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강론

모임에 승리하는 성도(2)

아브라함-la 2019. 8. 11. 19:27

019,8,11, 주일강론  

본문 : 히10:19-25

말씀 : 라인권목사


       말복 더위에 강건들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번 주에 광복75주년을 맞는 광복절을 맞습니다. 저는 우리가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않는 것이 이 땅에 참된 광복과 통일을 이루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참 자유자로 살아서 이 땅의 온전한 광복을 이루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산토리니의 개인교회

제가 가고 싶은 나라 가운데 그리스가 있습니다. 이 그리스의 유명 관광지 가운데 영화 맘마미야로 더욱 유명해진 산토리니라는 에게 해에 떠있는 아름다운 섬이 있습니다. 이 섬은 하얀 집들로 이루어진 마을 풍경과 낙조로 유명합니다. 온통 하얀 집들로 이루어진 이 섬 마을을 인상 깊게 하는 것이 이 마을의 교회입니다. 마을이 온통 흰색인데 희랍 정교회풍의 둥근 종탑만 파란 하늘색이여서, 하얀 마을의 포인트가 되어 그 아름다움을 더해 주고 있습니다. 제가 이 섬의 사진을 보다가 이 작은 마을에 여러 개의 교회가 있는 게 참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이 작은 섬 마을에 왜 이렇게 교회가 여러 개가 있는지 검색을 해보았더니, 이 교회들은 다 개인교회 랍니다. 은혜 받은 사람이 그 은혜를 기념하기 위하여 교회를 지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에 헌금도 없고 교회를 지은 그 집안이 운영하고 있답니다.

 

자기 영적 취향에 맞는 교회를 가지려하는 사람

제가 오늘 이 산토리니섬 마을의 개인교회 이야기로 오늘 말씀의 문을 여는 것은 오늘 본문 25절에 대한 주석의 황제로 불리는 칼빈의 해석을 소개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칼빈 선생이 이 말씀을 어떻게 주석한지 아십니까? 칼빈은 25절의 모이기를 폐하는 습관을 사람은 다 자기 교회를 하나씩 가지기를 원 한다.”고 해석했습니다. 즉 사람들은 자기에게 맞고, 자기에게 좋은 자기만의 교회를 가지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이걸 취향이 라고 합니다. 각 사람이 자기의 영적인 취향을 따르는 것이 결국은 모이기를 폐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모이기를 폐하는 습관 두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모이지 않으려는 걸 교리적으로 합리화 하려는 것과,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을 교회보다 더 의롭고 성결하게 여기는 주관과 교만이 모이기를 폐하는 습관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 두 가지 핵심은 무엇입니까? 바로 자기중심적이며 주관적이라는 겁니다. 칼빈의 해석은 바로 이 정곡을 찌른 것입니다. 자기 취향을 만족시키려고 하는 자기중심이, 자기 교회를 가지기를 원하게 하고, 이 영적인 취향이 모이기를 폐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렇게 사람들이 각자 자기의 교회를 하나씩 가지기를 원하게 만드는 영적인 취향이 어떻게 나타나는 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첫째는 영적인 취향은 교리적으로 나타납니다.

이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주님이 암탉이 날개아래 그 새끼를 모음과 같이 하셨지만 주님께 속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배척한 것이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그것은 그들이 보수적인 것이 그들의 취향에 불과 했고, 예수님과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들의 취향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예수님이 자기들이 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가까이 하고, 율법의 은혜를 드러내시는 것이 그들의 취향을 거슬렸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먹기를 탐하고, 마시기를 즐기고,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라고 배척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암탉이 날개 아래 그 새끼를 모음과 같이 하려고 해도 끝내 듣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교리적 취향이 모이기를 폐하는 근성이 된 것입니다.

