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강론

거짓 자기의 양태 게으름

아브라함-la 2019. 10. 20. 17:47

019,10,20,주일강론  

본문 : 마25:24-30 

말씀 : 라인권목사


        게으르기로 소문난 농부가 있었습니다. 그 날도 역시, 모든 식구들이 들로 나가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이 게으른 농부만이 집에 남아 시원한 마루에서 낮잠을 깊이 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잠결에 이상한 소리가 들려 억지로 눈을 뜨고 주위를 살피니, 어느 간 큰 도둑이 대낮에 담을 넘으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게으른 농부는 넘어 오기만 해라!’ 중얼거리다가 다시 잠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도둑이 ''하고 마당으로 내려왔습니다. 이 소리에 농부는 다시 무겁게 내려오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들어오기만 해라!’고 눈을 뜨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본 도둑은 주인이 깊이 잠든 줄로 알고 살금살금 농부의 옆을 지나 안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이것을 본 농부는 하도 게을러서 나오기만 해봐라!하고 일어나질 않았습니다. 얼마 후, 도둑은 안방에서 값이 나갈 만한 물건들을 한 보따리 짊어지고 문을 열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유유히 대문 쪽으로 걸어갔습니다. 게으른 농부는 대문을 열고 나가는 도둑의 뒷모습을 보며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이놈, 다시 오기만 해봐라!’여러분! 이게 게으름입니다. 게으른 사람은 눈뜨고도 자기 인생을 도둑맞습니다.


게으름은 악이다.

제가 오늘 이 유머로 말씀의 문을 여는 것은 지난 주일에 말씀 드린 알고도 행하지 않는 거짓 자기는 바로 이 게으름이라는 양태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이 게으름에 대한 많은 교훈이 특별히 잠언에 많습니다. 그러나 이 본문만큼 게으름의 본질과 악함을 생생하게 드러내는 말씀은 없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우리가 잘 아는 달란트 비유입니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은 장사해서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 받은 종은 두 달란트를 남겨서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과 상을 받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종은 묻어 두고 놀다가 주인이 와서 회계를 볼 때 한 달란트를 내밀었습니다. 이때 주인 이종을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은 우리 주님께서는 게으름을 단순한 악습이 아닌 으로 규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게으름의 악성을 강조하신 겁니다. 주님은 게으름을 악한 죄로 정죄하신 겁니다. 그러면 왜 주님은 이렇게 게으름을 악이라고 규정하셨을까요?

 

삶의 시간 인생의 기회를 상실케

첫째, 게으름은 하나님이 주신 삶의 시간이라는 삶의 기회를 낭비하고 상실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달란트 비유를 보면 시간에 대한 몇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 시간은 인생의 기회라는 것입니다. 달란트를 받은 종들의 시간은 주인 돌아올 때까지이고, 이 때가 자기의 달란트를 장사해서 남길 기회였습니다. 이 시간은 주인에게 자기의 능력을 나타날 기회이고, 자기의 장래를 예비하는 기회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게 시간, 즉 기회를 공평하게 주시는 것입니다. 둘째, 이 시간, 이 기회는 한정적이고, 미지적이라는 것입니다. 주인이 올 때까지로 한정되었는데, 주인이 올 때를 모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도 죽을 때까지 시간이 한정적인데 우리는 그 시간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 시간의 특성이 부지런 한 사람을 더욱 부지런하게 만들고, 게으른 자는 더욱 게으름을 부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셋째, 인생의 날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오자 한 달란트를 그대로 낸 이 게으른 종은 쫓겨났습니다. 다시는 기회가 없습니다. 이렇게 게으름은 인생의 기회를 상실하게 합니다. 게으름이 죄악인 것은 게으름은 삶의 기회를 잃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만은 회복이 불가능합니다. 이 악함 만은 만회할 수가 없습니다. 시간, , 기회가 다시없기 때문입니다. 시간, 기회가 없으면 살 수도 없고, 무엇을 할 수 도 없습니다. 만회가 불가능 하게 만드는 것이 게으름입니다.

 

그래서 추구에 少年以老 學難成이라고 했습니다. 소년은 늙기 쉬우나 학문은 이루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공부할 기회에 공부하지 않으면,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 일할 나이에 근면성실하지 않으면 노년에 천하게 됩니다. 인생이란 부지런해도 시간이 부족한 것이 인생입니다. 우리 인생의 기회를 잃어버리고 결국 후회하게 만드는 게으름은 악입니다. 이런 악신, 악성, 악습은 없습니다. 지금 세월을 허송하고 있으면 그 자기가 악신사탄과 악성원죄와 악습으로 된 거짓자기로 아셔야 할 줄로 믿습니다.

