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9,10,27,주일강론
본문 : 딤전5:6
말씀 : 라인권목사
11월을 맞는 시월의 마지막 주가 되었습니다. 금년의 영적 추수를 위해서 더욱 은혜를 사모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래 전에 양구목사님이 팔라고 꿀 한말을 보냈습니다. 이 꿀을 몇 군데 나누어 드리고 남은 것을 베란다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꿀이 필요해서 가보니 꿀통에 개미들이 빠져 죽어있었습니다. 제가 꿀을 덜고 뚜껑을 제대로 닫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개미들이 겉에 묻은 달콤한 꿀을 먹다가 양이 차지 않아서 아예 꿀통 안에 들어가서 꿀을 먹다가 그 달콤한 꿀에 빠져 죽은 것입니다. 이렇게 꿀통에 빠져 죽은 개미들을 보며 사람이 이 곤충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걸 보며 에이즈가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에이즈에 대한 공포가 없는 것 같습니다만 한때 우리 사회에 에이즈 공포가 사회적인 현상이 된 적이 있습니다. 공동화장실에 가면 반드시 에이즈에 대한 경고가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 “후천성면역결핍증”이 한창 기세를 올릴 때에 저는 이 지구에서 음행이 현저히 줄어들 줄로 알았습니다. 만약 음행으로 이 병에 걸리면 인생과 생명을 동시에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런 에이즈의 위험이 있는데도 이 세상은 이 음행의 죄가 감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가 정치생명을 잃기도 하고, 고위직 인사들이 이런 문제에 연루되어 있고, 심지어 사역자들도 넘어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렇게 에이즈의 위험에도 음행이 감소되지 않고 증가하는 것은 인생이 얼마나 향락적인지를 폭로해 주는 것입니다.
일락은 게으름의 자식
오늘 제가 이 은혜 되지 않는 이야기로 말씀의 문을 여는 것은 오늘 본문이 말씀하고 있는 일락, 즉 향락이라는 것은 지난주일 말씀드린 게으름의 자식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건 저 문호 톨스토이의 지론입니다. 톨스토이는 사람이 음행에 빠지는 이유를 물질적인 풍요로 너무 잘 먹어서라고 했습니다. 부자여서 미식에 호식하면 영양이 과다라서 정욕이 넘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욕이 넘치는데 부자들은 자기가 일하지 않기 때문에 할 일이 없습니다. 게을러지게 만듭니다. 이렇게 할 일이 없는 사람은 남는 것은 시간뿐이라서 결국은 음행에 빠지게 된다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사회기 그렇습니다. 물질적인 풍요로 잘 먹습니다. 에너지, 정욕이 넘칩니다. 지금 우리사회는 너무 잘 먹어서 돈 들여서 살 빼고, 운동하는 실정입니다. 여기에다가 주 5일제로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안일해지는 겁니다. 이게 낙을 추구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향락산업이 호황을 누리고, 레포츠가 호황이요, 취미생활이 번영을 누리고 있습니다. 정말 우리 한국사회는 먹고 마시자! 가 모토가 된 듯합니다. 이렇게 게으름은 사람을 일락에 빠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일락 쾌락의 본질은
그러면 먼저 일락, 또는 향락이라는 것으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향락을 음행과 같이 죄악된 즐거움에 한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문제와 상관이 없을 것 같습니다. 적어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간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향락이라는 것은 서두에서 보았듯, 육신을 기쁘게 하는 것을 본질로 하는 것입니다. 육신이란 편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육체는 쉽고, 재미있기를 원합니다. 이게 향락의 본질입니다. 따라서 향락을 좋아하여 재미만을 추구하고 누리기 위하여 음행하는 것이나, 루터가 좋아한 볼링이나 낚시같은 것에 미치는 것은방법의 차이일 뿐이지 육체를 추구하는 그 본질은 동일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향락을 사랑하는 것을 육신의 일이라고 하셨습니다.(갈5:19) 일락을 사랑하는 것, 이게 바로 육신의 사람, 옛 사람, 옛 자기입니다. 이게 거짓 자기입니다. 이걸 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문제에 대해서 죄책이 없는 겁니다. 이걸 죄로 여기지 않기 때문에 이슬비에 옷젖는 줄 모르는 것같이 이 세상물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을 육신의 생각이라고 하고, 이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라고 합니다.(롬8:6)이 사람으로 살면 살았으나 죽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향락을 좋아하는 사람은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일락을 사랑하는 것을 죄, 즉 옛자기, 거짓 자기로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왜 일락만을 구하는 사람은 참 사람이 아닌 거짓 사람이며, 이 사람으로 사는 것이 왜 죽음입니까?