 

왜 개신교는 분열 했나

이렇게 교리적인 취향을 중심하는 것이 모이기를 폐하는 근성임을 종교개혁이후 개신교의 분열에서 여실히 입증되었습니다. 개혁자들이 종교개혁을 한 것은 취향이 아니라 진리와 교회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들은 은혜를 회복하고 참된 교회를 회복하기 위하여 순교도 했습니다. 이건 취향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사랑입니다. 취향을 위하여 죽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이후 루터 파를 시작으로 재세례파와 쯔빙글리 파로 사분 오렬했습니다. 이건 사실 진리를 지키기 위한 것보다는 자신의 입장과 영적인 취향을 따른 것입니다. 루터는 복음적이었지만, 소심하고, 보수적인 사람이라서 예배형태는 천주교 형태가 그에게 맞았습니다. 이게 루터 교를 만든 겁니다. 칼빈도 마찬가집니다. 칼빈은 교황에 대하여 요즘말로 말하자면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민주적이여야 한다!”장로주의를 주장한 것입니다.

 

쯔빙글리는 과격하고 극단적입니다. 이런 사람은 전부가 아니면 안 되는 사람입니다. 흑이거나 백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의 우상숭배를 청산하기 위하여 성상만 아니라, 십자가도 파괴했습니다. 성찬도 영적인 상징에 불과하다고 해서 결국 쯔빙글리파가 생겼습니다. 이런 그의 과격함이 스위스에서 로마교를 지지하는 산지 주의 영주들과 전투를 벌이다가 전사했습니다. 이런 쯔빙글리의 영적인 취향이 분열하게 만든 것입니다. 근세도 마찬가집니다. 왜 감리교가 생겼습니까? 웨슬리는 교회에서 민주제의 혼란이 싫었고 장로교의 경직성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자기의 취향에 맞는 감독제도의 감리교를 만든 겁니다. 후에 이것이 사중복음이라는 특정교리를 강조하는 성결교로, 성결교는 나사렛이니, 순 복음이니 하는 것으로 분열했습니다. 이는 성경에 자신을 맞추기보다 자신들의 특정 교리적 입장과 취향에 따른 것입니다. 이것이 개신교에 많은 교파가 생겨나게 한 것이지요. 이 근성, 이게 바로 자기교회를 갖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 취향이 모이기를 폐하는 겁니다.

 

교리적인 취향이 어떻게 나타나나?

이런 교리적인 취향이 지금우리들에게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어떤 교인들은 축복이니 평안이니 성공이니 하는 복음의 긍정적인 면만을 선호합니다. 자기 취향이 아닌 복음의 결단과 순종을 요구하는 말씀은 율법적이라고 하거나 딱딱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복음의 자기 부정과 순종이 취향인 사람은 축복이니, 평안이니, 성공이니 하는 것을 기복주의라고 반대합니다. 자기 취향만 신앙적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다 자기가 중심입니다. 자기 좋은 것만을 들으려고 합니다. 듣고 살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듣는 것, 아는 것을 즐기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영적인 취향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런 자기 영적인 취향이 한 지 교회에 속해 있으면서도 자기취향에 맞는 교회를 갖고 싶어 하기 때문에 결국은 모임을 소홀히 하고, 모임을 폐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이렇게 자기의 영적인 취향을 따르는 것은 결국 예배가 아니라 자기를 예배하는 겁니다. 자기 숭배입니다. 이게 우상 숭배입니다. 이건 고상한 종교 놀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자기를 부인해야 참된 예배자가 되고 참된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이 자기를 부인해야 온전한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가 되고, 모이기를 즐거워하는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거룩해 보이는 진리에 대한 취향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진리에 대한 취향마저도 부인할 때 모임에 성공하고 온전한 교회의 지체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둘째, 영적 취향은 예배의식으로 나타납니다. 즉 자신이 좋은 방식과 취향으로 예배하려는 하는 것이 자기만의 교회를 가지게 하려하고, 모이기를 폐한다는 겁니다. 요즘 우리 개신교는 출석이 줄고 있는데 천주교는 늘고 있습니다. 왜 현대인이 천주교에 매력을 느낄까요? 그건 개신교의 난립과 비의전적 예배가 값싸 보이고, 천주교의 일관성과 제의적인 예배가 종교적 신성과 엄숙성을 느끼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걸 선호해서 천주교를 가는 것입니다. 제가 노회장 때 여름성경학교 강습회 개강예배를 사회했는데 그때 강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기가 많은 교회들을 다니는데 부흥하는 교회와 부흥하지 않는 교회의 차이점이 있는데 부흥하는 교회의 찬양은 테크노 풍인데, 부흥하지 않는 교회의 찬송은 장송곡 풍이라고 했습니다. 현대인은 느린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테크노 풍으로 찬송하는 교회가 젊은이가 많고 부흥한다는 겁니다. 이건 무슨 이야기입니까?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종교적 취향을 만족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사실은 자기를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좋은 예를 김남준 목사의 책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저자가 전도사로 일할 때 찬양에 은사가 있고 찬양을 열정적으로 잘 인도하는 형제가 있었답니다. 이 친구는 찬양을 인도할 때는 얼굴이 상기되고 열정적으로 찬양을 인도하다가 말씀 시간이 되면 졸고 있답니다. 그리고 말씀이 끝나면 어제 졸았냐는 듯이 열정적으로 황홀한 표정으로 찬양합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이 사람은 찬양을 해야 살아납니다. 그러나 말씀에는 죽습니다. 왜요 찬양은 자기에게 맞고 좋습니다. 그러나 사고를 요하는 말씀은 싫습니다. 그래서 말씀시간에는 졸다가 찬송할 때는 살아납니다.