 

자신의 자산인 재능이라는 가능성을 사장시킴

둘째, 게으름은 달란트라는 인생의 자신인 재능이라는 가능성을 사장시키는 악이기 때문입니다. 이점을 이 비유가 강조합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그 재능대로 달란트를 맡겼습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 받은 종은 자기들의 재능을 최대한으로 발휘했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자기 재능을 땅에 묻어 둔 것입니다. 장사하는 것과 묻어두는 차이가 무엇입니까? 이 차이를 주님은 착하고 충성됨” “악하고 게으름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두 단어를 비교하면 충성되다는 말은 부지런하고 성실하다는 거지요. 즉 부지런함과 게으름의 차이입니다. 부지런한 사람은 자신의 재능을 써서 발전시킵니다. 그러나 게으름은 자기의 달란트, 가능성을 사장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처럼 무서운 악이 어디 있습니까? 이것은 악신 들고, 악성이며 악습입니다.

 

이렇게 우리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달란트라는 재능을 자산으로 주셨습니다. 여기에 인생의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이 재능을 얼마나 사용하느냐에 걸려있습니다. 캘리포니아 대학교 심리학 교수인 길포드는 사람은 통상 자기 뇌기능의 30%정도 사용한다고 합니다. 겔럽은 보통 사람은 2-3% 정도를 평생 사용하고, 아인슈타인이 15% 사용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2-3%만 사용해도 평균은 됩니다. 15%의 뇌를 사용하면 천재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무한한 자산이 있습니다. 무한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 수준으로 살까요? 우리 속담에 열 가지 재주 가진 사람 끼니 간 곳 없다.”라는 말이 이런 뜻입니다. 재주가 많지만 게을러서 단 한 가지도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게으름이 이렇게 악한 것입니다. 자신의 가능성을 사장시키는 것! 이것같이 악령 들고, 죄악적이며 악습은 없는 줄로 믿습니다.

 

힘과 정력을 소비적인 정욕에 사용케 함

셋째, 게으름은 힘과 정력을 부정적으로 정욕에 쓰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왜 한 달란트 받은 종이 달란트를 묻어 두었습니까? 그것은 일하는 것은 힘들고 노는 것은 편하기 때문입니다. 이게 게으름입니다. 게으름의 본질은 힘 드는 것을 싫어하고 편하고 싶은 것입니다. 편 하려고만 하고, 힘들지 않으려고만 하고, 즐겁고, 좋고 재미있으려고만 하는 것이 게으름입니다. 이게 육체요, 육신의 정욕이라고 하고 향락이라고 합니다. 육체는 편하고 힘들지 않고 즐거운 것만을 원하는 것입니다. 게으름은 이 육체를 따라서 이 육체의 정욕을 채워주는 것입니다.


 이 게으름이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자기의 힘과 정력을 노는 데만 사용하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므나 비유에서 달란트를 묻어두고, 장사하는데 쓸 힘과 정력을 먹고 마시고 취해서 종들을 때리는 데에 사용했다고 했습니다. 낚시 좋아하는 사람이 콩 심으라고 하니 콩 한말을 한곳에 묻어 두고 낚시했다지요? 우리가 이렇게 성경에 쓸 힘을 오락에 쏟고, 공부에 쓸 힘을 놀이에 쏟고, 사업에 쓸 힘을 향락에 쏟으니 망합니다. 이게 악한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사람을, 곧 자기를 자꾸 나쁘게 만듭니다. 더 육신적, 더 정욕적이 되고, 인격과 신앙이 자꾸 나빠집니다. 여러분! 이렇게 무서운 악이 없습니다. 이것보다 더 악한 것, 악령과 악성과 악습이 없습니다. 이 자기를 원수로 삼아야 합니다.