왜 일락의 사람은 거짓사람이며 죽음인가
첫째, 이게 우리 원조가 타락한 거짓 사람이 되게 만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왜 선악과 따먹었다고 했지요, 성품적으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능력적으로 하나님처럼 되고 싶었다고 했지요. 능력이 하나님같이 되면 못할 것이 없습니다. 하고 싶은 거 다하고 원하는 거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인생 얼마나 편하고, 재미있고 멋집니까? 이걸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라고 한 겁니다. 이렇게 육신 좋게 살고 싶은 이 것이, 참사람을 거짓된 사람, 육신의 사람, 옛 사람이 되게 한 것입니다. 이 일락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을 타락시켜 마귀적인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속의 이 육신 편하고 육신 즐겁고 기쁘게 살려는 이 자기가, 이렇게 악한 타락한 사람, 악령과 악성과 악습으로 된 거짓 자기로 알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둘째, 이렇게 육체을 위하는 것은 사는 영에는 상극이기 때문입니다. 일락은 육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육신을 섬기면 먼저 하나님의 영과 상극이 됩니다. 아담이 이렇게 육체를 따르자 먼저 하나님을 어겨 거슬렸습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즉 인간의 영이 하나님을 거슬린 겁니다. 이게 타락하여 죽은 영입니다.하나님과 인간의 영이 맞지 않게 된 것입니다. 마치 리브가와 에서의 아내들이 영이 안 맞은 것 같이 하나님과 안 맞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안 맞으니 모든게 다 나와 싸우는 것 같이 되는 곤고함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롬8:5-8은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하고, 사망이라고 하신 겁니다.
뿐만 아니라, 일락은 내 안의 성령과 내 영에 상극입니다. 이 육신은 내안의 영과 성령을 거슬려 원수가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갈5:16-21을 봅시다. 육신의 소욕은 성령을 대적합니다. 이렇게 성령을 거슬리는 육체의 일이 무엇입니까? 육체의 일의 목록에서 첫째 음행, 셋째가 호색, 술 취함과 방탕함 즉 향락이 제일 많습니다. 이렇게 향락은 영에 치명적입니다. 향락은 사람에게서 영성을 상실케 합니다. 인간이 인간인 것은 영 때문입니다. 영을 잃은 인간은 동물에 다름 아닙니다. 쾌락을 좋아하는 것은 이렇게 인간을 짐승이 되게 합니다. 무슨 청와대 민정수석 동영상 사건을 보세요. 이게 동물의 세계이지요. 이렇게 향락은 인간의 영성을 빼앗아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을 동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게 악령으로 된 사람이지요. 이게 원죄로 된 사람이고, 이게 이 죄행이 습관이 된 악습으로 된 사람 아닙니까? 일락을 사랑하는 자기, 이걸 악령으로 된 사람, 악성으로 된 사람, 악습으로 된 거짓 자기로 알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셋째, 이 일락을 구하는 육체대로 사는 것은 금생과 내생을 상실케 하는 독이기 때문입니다. 향락의 본질이 편하고 좋고, 재미있으려는 것이라고 했지요. 학생들이 왜 공부 못하는 지 아십니까? 쉽고 재미있는 것만을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만화책을 보는 것, TV나 보고, 전자오락 게임하는 것은 힘들지 않고 재미있습니다. 그러나 공부하는 것은 지구력이 요망 됩니다. 공부는 머리를 써야 합니다. 즉 사고가 필요합니다. 사고력을 발휘하는 것은 힘이 듭니다. 재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시작했다가 어려우면 금방 포기해버리고 맙니다. 이게 쉽고 자극적인 책을 못 읽게 하는 이윱니다. 이런 것은 사고력을 발휘할 필요가 없습니다. 쉽고 자극적인 책에 길들여지면 사고력이 필요한 어려운 책은 읽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쉽고 편한 것이 길들어지면 사고력을 요구 되고, 이해력이 요구되는 공부는 힘들어서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쉽기만 하려는 것이 결국은 힘 드는 직장에 적응하지 못하게 만들고, 힘 드는 일 못하는 사람이 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미래가 없습니다. 인생을 잃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향락이라는 것은 현재를 중심하기 때문에 다가오는 천국의 삶을 상실케 합니다. 천국은 신령한 나라입니다. 이 천국을 누리려면 그 천국에 맞게 신령해 져야 합니다. 따라서 이 세상은 이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사람을 이 천국에 맞는 영적인 사람으로 만드는 곳입니다. 이 세상을 영으로 살면 임시 것이 영원한 것이 되고, 물질적인 것이 신령한 것이 되고, 죽을 것이 죽지 않는 것이 됩니다. 믿음은 이렇게 이 세상을 영으로 살아서 세상 것을 천국의 것으로 만들고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 사람은 영을 따라서 천국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 성도들이 육신의 본능을 따라서 이 세상을 누리기만 하면 영원한 삶을 만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점을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놓치고 있는 점입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내가 가서 살 천국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을 멋지게 누리고 사는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이렇게 이 세상에서 다 받고 누리면 천국에서 받을 것은 없다고 주님이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부자가 지옥가고, 거지 나사로가 천국간을 깊히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혈과 육은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수가 없다고 하셨습니다.(고전15:50)그러므로 그저 육신 편하고 재미만 추구하는 이 자기를 영원을 잃게 하는 원수로 알아야 합니다. 이게 옛 사람, 거짓 자기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 일락이라는 것이 어떻게 성도를 이런 사망에 이르게 하는지 일락의 치명성을 살펴봅시다.
