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강론

축복의 땅 그 사회적 양식

아브라함-la 2021. 10. 10. 16:57

021,10,10 주일강론

본문 : 레19:15-18

말씀 : 라인권목사

 

   한 주간 은혜들 많으셨지요. 지난 주일에 축복의 땅은 하나님의 나라이며,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나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믿는 일로 사는 땅이며,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표상이 우상을 섬기지 않고, 안식일과 십일조입니다. 이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가 첫 돌비이며 이를 예배라고 합니다. 이 믿는 일이 우선입니다.

 

축복의 땅 이웃 사랑을 요구

축복의 땅은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므로 사는 곳이지만, 나 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공동체로 사는 곳입니다. 그래서 이웃과의 관계, 사회적인 관계가 필요합니다. 이 사회적 관계를 규정한 것이 둘째 돌비이고. 오늘의 본문은 이 둘째 돌비의 요구를 구체적으로 적용한 것입니다. 추수 할 때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남겨두라. 이웃을 착취하지 말라, 공정하게 재판하라, 이익을 도모해서 이웃의 피를 흘리지 말라고 하신 겁니다. 이걸 18절에서 한 마디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이웃 사랑이라고 헀습니다.

 

축복의 땅 사랑으로 사는 나라

즉 축복의 땅은 사랑으로 사는 나라라는 거지요, 이 사랑이 축복의 삶의 양식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 천국은 사랑이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선택과 구원하심과 땅을 주심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아들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는 구원 받고, 하나님의 나라와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축복의 땅은 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야 하므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이웃을 대해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원수도 원수가 내게 한 것 같이 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의 원수인 나를 대하신 방법으로 원수를 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축복의 땅은 사랑으로 사는 나라입니다. 천국 사람은 이렇게 사랑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참사람입니다. 이것이 풍성한 삶, 즉 복을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이 천국의 삶의 양식을 잘 풍자한 유머가 있지요, 지옥에 가보니 식사를 주는데 일 메타가 넘는 긴 젓가락으로 먹게 해서 아무리 먹으려 해도 입에 들어가지 않아서 음식을 두고도 못 먹어 말랐다지요,습니다. 그런데 천국에서도 긴 젓가락으로 먹는데 서로 먹여 주어서 살이 통통하더라는 겁니다. 이렇게 축복의 땅은 사랑으로 사는 겁니다. 이 사랑은 이 세상의 삶의 양식이 아닙니다. 세상은 이 방식을 어리석게 여깁니다. 착하기만 하면 못산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렇게 안 살아도 되고, 사랑의 방법으로 살아도 오히려 잘되고 풍성하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행복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이 축복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만큼 행복하고 축복을 누리는 줄로 믿습니다.

 

이웃 사랑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렇게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14절을 봅시다. “너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맹인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하셨습니다. 듣지 못한다고 욕하고, 못 본다고 그 앞에 장애물을 놓는 것, 즉 이웃을 해하는 건 하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경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우상 취급하는 거지요.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믿으면 이웃을 해롭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시고, 하나님이 이를 미워하시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께 경외요, 봉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약한 이웃을 돌아보는 것이 경건입니다.(1:27)

 

그런데 우리는 봉사를 예배나 교회 일을 하는 것으로 아는 경향이 있습니다. 교회 일은 열심히 하는데 부모는 공경하지 않습니다, 교회 일 잘하는데 형제를 미워합니다. 이웃을 속입니다. 이게 하나님을 틀어지게 합니다. 하나님과 틀어지면 되는 게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웃 사랑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요, 봉사로 알아야 합니다. 이 하나님과의 간접적인 관계를 규정한 것이 둘째 돌비입니다. 이 믿는 도리를 잘해서 하나님과 축복의 땅에 딱 맞아서 하늘도 땅도 사람도 환도 나를 돕는 풍성한 삶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이웃 사랑이 하나님의 공의

그리고 이웃에 대한 이 사랑의 의무를 이행하는 것을 공적인 관계에서는 공의 정의라고 하고, 사적으로는 의라고 하고, 이 이웃 사랑의 요구에 반하는 것을 불의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공의의 근본을 봅니다. 공의는 엄격하게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나보다 약한 이웃을 아끼고 돌보는 사랑이 근본입니다. 공의는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 의가 있을 때에 평강과 희락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의가 평강과 희락의 토대입니다.(14:17) 축복의 땅은 이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요구합니다. 이 방법으로 살면 하나님과 그 땅과 맞아서 하늘과 땅이 돕고, 이웃에게 불의를 행하면 그 땅을 더럽게 하고, 그 땅이 토합니다. 그러면 축복의 땅을 더럽히므로 축복의 땅이 토하는 사회적 불의는 어떤 것입니까?