 

이와는 반대로 현대풍으로 찬송하고, 비의전적인 예배를 질색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 사람에는 이게 예배를 모독하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전통적인 예배를 갱신하려고 하면 못 견딥니다. 그런 교회를 속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 양자들은 다 같이, 공히 자기 취향을 고집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의 이 취향을 채워주는 예배를 줄이거나 바꾸면 고든 맥도날드의 베스트셀러의 용어로 내 교회를 도둑맞았다.”고 할 것입니다. 이것이 모이기를 폐하는 겁니다. 이것이 헌신 하던 교회를 떠나게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임에 성공하려면 이 자기 취향대로 예배하려는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이 자기가 살아 있으면 자꾸 자기에게 맞는 예배, 교회를 찾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모임을 페합니다. 그러므로 이 자기를 예배 하려는 이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모임에 성공하시고 예배에 성공하여 예배가 행복의 샘터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셋째, 이 모이기를 폐하게 하는 영적인 취향은 교회의 행정과 사역에서 자기중심적인 교회를 원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자기만의 교회를 원하고 이것이 모이기를 폐하게 하는 겁니다. 우리 총신에서 교회사를 가르치셨고, 우리교회에도 오셔서 강론하신 적이 있는 김명혁목사가 있습니다. 이 분에게 장로님 한분이 자신의 사재로 당시 일억이 넘는 거액을 드려서 교회를 건축해 놓고 김 목사님을 청빙했답니다. 제가 총신 입학 할 때가 79년도입니다. 그때 김 목사님은 지금 강변교회를 개척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칠십 년대 중반쯤이겠습니다. 그때 삼백만원이면 서울에서 집을 샀습니다. 일억이면 정말 거액이었습니다. 대단한 헌신이지요? 그래서 김 목사님이 가서 하나님 중심, 성경중심, 교회중심 목회를 하니 교인인 110명이 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팔 개월이 되는 어느 날 이 장로님이 조용히 목사님을 찾아와서 지금의 교회는 자신이 원하는 형태의 교회가 아니니 나가 달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다음주일에 교회 중심의 교회가 되라고 권하고 조용하게 나왔답니다. 그 장로님은 행정과 사역에서 자기와 자기 가족중심의 교회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자기 교회를 하나씩 가지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 근성이 모이기를 폐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이 중직자들만 아니라, 많은 교인들이 교회의 행정과 사역이 자기중심, 자기 방식, 자기 스타일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되지 않으면 불편합니다. 교회를 빼앗긴 것 같이 생각합니다, 이것은 자신이 교회에 속하려고 하기보다 자기가 교회의 지배하는 왕이 되고자 하고 자기가 주인이 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자기 교회를 만들려고 합니다. 이것이 교회를 불편하게 하고, 교회를 분열케 하고, 모이기를 폐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이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 중심이고 교회를 중심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모이기를 폐하는 이 근성이라는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 중심이 되시고 교회 중심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모임에 성공하시고 예배에 성공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습관을 교회는 어떻게 도와야 하는가?