 

다가오는 미래의 책임을 알면서도 본분을 행하지 않음

넷째, 게으름은 다가올 미래의 책임을 알면서도 본분을 행하지 않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다섯과 두 달란트 받은 종들은 왜 부지런하게 열심히 장사했을까요? 주인이 오는 날 결산을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에 따라서 자기 대우와 장래가 달라진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부지런하게 장사했습니다. 이것이 더위와 추위를 무릅쓰고 일하게 했습니다. 그러면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이것을 몰랐을까요? 주인이 올 줄 모르고, 그때 결산보고, 책임져야 하는 것, 그리고 그 결과에 자기 대우와 장래가 달려있는 것을 몰랐을까요? 알았습니다. 아는데 왜 못합니까? 게을러서입니다. 게을러서 미루기만 하고, 게을러서 착수 안하고, 게을러서 그때 어떻게 되겠지! 이러고 노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지요. 우리는 자기의 본분을 압니다. 그 본분에 따르는 책임을 압니다. 그리고 본분을 하지 않는 결과를 압니다. 그런데도 이 게으름 때문에 공부하지 않고,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안하는데 무엇이 될 수 있습니까? 해야 됩니다. 공부도, 사업도, 신앙생활도 성화도 해야 됩니다. 이걸 알면서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합니다. 왜요, 게을러서입니다. 여러분! 이 게으름! 정말 악신, 사탄이든 것이며, 이게 원죄 악성으로 된 것이요, 악습입니다. 이게 옛 자기, 거짓 자기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 게으른 거짓자기 때문에 안 되는 것입니다. 이 자기를 원수로 압시다. 이 자기를 원통이 여깁시다. 이 자기를 참회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원수 게으름의 실상

우리가 이 원수 게으른 거짓자기를 잡으려면, 내게 이 거짓자기가 어떻게 나오는지를 알아야합니다. 내가 게으른지, 얼마나 게으른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원수, 게으름이라는 거짓 자기는 어떻게 나타날까요? 이걸 한 달란트 받은 종이 여실히 보여주지만, 이 한 달란트 받은 종의 게으름의 실상을 주석해 주는 성경이 잠26:13-17입니다. 이 잠언을 통해서 한 달란트 받은 종의 게으름을 분석해 봅시다.

 

부정적으로 안 된다고 판단하게 함

첫째, 게으름은 일의 결과를 부정적으로 보아서 안 된다고 판단하게 만듭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이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두고 놀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이 종은 주인이 엄한 사람이라서 장사하다가 원금에 손실이 올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즉 이 사람은 일의 결과를 긍정적으로 본 것이 아니라 부정적으로 실패할 수도 있다고 보았습니다. 문제는 그가 왜 안 된다고 실패를 두려워했느냐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된다고 성공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안된다고 실패를 생각하고 실패를 두려워했습니다. 이것이 그가 재능이 없어서 입니까? 한 달란트 맡길 재능이 있었지요? 그리고 그의 말대로 주인이 엄했습니까? 남긴 종들에 주는 것 보세요. 후하되 후했습니다.

 

그런데 이 종은 왜 부정적으로 실패를 보고 실패를 두려워했을까요? 일하기 싫어서입니다. 게으름은 일하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일은 힘들기 때문입니다. 될 일이라고 생각하면 하면 될 것 이니까 그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힘이 들고, 고생이고, 괴롭습니다. 그러니 일을 안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안된다고 해야 합니다. 안 될 일을 왜 하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 26:17절에 게으른 자는 사리에 맞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이성적 동물이라서 무엇을 하기 전에 그 일에 대한 이론적 토대를 먼저 만듭니다. 그래서 힘들기 싫고 편 하려는 게으름은 먼저 안 된다라는 합리적 토대를 설정하는 것입니다. 이게 사리에 맞게 말하는 일곱 사람보다 자기를 더 지혜롭게 여기는 것입니다. 게으른 것도 악인데 그 게으름을 피울 근거를 만들기 위하여 매사를 안 된다!’ 고하는 건 정말 악한 것이지요. 따라서 게으름은 자기를 나태하게 할 뿐만 아니라, 자기 인격을 부정정적으로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게으름을 피울 수록 사람이 자꾸 나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매사를 부정적으로 안 된다고 하면 그건 내가 게으르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부정적으로 안 된다고 하는 이 자기 나오면 사탄아 물러가라! 고 합시다. 그 자기를 죄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핑계를 찾고 만드는 것이

둘째, 게으름은 핑계를 찾고 만들게 하는 것입니다. 이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이 엄해서 어떤 일이 있어도 원금에 손실을 보면 안 된다. 손실을 볼 바에는 차라리 노는 게 낫다! 이렇게 핑계를 만들었습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잠언26:13절은 이 게으름의 정곡을 찔렀습니다. 게으른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하느니라22:1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게으른 자는 말하기를 사자가 밖에 있은즉 내가 나가면 거리에서 찢기겠다 하느니라일하기 싫으니 핑계를 만드는 것입니다. 추워서 얼어 죽겠다! 더워서 더위 먹겠다, 비와서 젖겠다! 힘들어 죽겠다, 다 나를 찢어 죽이는 것으로 만듭니다. 이게 게으름입니다.

