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4,10,6, 주일
본문 : 욥8:1-22
말씀 : 라인권목사
참 좋은 가을날입니다. 이렇게 좋은 날은 실내가 아닌 야외에서 예배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환난 중에 고통하는 있는 성도들에 너무도 쉽게 회개하라고 회개를 처방하고, 다 하나님의 뜻이니 감사하라거나, 걱정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가장 쉽게 흔히 해주는 말이 ‘기도하라!’고 기도를 처방해 주고 있습니다.
이게 욥에 대한 두 번째 공박자인 빌닷이 욥에게 내린 처방입니다. 엘리바스는 욥이 재앙을 당한 것은 인과응보라고 했지요. 이에 욥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았다, 아직도 내 의가 건재하다며 이런 내게 하나님이 재앙을 내리신 것은 부당한 처사라고 항의했습니다. 빌닷은 이런 욥과 욥의 말을 불경으로 여겨서 당장에 네 말이 광풍 같다며 네가 하나님의 공의를 굽게 하느냐며, 욥을 꾸짓어 하나님 편을 들어서 하나님의 공의를 옹호하는 옹호자로 자처하고 나섰습니다.(1-3) 그러면 빌닷은 어떻게 하나님의 공의를 옹호했습니까?
빌닷의 공의론
먼저 빌닷은 욥이 당한 고난을 분석해 주는 작업을 합니다. 욥의 자녀 십 남매의 죽음은 악인에게 내리는 공의의 하나님의 정의로운 징벌이라는 겁니다.(4) 그러므로 욥 네가 하나님께 돌아와-회개-서 전능하신 하나님께 간구하고, 정직히 행하면, 하나님께서 네 집에 평안을 주시고, “네 시작은 미약하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게 하실 것이다.”라고, 회개와 기도를 처방하고 의인이 잘 된다는 약을 처방해 주었습니다.(4-7) 정리하면 욥 네가 재앙을 당한 것은 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이니, 네가 회개하고 간절하게 기도하고, 순전하게 살면 공의로운 하나님께서 보상하셔서 그 끝이 좋게 하신다는 일장의 공의론을 강의한 겁니다. 이렇게 빌닷은 먼저 재앙이 하나님의 정의라는 명제를 제출한 겁니다.
그리고 빌닷은 이 명제를 입증하기 위해서 재앙이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이라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적 교훈이니 역사에 물어보라고 역사에 호소하고((8-10) 친절하게(?) 비유를 들어 악인의 운명을 설명해줍니다. 하나님을 잊은 악인은 왕골-파피루스-과 갈대가 물이 있다가 없어지는 데서 자랄 수 없고, 바위 위에 난 풀이 햇볕에 쉬이 마름 같이 망한다며 “보라! 하나님은 경건한 자에 대하여 원수처럼 행동하시지 않으시고, 악행 하는 자와 더불어 손을 잡지 아니하신다!“(20) 고 확정한 후에 하나님이 이렇게 정의로우시니, 네가 회개하면 네 입에 웃음을 채우시고, 너를 미워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고 악인의 장막을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이다. 라는 격려와 도전으로 강의를 마쳤습니다. 여기에 ”아멘! “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빌닷은 참 유능한 교사이고 설교자였습니다, 이렇게 빌닷은 유능하게 하나님의 공의라는 교리 하나로 욥의 고난의 신비를 풀었습니다.
빌닷의 섣부른 공의의 신학
그러나 이런 빌닷의 공의의 신학은 엘리바스의 인과응보의 법칙에서 한 발도 나가지 못한 겁니다. 악인이 벌 받고 의인이 복을 받는다, 이건 상식에 불과하고, 악인이 재앙을 받고, 의인이 축복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공의를 순전히 사법적으로만 본 겁니다, 그러나 공의는 사법적인 것만이 아닌 사랑이기도 합니다. 빌닷은 이 상식에 불과한 반쪽 진리로 욥의 고난의 신비를 풀려고 했습니다, 이게 빌닷의 오류입니다. 세상에는 이런 상식 달리 오히려 악인이 잘되고, 의인들이 안 됩니다. 빌닷은 여기에 눈을 감아 버리고, 재앙을 다 하나님의 정의라고 한겁니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의 공의는 비인격적이 되고 불의한 것이 되는 겁니다.