그러면 이 모이기를 폐하는 습관에서 승리하고 힘써 모이도록 교회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본문에 분명한 방법이 있습니다. 오직 권하여” “더욱 그리하자고 합니다. 서로 돌아보고 격려하고 권하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육신은 자꾸 영적으로 나태하고 해이지려고 합니다. 자꾸 하나님과 교회 중심이 아니라 자기와 자기 취향을 따르게 합니다. 이것이 모임을 폐하면 결국은 은혜를 헛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때 교회는 서로 돌아보라는 겁니다. 격려해 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열심을 내라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필요성이며, 교회의 역할인 것입니다. 칼빈은 구원 받은 성도들에게 잔재하는 죄성이 너무 비옥해서 방치하면 은혜를 헛되게 하는 자리에 이르므로,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워서 양육하고, 감독해서 온전해지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한 지체가 모임을 모이기를 폐하는 것을 보면 그 영혼을 위하여 형제의식을 가지고 걱정하고, 찾아가고 권하고 격려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에 그 교회가 비로소 목회적이 되는 것입니다. 게을러지고, 나태해지는 성도를 권해서 세우는 것, 이게 교회입니다. 교회를 이렇게 인식해야 합니다. 이 인식이 성도들을 목회적이 되게 하고, 목회적인 교회가 되게 합니다. 교회가 이렇게 육신의 약함을 권고할 때에 교회가 한 지체라는 인식과 형제의식을 가지게 됩니다. 이 사랑의 관심과 섬김이 냉담한 성도라도 자신이 귀중한 교회의 일원으로 인식하게 되고 맴버쉽을 가지게 되고 힘써 모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교회의 분위기가 은혜로운 교회가 됩니다. 이런 교회를 사랑이 있다고 합니다. 이 사랑이 있어야 냉냉한 세상에 시달린 사람들이 교회를 찾는 부흥이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이 교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게 먼저 믿은 사람과 직분자들의 사명입니다. 직분자들과 먼저 믿은 분들이 이 사명을 감당해주야 모임이 강한 교회가 됩니다. 제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섬기던 교회에 부임해서 구역예배를 기존의 예배형식에서 성경공부 형식으로 갱신을 했습니다. 이를 위해서 구역장들을 순장이라고 이름을 바꾸고, 훈련을 시켜서 구역을 맡겼습니다. 그분들 중에 김종필이라는 여집사님이 계셨습니다. 이분은 토요일 오후가 되면 자기구역 식구들을 집마다 심방하며 마을을 한 바퀴 돕니다. 그리고 상황을 목사에게 알려서 심방이 필요한 곳은 심방하게 합니다. 그리고 주일에는 아이들을 심방해서 데리고 나옵니다. 이분은 정말 작은 목자가 되었습니다. 그 구역이 살고, 주일학교가 부흥했습니다. 우리 교회 집사님들이 주일학교 선생님들이 이렇게들 하신다면 우리교회가 어떻게 될까요? 정말 목회적인 교회가 되고, 형제애로 뭉친 교회가 되어서 모임이기를 사모하는 강한 교회가 되고 따뜻한 분위기가 되고 예배가 살아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고 하셨습니다. 그날을 재림 날을 말합니다. 재림이 가까울수록 세상은 험해지기 때문에 더욱 모임이 필요하고, 예배에서 은혜를 받아야 한다는 승리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행복의 샘터가 되지 않으면 우리는 세상과, 죄와 자신을 이길 수 없습니다. 예배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삽니다. 주님 언제 오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주님이 주일날 오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주님 오시는 그 주일에 내가 교회에 있지 않고 세속적인 자리에 있으면 어쩌겠습니까? 그러므로 모임에 열심을 냅시다. 서로 모이기를 권합시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은혜가족들은 모이기를 폐하려는 자기와 영적인 취향을 못 박도록 서로 서로 격려하여 이 마지막 때를 예배의 은혜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하고,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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