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바스는 욥이 죄 때문에 망했다고 단정한 후에 욥의 죄가 먼저 자녀들을 망하게 하고, 추수와 재산을 재난이 삼키게 만들고, 병들어 고생하는 신세가 되도록 만들었다는 진단을 욥에게 내립니다.(5:1-7) 이렇게 엘리바스는 욥에게 추상같은 재판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엘리바스는 자기가 욥이라면 하나님을 잘 믿겠다고 하며, 하나님을 편들어 하나님이 어떻게 구원이 되시는지를 설명하고(9-16) 하나님의 징계를 겸손히 받고 회개하면 환난을 당하지 않게 하시고, 신28:1-6같이 모든 게 축복이 되어 축복의 상태로 장수를 누리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24-27) 즉 하나님을 잘 믿으면 반드시 축복을 받는다는 것이 엘리바스의 축복의 신학입니다.
엘리바스는 꼭 지금의 축복의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들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 엘리바스의 축복의 신학은 근본적인 오해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잘 믿으면 반드시 축복을 받는다는 것은 여호와 종교의 결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이는 고난이 따르는 것이 여호와 종교의 특성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엘리바스의 축복론은 욥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 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엘리바스의 논지대로라면 욥은 하나님을 잘 믿은 사람이 됩니다. 왜냐하면 욥은 이미 그 축복을 받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을 잘 믿는 욥이 재난을 당하느냐가 설명이 안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욥의 주장과 같이 하나님이 공의롭지 못한 것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셋째, 엘리바스는 이 찬란한 축복론으로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정죄하고 심판해서 죽였다는 것입니다. 축복론은 사람을 살리기에 가장 효과적인 것이지만 엘리바스는 축복론으로 욥을 죽였습니다. 왜 이 아이러니에 빠졌을까요? 그것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는 외식주의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번영하고 형통한 사람은 믿음이 좋다, 재난이 있는 것은 죄가 있기 때문이다. 이게 예수님이 지적한 외식이 아니겠습니까? 이 외식주의가 욥의 친구들로 하여금 욥을 죄인으로 단정하게 만들고, 축복의 신학으로 사람을 잡는 선무당 같은 사람이 되게 한 것입니다.
이게 오늘 새벽 우리가 기도할 문제입니다. 부자는 믿음이 좋아 축복을 받았다! 신앙생활 잘못해서 가난하게 산다! 성공적이지 못한 사역자는 충성되지 못하고, 성공적인 사역자는 신앙이 훌륭하다! 형통하는 이는 복 받았고, 고난의 잔을 마시고 있는 이는 저주 받은 것이다! 이런 편견과 오만과 독선이 형식주의라는 외식하는 신앙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 외식을 못 박도록 기도합시다. 축복의 신학을 만병통치약으로 만드는 단편적인 신앙이 균형을 이루는 성숙한 신앙과 신학이 되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빵은 반쪽이라도 있는 것이 유익하지만 진리가 반쪽이면 코끼리가 반쪽만 있는 것 같이 유해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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