이런 빌닷의 공의의 신학은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욥의 고뇌를 깊어지게 만들었을 뿐입니다, 악인이 벌을 받고 의인이 복 받는 게 하나님의 정의라면, 왜 세상에서 악인이 형통하고, 죽을 때도 편히 잘 죽고, 왜 경건한 의인들이 고난을 당하느냐는 의혹을 불러일으킵니다. 이게 욥의 고뇌인데 빌닷의 공의론은 오히려 욥의 고뇌를 더 깊게 한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를 사법적으로만 아는 건, 하나님이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는 것과 모순됩니다. 재앙이 다 하나님의 심판이라면 자기 백성을 연단하고 훈련하여 온전케 하시려고 성실하게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언약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심판의 재앙이 됩니다.
따라서 빌닷의 공의론은 균형을 잃은 치우친 신학이고, 어설프고 설익고 섣부른 신학입니다. 교리와 신학은 기준입니다. 기준인 신학이 어설프고 섣부르니, 섣부르게 모든 재앙을 다 심판으로 단정했고, 섣부르게 회개하라고 회개를 처방하고, 섣부르게 기도를 처방했을 뿐만 아니라, 섣부르게 축복을 처방하게 했습니다, 시작은 미약해도 나중은 창대하리라. 이게 절대 진리라면 순교자들은 망한 겁니다. 이 섣부름이 선무당 사람 잡는다는 말과 같이,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라는 마른 땅에 이슬 같은 말씀과 공의라는 진리로 도리어 사람을 잡는 “쓸데없는 의원” 사람 잡는 돌팔이 의사를 만든 것입니다.
빌닷이 빠진 도그마티즘
그러면 빌닷의 공의의 신학은 왜 하나님의 공의를 파괴하고, 사람을 잡는 것이 되었을까요? 그것은 빌닷이 도그마티즘Dogmatism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이걸 교조주의라고 하는데, 교조주의는 교리를 절대화해서 현실과 경험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겁니다. 이게 absolutism 이고, 정치적으로 ,decretum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지금 우리 대통령이 이 decretum에 빠진 겁니다, 대통령의 권력과 행정명령 하나면 노동문제도, 의료문제가 다 해결 될 줄로 여깁니다. 그래서 야대여소 정국에서 야당을 인정도 안 하고. 여당도 대표는 빼고 자기 편만 불러서 밥 먹습니다. 빌닷이 이렇게 하나님의 사법적 공의를 절대화했습니다. 그래서 공의 하나로 모든 문제를 풀려는 독단에 빠진 겁니다. 그러면 이 도그마티즘은 빌닷을 어떤 오류에 빠지게 했습니까?
첫째, 도그마티즘은 빌닷으로 하여금 현실과 경험과 사실에 눈을 감고 애써 부인하게 했습니다. 빌닷이 욥의 자녀들이 죽음을 하나님의 정의라고 한 건 사실에 눈을 감은 겁니다. 1장의 욥의 자녀들의 생일잔치는 그들이 얼마나 경건한 자들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빌닷을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겁니다. 이걸 애써 부인 하고 있는 겁니다.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은 겁니다. 이게 빌닷의 오류이자 빌닷의 악입니다. 빌닷이 이 오류에 빠져서 욥의 순전함도 애써 부인하고 욥의 말을 듣지 않고 재앙은 하나님의 정의니 너 회개하라고 하니, 욥이 얼마나 답답할 노릇입까? 이게 도그마티즘의 악입니다. 우리가 재난을 당하는 사람을 나쁘게 보고 정죄하고 쉽게 회개를 처방하고 있다면 우리는 재앙은 하나님의 정의라는 도그마에 빠진 겁니다. 이를 악으로 알아여 합니다. 이 악을 두려워하여 도그마티즘의 악에서 자기를 구원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도그마티즘은 특정 교리를 절대화해서 일반화시키는 오류에 빠지게 했습니다. 앞에서 밝혔듯이 빌닷이 말하는 하나님의 공의는 사법적인 겁니다. 빌닷은 하나님의 공의를 벌을 주는 심판이 전부로 안겁니다, 이걸 절대적 진리로 아니, 심판의 공의를 보편화시켜서 인간이 당하는 모든 재난을 다 하나님의 저주요, 심판이라고 한 겁니다. 그래서 빌닷은 하나님의 정의가 욥의 자식들을 죽였다고 한 겁니다. 만약 욥도 함께 죽었다면 그들은 욥이 죽은 것도 하나님의 정의라고 했을 겁니다.
