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의 2장 3막은 데만 사람 엘리바스의 욥에 대한 공박입니다. 엘리바스의 논지는 “죄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라는 말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욥에게는 욥만 아는 무서운 죄가 있어서 지금 그 합당한 죄의 댓가를 받고 있다는 거지요. 이 논지는 다른 두 친구들의 기조이기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엘리바스의 논지의 정당성을 떠나서 이들이 근본적인 잘못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게 바로 이들에게는 큰 재난을 당한 친구에 대한 위로가 전혀 없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욥에게 의심을 품고 있습니다. 욥의 재난이 죄의 결과라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정죄하고, 가르치려고만 하고 있습니다. 이게 자녀 십남매를 한 자리에서 잃은 사람에게 할 짓이겠습니까?
왜 비인간적이며 비인격적인 사람이 되었을까요? 이는 그들이 사랑이라는 의무아래 있고, 사랑의 의무가 먼저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들이 사랑의 의무 아래에 있었다면 욥의 소식을 듣고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욥의 안위를 걱정했을 것이고, 정죄하고 가르치는 자리가 아니라, 욥을 동정하고, 위로하고 고통을 함께 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서령 큰 죄가 있다고 해도 친구라면 먼저 진정으로 불쌍히 여기고, 위로하는 것이 우선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나라의 근본적인 정신입니다. 사랑의 의무는 그 어떤 의무 보다 우선하며 사활이 걸려 있는 덕성입니다. 저 유명한 사랑장은 이렇게 설파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이 결여되면 가장 귀한 은사와 섬김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니! 사랑을 상실하면 천사의 말이 가공할 폭력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가 천국에 속한 사람인지의 시금석입니다. 불행을 당하는 형제를 볼 때, 내 이성과 행동을 지배하는 것이 동정과 위로의 마음이냐? 형제를 분석하고 훈계하려고 드느냐? 어느 것이 나를 지배하고 나의 반응입니까? 사랑 아래 있지 않으면, 손 마른 여인을 두고 안식일에 병을 고치나 두고 보자고 하던, 돌처럼 굳은 바리새적인 종교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물보다 인애를 원하신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믿음은 불행을 당한 형제 앞에 사랑의 의무를 느끼고, 사랑의 의무아래 자신을 두는 것입니다. 이것이 형제의 불행 앞에서 교만해져서 하나님의 심판자리에 앉으려는 자기를 구원하고, 불행을 당하는 형제들 세우는 구원의 길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빙자하여 위로가 아닌 선생질에 급급한 잔인하며 비인간적인 크리스찬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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