 

제가 어릴 적에 비가 올 듯하는데, 어머님이 일시키면 비오면 어떻게 하냐고 하는 제게 어머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이 놈아! 날이 궂으려고 하면 부지런한 사람은 일하기 좋고, 게으른 놈은 놀기 좋다!’고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비가 오려고 하면 부지런한 사람은 급해서 비 오기 전에 하려고 더 열심히 합니다. 그러나 게으른 사람은 비 오려고 하면 그게 핑계가 되어서 할일 안하고 마음 편하게 노는 것입니다. 이렇게 게으름은 핑계를 만듭니다. 이 핑계를 찾으려고 하고, 핑계를 만들고 핑계를 대려고하면, 이게 옛 사람, 거짓자기인 줄로 아십시오. 이 자기 때문에 지금 기회를 잃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원수로 알고 원통히 여겨 참회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해태하고 안일한 것

셋째. 게으름은 해태한 것입니다. 26:14절을 봅시다.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서 도는 것 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도느니라잠은 휴식이지만 게으른 잠은 죽음에 이르는 것입니다. 인생은 삼분의 일을 침대에서 보냅니다. 결국 인생은 얼마나 잘 자고, 덜 자느냐에 걸려있습니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많이 잡습니다. 늦잠은 게으른 증거입니다. 아침에 일하면 하루가 효과적이 되고 길어집니다. 늦잠은 해태요 안일함에 빠진 것입니다. 이게 악한 것입니다. 아침에 승리하지 못하는 이 자기를 원수로 여깁시다.


대가를 지불하기를 싫어 함

넷째, 게으름은 대가를 지불하기를 싫어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26:15을 보세요.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싫어하느니라무슨 뜻입니까? 힘들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대가를 지불하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힘들지 않고 되는 일은 없습니다. 공짜는 없습니다. 다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일의 대가를 괴로워하고, 싫어하는 것이 게으름입니다. 대가를 내지 않으려는 것, 자기만 편 하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게으름은 이기적인 것입니다. 내가 내 몫의 수고를 하지 않으면 결국 다른 사람에 부담이 됩니다. 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집안에 일하지 않고 바람 잡는 사람이 있으면 다른 가족의 부담이 되어 불화가 일어나는 겁니다. 게으름은 이렇게 비윤리적이고, 이기적인 것입니다. 이 게른 자기! 이것이 우리 육체적 방면과 영적인 방면을 빈궁하게 합니다. 이게 금생과 내생을 궁하게 만듭니다. 세상에 이런 원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악령과 악성과 악습으로 된 거짓 사람, 거짓자기, 옛 사람입니다. 거짓자기는 이 게으름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은혜로 가족여러분! 게으른 사람은 눈 뜨고도 도둑 맞습니다. 도둑이 담을 넘는데 들어만 와 봐라!”고 게으름 부리고 있다가는 도둑이 집안의 값나가는 물건 한 자루 메고 나가도 다음에 오기만 해 봐라!”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게으르면 눈뜨고 인생을 도둑맞습니다. 게으름은 인생도둑입니다. 지금 게으름이라는 인생도둑이 담을 넘어오려고 하거나, 마당에 들어왔거나, 마루로 올라오고 있지 않습니까?


도둑을 어떻게 잡습니까? 도둑이 담을 넘으려고 하면 큰 소리로도둑이야! 도둑이야! 저 도둑 잡아라! 이렇게 고함을 쳐쫒아야 합니다. 게으름이라는 내 인생의 도둑이 담을 넘으려고 하면, 도둑이야! 합시다. 아이쿠! 이 거짓자기!이렇게 정죄합시다. 그러면 이 게으른 거짓자기는 쫓겨나고, 죽습니다. 게으름의 인생도둑이 담을 넘어 마당에 들어왔습니까? 그 도둑을 무엇으로 잡습니까? 몽둥이입니다. 게으른 자기는 십자가 나무 몽둥이 들고 때려잡을 존재인 줄로 믿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때려잡으려고 해도 내 힘이 부족해서 못 당하면 112로 전화하는 것 같이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도와 달라고 기도합시다. 그러면 위로부터 이 원수 게으른 자기 잡는 십자가의 능력과 성령의 능력이 임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이걸 못해서 아직도 게으른 자기 잡지 못해서 나도 만족치 못하는 인생을 사는 것을 이 시간 하나님 앞에 통회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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