이렇게 공의를 절대화해서 일반화시켜서 모든 재난과 재앙이 다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이라고 하면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 되십니까? 예를 들어서 천재지변으로 무고하게 죽은 사람들, 악한 병으로 죽고 신음하는 이들, 비참한 사고사 한 이들, 교문 앞에서 교통사고 죽은 아이들은 악인이 되고, 하나님의 정의가 죽인 것이 됩니다. 이게 빌닷의 오류입니다. 정리하면 빌닷의 처벌 일방의 공의론은 하나님을 공의로운 분이 아니라, 선인과 악인을 가리지 않고 죽이는 토네이도 같은 존재로 만든 겁니다.
칼빈주의 예정론과 칭의의 교리가 비난의 대상이 되고, 만화같이 되는 것이 이 때문입니다. 예정 교리를 보편화하면 어린아이가 유괴당해 죽고, 소아암으로 죽은 게 예정이 됩니다. 은혜의 상징인 칭의론을 보편화하면 믿음과 구원이 비인격적인 자동적인 것이 되고, 성화와 상급은 복음이 아닌 것이 되는 겁니다, 특정 교리를 일반화하면 교리 자체를 파괴할 뿐만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것이 됩니다. 이게 도그마티즘의 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항상 교리적이어야 하지만, 결코 교리주의자가 되어선 안 됩니다. 이 도그마티즘은 하나님께 열심인 성도들이 빠지는 죄입니다, 교리주의를 거룩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악으로 여겨서, 이 악에서 자기를 구원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셋째, 도그마티즘은 신앙인의 인간성을 파괴하여 신앙과 종교, 인간을 돌같이 굳은 무자비한 사람과 종교로 전락 시켰습니다. 빌닷이 욥의 자녀들의 죽음을 하나님의 정의라고 한 것은 사람으로 못 할 말을 한 겁니다. 빌닷이 욥의 자식들의 죽음을 연역적으로 하나님의 정의라고 한 건,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직설적으로 말한 것 보다 더 참담하고 비참하게 하는 것입니다. 빌닷이 이렇게 차마 못 할 말을 하는 비인간적인 사람이 된 겁니다, 빌닷과 친구들이 이 무서운 말을 서슴없이 하는 건, 그게 하나님의 공의를 편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하나님을 열심히 사랑하는 거요, 하나님께 충성하는 거라는 겁니다. 그래서 주저 없이 네 자식들 죽음은 하나님의 천벌 받은 것이다, 는 무서운 말을 주저하지 않고 할 수 있는 비인간적이고 비인격적인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게 인간성을 잃은 종교의 가공함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을 하나님께 대한 봉사로 알기 때문에 죄책감이 없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요16:2) 이게 중세에 교리로 마녀사냥을 한 이유요, 지금 크리스천들이 쉽게 정죄하고 회개를 처방하는 이유입니다. 인간성, 인격성을 잃으면 진리와 교리는 흉기로 전락한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될 줄로 믿습니다.
지금 여기에 욥과 같이 큰 고난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앞에서 내가 빌닷 같이 도그마에 매몰되어 그 사람 사정을 알지도 못하면서 죄를 추리하여 고난이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이라고 훈계하고 싶어한다면, 주님은 내게 교리가 아니라, 자비를 배우라고 할 겁니다. 내가 빌닷처럼 모든 재앙을 하나님의 정의 여겨서 쉽게 회개를 처방한다면, 주님은 내게 이렇게 말씀할 겁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롬:33,34) 고난에 허덕이는 사람에게 심상히 기도를 처방한다면, 성경은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헛 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약2:15,16)라고 하십니다. 인격적 배려 없이 고난 중의 사람에게 축복을 처방한다면, 이른 아침에 큰소리로 축복하는 것은 도리어 저주 같고, 마음이 상한 자에게 노래하는 것은 추운 날에 옷을 벗음 같고, 소다 위에 식초를 부음 같도다.(잠27:14,25:20)고 할 겁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교리가 아니라, 사람이 문제입니다. 빌닷의 공의 자체는 진리이나 빌닷이라는 사람이 틀린 겁니다. 교리가 인간에 대한 애정과 배려가 있는 성숙한 사람의 입에 있으면 살리는 것이 되지만, 인간에 대한 애정과 배려 없는 비인격적인 사람의 입에 있으면 교리는 죽이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과 교리에 정통하기를 힘쓰는 그것만큼 사람이 되기를 힘씁시다. 신학자가 되기 전에 신자가 되고, 사람이 됩시다. 인간성, 인격성을 잃은 교리와 신앙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이 시간 하나님 앞에서 다짐합시다. 인간에 대한 배려가 없는 메마른 교리주의자 빌닷이 아니라, 하나님과 진리와 사람을 사랑하는 나사렛 사람을 닮은 진정한 휴머니스트가 되시기를 결단하시기를 축복합니다. -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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