일락을 사랑함의 치명성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주님의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세 번째 밭인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입니다. 눅8:14절를 봅시다.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 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무엇에 기운이 막혀서요? 일락. 즉 향락입니다. 기운이 막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모든 힘과 정력을 일락에 쏟아서 영과 천국의 일에는 쓸 힘이 없어서, 영혼과 천국을 이루는 일을 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기운! 에너지, 힘을 방전시키는 것이 일락이 성도를 망하게 하는 첫 번째 해악입니다. 일락의 치명성은 참 사람, 참된 구원의 삶을 살 에너지를 방전시키데 있습니다. 왜 학생이 공부 못합니까? 노는 일에 힘이 방전되어서 공부에 쓸 에너지가 없어섭니다. 우리가 새벽기도 못하는 것은 새벽기도 할 힘이 없어섭니다. 주일예배 조는 것도 세상일이 에너지 다 쓰고 방전해서 하나님을 예배할 기력이 없어 서지요. 이게 바로 향락의 치명성입니다. 향락은 육신 좋은데 모든 힘을 쓰게 만들어서 생산적인 일에 쓸 힘과 시간이 없게 만들어 버립니다. 이것이 우리를 정체 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성장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것이야 말로 악령과 악성과 악습으로 된 사람이 아닙니까? 지금 이 원수가 내 인생을 준비할 시간에 놀이에 빠져 도끼자루 썩는지 모르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 놈이 공부할 힘 다 빼앗아 먹고 있습니다. 이 놈이, 일할 힘, 창작할 힘, 사업할 힘 재주, 시간 다 뺏어먹고 있습니다. 이 놈이, 기도하고, 성경 볼 힘도 없게 만들고 있고, 이 놈이 주님 따를 힘 빼고, 이 놈이 영원한 본향을 만들 힘을 이 세상에 다 쏟게 만들고 있습니다.
두 번째 일락의 치명성은 문제가 닥쳤을 때에 뚫고 나갈 수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향락을 사랑하는 것은 결국 편하고 쉽고, 재미있는 것이 인격이 되고 습관이 되게해서 삶의 문제에 직면하면 그냥 포기해버립니다. 향락에 빠진 사람은 다 의지를 상실합니다. 서양문학이건, 동양문학이건 향락에 몰입한 사람의 종말은 의지가 나약해져서 자신의 문제를 뚫고 나기지 못해서 포기한 인생으로 묘사합니다. 삶은 가시떨기를 만납니다. 이 가시떨기를 뚫고 나가야 살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삶의 가시떨기에 말씀을 따르데 오는 가시떨기가 있습니다. 이 문제를 뚫고 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이 성장합니다. 구원이 성장합니다. 그만큼 인생이 성장합니다. 그런데 일락을 사랑하면 일락에 힘을 다 사용해서 방전되었기 때문에 가시덤불을 뚫고 나가고 헤치고 나가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삶의 문제를 뚫고 나가지 못해서 인생이 답보하고, 신앙이 성장하지 못하고 생활도 성장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악한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일락이 치명적입니다. 여기에 속아서 참 사람으로 살지 못하고 거짓 사람으로 사는 겁니다.
은혜로 가족여러분! 이게 사탄 마귀의 전략입니다. 사탄은 그저 이 육신 편하고 재미있게 하는 일이 우리 소원 관심과 전력을 다 쏟게 해서 인생을 방전시켜서 참 사람으로 살 힘이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 놈 때문에 내 인생, 내 영원을 잃고 있는 중입니다. 따라서 내가 어떤 사람이냐? 내가 영적인 사람인지 육체의 사람으로 사는 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것의 시금석이 내가 무엇에 힘을 쓰는 사람이냐는 것입니다. 힘쓰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을 압니다. 영을 건강하게 하는 일보다 육신 편하고 재미있게 하는데 힘을 다써서 곤해서 영으로 살수 없다면 나는 일락의 거짓사람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일락에 힘을 방전하고 있는 사람은 육을 따르는 일락의 거짓 사람입니다. 이 사람 때문에 금생과 내생을 잃어 가고, 참 사람이 죽고 있습니다. 이 자기를 거짓 자기로 알고, 이 자기를 회개합시다. 일락을 사랑하는 자는 죽었습니다. 일락은 꿀과 같이 달콤하지만 일락이라는 꿀은 달콤한 사망의 꿀입니다. 이 사실을 마음에 새기시는 것이 일락의 사람을 잡고, 참 사람의 삶을 사는 길 인줄로 믿습니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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