜요, 그분은 전능하셔 지나가셔도 볼 수도 없는 분이시며, 라합 즉 바다 괴물도 복종할 수밖에 없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고, 그 하나님이 그 질문에 대답을 하셔도 감히 답변할 수 없고, 답변할 말을 찾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게 욥의 당혹입니다. 기막힌 모순입니다. 왜 전능하셔서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무죄한 내게 재앙 내려 빼앗아 가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그 하나님께 말하려고 해도 그가 전능하시니, 말할 수 없는 절연이 이루어진 겁니다. 이 하나님께 대한 절연이 이 하나님을 알게 해 주고,, 이 하나님께 자기를 중재할 중보자가 필요하다는 걸 깨닫기 시작하게 한 겁니다
둘째, 하나님이 사람을 부당하게 대우하셔도 그는 전능자이시므로 기소하여 법정으로 소환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15-24) 욥은 도덕적으로 무죄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욥에게 재앙을 주신 것은 부당한 대우, 부당한 처사입니다. 하나님은 무죄한 욥을 폭풍으로 치시고, 까닭이 없이 상처를 깊게 하시고, 숨도 쉴 수 없게 고통을 주십니다. (17,18) 이렇게 의로운 자기가 부당하게 재앙을 받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무관심 때문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므로 의인과 악인을 아십니다. 하나님께서 선악에 관심을 가지시면 그 전능하심으로 아시고, 악인이 망하고, 의인이 상 받게 하실 터인데, 하나님이 선악에 무관심하셔서 의인이나 악인을 가리지 않고 재앙을 당하게 하고, (22),(22) 세상이 악인 차지가 되어, 악인들의 세상이 되고, 재판장이 부끄러운 판결을 하는 세상이 되게 했다는 겁니다.(24) 이게 의혹입니다. 어떻게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렇게 무관심할 수 있냐는 겁니다. 그 하나님의 무관심을 따지려고 해도 하나님은 전능하시니, 의롭고 온전할지라도 이 하나님과 토론한다고 해도 이길 수 없고, 재판도 할 수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의혹이 된 겁니다. 이게 욥의 당혹입니다. 이 하나님을 알 수 없는 겁니다. 이 하나님께 대한 절연이 중보자의 필요성을 느끼게 했습니다.
셋째 전능하신 하나님이 자기를 원수와 같이 대하시니 의롭다 한들 소용없고 살아보려는 노력도 소용이 없으므로 죽음을 사모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25-35) 하나님께서 이처럼 자기를 부당하게 대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수처럼 아시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원수 같이 대하시니, 나의 날은 경주자보다 빨리 지나 다시는 행복한 날을 볼 수 없고, 빠른 배가 지나가는 것 같고, 마치 먹이를 향해 내리는 독수리 같이 대하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렇게 원수처럼 대하시니, 그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죽는 그것만이 이 고통에서 벗어 나는 길입니다. 그 하나님 앞에서는 고난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며 경배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주신이도 하나님이요, 취하신 이도 하나님이시니 여호와께서 찬송을 받으소서! 이렇게 불평을 잊고 기쁜 얼굴로 감사해도 재앙에 재앙이 더하게 합니다. (27) 고난에서 감사하고 찬양해도 용서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원수처럼 대하시니 의로워도 소용이 없습니다. 눈이 녹은 물과 잿물로 씻어서 깨끗하게 하면, 개천에 빠지게 하셔서 더럽게 하십니다.(30,31) 그래도 이 전능하신 하나님께는 토론해도 상대가 안 되고, 항변도 할 수 없고 소환도 못 하고 재판도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절연이 되어버린 겁니다.
이게 욥의 당혹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절연이 된 겁니다. 전능하심이 다가설 수 없는 하나님이 되게 했습니다. 이렇게 욥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서 감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존재임을 절감했습니다.(35) 그래서 욥은 중보자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중보자를 세워 주시고, 나를 때리시는 막대기를 치워주셔서 하나님께 두려움이 없이 말할 수 있게 해달라고 애소를 했습니다.(33-35) 이게 욥의 신앙인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욥의 믿음은 품위 있는 의인이 아니라, 가련한 죄인이 되어야만 하나님의 자비를 입고, 그리스도에게 이를 수 있음을 아는 믿음이 아닙니다. 욥은 여전히 자기 의에 붙잡혀 있습니다, 이 자기 의를 깨서 그리스도를 믿음에 이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상태입니다. ‘하나님 앞에 완전한 사람이 없는데, 하나님이 그 기준으로 사람을 대하시면 모든 사람은 다 재앙을 당할 것이 아니냐’ 이런 말을 하면서도 믿음이 아니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임을 모르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욥은 이렇게 시험이 되고 모순이 되고 당혹인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고, 그 하나님 앞에 서기를 원합니다. 그 하나님이 해결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 앞에 서도록, 그 하나님과 자기 사이를 중재할 중보자의 필요성을 느끼고 중보자를 달라고 하나님을 상대로 애소하는 겁니다. 하나님께 말하는 기도로 육박해 들어간 겁니다. 이 영적인 투쟁이 마침내 욥으로 하여금 “내가 알기에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욥19:25) 중보자 그리스도에 이르게 한 것입니다.
이걸 신앙이라고 합니다. 이런 신앙을 말하자면 극소량의 신앙, 최소한의 신앙, 흔히 말하는 기본적인 신앙입니다. 초절이신 하나님이 자기에게 절연이셔도 그 하나님께 의존하는 실낱같은 신앙입니다. 이 신앙으로 하나님께 말하는 겁니다. 이렇게 신앙은 입술입니다. 이 투쟁하는 신앙의 방법이 하나님을 상대하여 말하는 기도입니다, 이 말하는 믿음으로 그 하나님 앞에는 중보가 없이는 설 수 없다는 걸 깨닫게 했습니다, 이 입술의 방법으로 중보자의 필요성을 느끼고,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에게 이르렀습니다. 이렇게 한 사람이 중보자 예수께 이르는 믿음에 이르는 건 자동적이 아니라. 이 신앙의 투쟁이 필요한 겁니다.
은혜로 가족 여러분! 이게 우리 선하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우리가 이해 못 할 고난이 존재하게 하신 이유입니다. 고난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절연을 야기해서 사람에게 절망하여 중보자를 절감케 하고 중보자 예수를 찾게 하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고난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서 야기된 절연에서 중보자 예수를 찾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이 절연에서만 중보자를 찾습니다. 신앙은 이 절연에서 치열하게 하나님 앞에서 말하는 겁니다. 이 고독하고 치열한 신앙의 투쟁이 없이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이신 예수를 깊이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욥과 같이 고난으로 야기된 사람과 하나님과 절연의 깊은 곳에서 하나님께 말하는 믿음, 기도로 투쟁해 나갑시다. 이 신앙의 투쟁으로 중보자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께 나가게 되시고, 우리 구원이신 예수를 깊이 아는데 이르시기를 축복합니다. -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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