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강해

그리스도에 이른 욥의 수준

아브라함-la 2025. 3. 10. 18:20

 

025,3,9,주일

본문 : 욥21:1-34

말씀 : 라인권목사

어제 도서관에서 돌아오는 길에 보니. 아직도 음지에는 눈이 있어도 골짜기의 버들가지에는 봄빛이 물들어 있었습니다. 겨울의 잔당이 오는 봄을 막지 못합니다. 이렇게 불법과 불의가 의를 막지 못합니다. 이번 주일부터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의가 봄처럼 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지난 주일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정의를 열심히 편드는 소발의 위선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소발에 대한 본문의 욥의 답변은 욥이 논리적으로 소발보다 정당하기는 하나, 욥에게 소발 못지않은 위선이 있고, 이로 하나님께 대하여 죄를 짓고 있음을 발견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19장에서 족장 시대의 이방 사람인 욥이 예수 그리스도에 이른 놀라운 신앙에 이른 걸 보았습니다. 예수는 인생의 분수령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19장이 욥의 인생의 분수령이 되었을 거라는 기대를 가집니다.

 

그리스도에 이른 욥이 소발이나 다름없어

그런데 이 예수 그리스도에 이른 욥이 기대와 달리, 본문에 있는 욥의 죄를 31장까지 계속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욥이, 그리스도를 상상도 못 하는 소발과 다름이 없다는 겁니다. 이게 예수 그리스도에 이른 욥의 수준이라는 것은 충격적입니다. 이렇게 예수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불신자나 거기가 거기인 경우가 흔합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고도 계속되는 욥의 죄는 어떤 것입니까? 그리스도에 이른 욥이 왜 이런 수준일까를 욥의 답변에서 찾아보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여전히 자기중심적인 욥

첫째, 그리스도를 아는 욥이 그리스도를 모르는 소발과 다름없이 자기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수준이라는 겁니다. 20장에서 소발은 욥에게 악인의 운명을 가장 무섭게 경고한 것은 다. 욥이 자기에게 심판을 경고하는 친구들에게 ‘너희가 일의 뿌리가 내게 있다고 한다면 너희는 심판의 칼을 두려워해야 한다.’라고 심판을 경고하는 친구들을 욥이 심판으로 받아쳤기 때문입니다. 이걸 욥의 자기기만으로 여긴 소발은 욥의 이 뻔뻔한 자기기만을 깨 주려고 악인의 멸망을 가장 극단적인 사례를 들어서 욥을 경고한 겁니다. 이런 소발의 논리를 욥은 어떻게 반박했습니까?

 

욥은 소발과 똑같은 말과 방법으로 소발을 반박했습니다. 소발은 악인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다는 자기의 주장을 입증하려고 가장 유명한 악인의 멸망이라는 극단적인 사례로 욥을 정죄하고 심판했다면, 욥은 세상의 모든 악인이 다 하나님의 재앙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가장 사악한 악인이 장수하고, 후손도 잘되고, 하나님의 매가 없어서 평안을 누리며, 하나님을 필요 없는 존재로 여기고, 기도를 비웃어도 인생을 즐기며 행복하게 살다가 평안히 죽는다는 극단적인 사례를 들었습니다. (6-16)

 

소발이 자기주장을 관철하기 위해서 극단적인 사례를 든 것 같이, 욥도 소발의 주장을 반박해서 자기가 무죄하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악인의 형통이라는 극단적인 사례를 든 겁니다. 이렇게 말의 내용, 말을 선택하는 방법도 같습니다. 이건 둘 다 똑같이 자기중심적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중심적으로 사고하고 말하니, 욥의 친구들의 말도 허공을 치고, 욥의 말도 친구들을 설득하지 못하고 허공을 치고 있습니다. 겁니다. 이는 욥이 그리스도에 이르렀는데도 여전히 자기가 살아 있다는 거지요, 그래서 자기 의를 주장하기 위해서 극단적인 사례를 끌어 온 겁니다. 이렇게 욥이 극단적인 사례로 악인의 형통을 주장한 건 뒤에서 말씀드리겠지만, 하나님이 잘못해서 악인이 형통하는 불합리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 겁니다. 욥이 자기 옳음을 증명하려고 하나님을 잘못하시는 분으로 만든 겁니다. 그리스도에게 이른 욥이 이렇게 자기중심적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를 믿으나 자기가 건재합니다. 이 자기를 건드리면 큰일 납니다. 이게 종교전쟁이 가장 잔인한 전쟁이 되게 만들고, 교회가 싸움이 나면 이전투구가 되고. 자기를 위해서는 하나님께도 망령되게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믿으나 회개하지 않고 믿어섭니다. 회개는 내가 죄인으로 죽는 것입니다. 이 회개없이 믿어서, 기도할 때는 자기를 죄인이라고 하지만, 누가 나를 죄인이라고 하면 큰 싸움이 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머리로만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중심으로 자기와 자기 의를 회개하는 겁니다. 이렇게 한 사람이 회개하고 믿어서 자기가 없는 사람이 되었을 때에 하나님과 이웃을 중심으로 사고하고 말하고 행하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될 줄로 믿습니다.

 

자기 무죄를 입증하려고 하나님을 불의하게 만듬

둘째, 그리스도에 이른 욥이 자기주장을 입증하고, 자기의 무죄함을 주장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악인에게 무관심하며, 악인이 하나님의 심판을 빠져서 나가도록 방치해 두시는 분으로 만드는 죄를 하나님께 짓고 있습니다. 6-16절의 욥의 말은 악인의 형통이라는 극단적인 사례를 들어서 모든 악인이 다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악인들에게 무관심해서 악인들이 악을 행해도 심판에서 빠져나가도록 방치하신다는 말입니다. 공자도 “天網恢恢 疎而不漏”라고 했습니다. 하늘 그물이 느슨하고 성겨 보이지만 하늘의 심판을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겁니다. 지금 욥이 이 수준도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17-26절까지 욥의 자조적인 독백 적인 질문이 시작됩니다. 사악한 자의 등불, 즉 악인은 대가 끊어져야 마땅하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적이 몇 번이나 있고, 재앙이 닥친 일이 얼마나 있고, 고통 속에 살게 하신 것 몇 번이나 되고,(17) 악인이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고 하나, 그런 적이 얼마나 되며(18) 아비에게 줄 벌을 남겨 두었다가 자식이 받게 한다는데, 본인이 받게 해야지 그게 말이 되냐,(19) 사악한 자들이 제 명대로 잘 살다 가게 하시면 그 집이 어찌 되든 무슨 상관이냐?(21)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면 안 되신다고 일러 드리고 싶지만, 누가 감히 하나님을 가르칠 수 있겠느냐고 합니다.(23) 그래서 악인도 죽을 때까지 고통 없이 잘살다 죽는데 의인은 고통 속에 죽으니, 의인이나 악인이나 죽어서 무덤에 들어가 구더기 밥이 되기는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되도록 방치하고 있다는 겁니다.

 

마치 아우슈비츠의 유대인이 신이 어디 있느냐고 종주먹을 댄 것과 다름없습니다. 이건 불신앙 정도가 아닙니다. 이건 신성모독에 가깝습니다. 그리스도에 이른 욥이 이 정도라는 건 충격입니다. 더 충격적인 건 본문 27-34절까지의 욥의 말입니다. 이 말씀은 악인이 부귀영화 권세를 누리다가 평안하게 죽으면 거창하게 장례 하고, 무덤과 비석을 기념비적으로 세워서 박정희 동상 지키듯 지키고 후세에도 존경을 받게 되니 너희가 말하는 심판은 다 헛것이다. 죽으면 그만이다고 한 겁니다. 그리스도에 이른 욥, 이 가죽이 썩으면 육체 밖에서 부활한 몸으로 주님을 보겠다는 욥이 죽음 이후의 일은 생각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실제적으로 내세의 소망이 없습니다. 이게 그리스도에 이른 욥의 수준입니다.

 

이렇게 예수 믿는 사람들이 여전히 자기중심적입니다. 자기 의를 주장하려고 욥처럼 하나님께 죄를 짓습니다. 예수 믿고 부활을 믿는다고 하면서, 천국과 천국의 소망이 분명하지 못해서 죽음 이후의 심판이나 영광을 생각지 못하는 수준입니다. 고난이 자기 현실이 되면 고난 앞에서 현재의 고난이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외치면 나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악인의 형통에 시험이 들어 의롭게 사는 것도 죽으면 그만이라고 낙심합니다.

 

이게 무엇 때문입니까? 욥이 그리스도를 믿기에 이르렀으나, 회개 없이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어도 여전히 자기가 살아 있어서 자기와 자기 의를 주장하고 있는 겁니다. 욥이 이 죄를 31장까지 계속하다가 42장에서야 비로소 입술을 가리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합니다. 욥기의 남은 이야기는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자기를 의롭게 아는 욥의 자기의 깨서 품위 있는 의인인 욥을 가련한 죄인으로 만들어 회개시키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회개 없이 수학 공식과 같이 이론적으로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 없는 믿음에는 예수님이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없으면 자기라는 틀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 수준이 믿지만, 하나님을 실제로 부인하는 실제적인 무신론의 수준이 되게 합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믿음으로 그리스도가 계시게 합시다. 이것만이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고,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은 현실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과 영원한 영광을 보게 하여 고난에서 하나님이 계획한 구원을 경험하는 실제적인 그리스도인이 되게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