 

축복이 토하는 사회적 불의

첫째, 무죄한 피가 축복의 땅을 더럽히고 토하게 하는 우선적인 사회적 불의입니다. 본문은 이걸 인상 깊게 말씀합니다. 네 이웃의 피를 흘려 이익을 도모하지 말라(16) 이 말씀의 주석이 다윗이 밧세바와의 죄를 감추기 위해서 남편 우리야를 죽인 사건입니다. 이건 마귀적이지요, 이건 압제이고 불공평한 일이지요, 이건 회복 불가능입니다. 생명을 잃으면 다 잃습니다. 한 사람의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므로 축복의 땅에서는 단 한 사람의 억울한 죽음도 없게 도피성을 둔 겁니다. 단 한 사람의 무죄한 피도 그 땅을 더럽게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피는 땅을 더럽히나니라고 하셨습니다.(35:33) 심지어 처형당한 시신을 하루 밤을 넘기게 하면 그 땅을 더럽게 합니다.(21:23) 그래서 율법은 죽음의 원인을 알 수 없는 피살체를 발견하면 제일 가까운 거리의 장로들이 책임지고 속죄하여 무죄한 피를 씻게 하신 겁니다.(21:1-9) 혹시라도 억울한 죽음 없는 사회, 이게 복지입니다. 이게 축복이며 행복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이 땅이 이 하나님의 거룩한 소원이 이루어지는 땅이 되게 하시기를 소원합니다.

 

둘째, 음행이 축복의 땅을 더럽혀서 토하게 하는 사회적 불의입니다. 18장은 길게 이 음행이 그 땅을 더럽혀서 토하게 하는 더러운 죄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음행은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인 우리 몸을 더럽게 하는 것입니다. 이 음행이 가정을 무너지게 하고, 사회를 무너지게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이 죄로 망했습니다. 이렇게 음행이 축복의 땅에서 토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음행의 바람에서 우리와 가정과 교회를 정하게 하는 것이 곧 나의 행복이요, 너의 행복이 될 줄로 믿습니다.

 

셋째, 불공정한 재판과 경제적으로 사회적 약자를 착취하는 사회적 불의가 축복의 땅이 토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게 본문의 내용입니다. 재판할 때 가난하다고 편들고, 세력이 있다고 두둔하지 않고 법을 공정하게 집행하는 것이 하나님 경외하는 것이요, 이웃 사랑이라고 하셨지요. 그러나 경제는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고, 특혜를 주게 하셨습니다.(9-13) 그러므로 법은 공정하게, 경제는 약자에게 혜택을 주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따라서 법을 공정치 못하게 집행하고, 사회적 약자를 착취하는 것은 축복의 땅을 더럽히는 것이요, 그 땅이 토하게 하는 사회적 불의입니다. 그러면 이 사회적 불의가 어떻게 축복의 땅에서 토함을 받게 했는지를 살펴봅시다.

 

사회적 불의 어떻게 토함 받나

먼저 이 사회적 불의는 하나님이 그 불의한 백성을 토하게 만들었습니다. 1:15절은 많이 기도해도 내가 듣지 않는 것은 너희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예배하면서 이웃에게 불의를 행하는 것이 하나님을 견디지 못 하여 기도해도 소용이 없게 한 겁니다,(13)이렇게 사회적 불의는 예배와 기도를 헛되게 합니다. 은혜의 방편을 무용지물이 되게 하는 겁니다. 이게 저주입니다. 그리고 사회적 불의는 성전이 토하게 합니다. 7:1-15절이 이를 증언합니다. 9절의 도둑질 살인과 간음 거짓 맹세가 실로가 망한 것 같이 성전을 망하게 했다고 합니다. 더 나가서 사회적 불의는 성문과 다윗 왕가를 토하게 했음을 렘22:1-7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3절을 보세요, 탈취한 자를 건지지 않고, 사회적 약자를 압제하고 학대하고, 무죄한 피를 흘려서 성과 다윗의 집이 황폐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축복의 땅이 이스라엘을 토할 때의 형편이었습니다. 예배는 성황이어도 제물은 넘치고 기름과 피가 강이어도 사회적 불의가 만연했습니다.

 

여러분! 이게 꼭 우리 한국교회 모습이 아닙니까? 지금 우리 사회는 무죄한 피가 가득합니다. 이 눈물이 마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 특심인 사람들이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 이 무죄한 피를 뿌린 이들을 존경하고 지지합니다. 성경이 이렇습니까?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사울입니다. 이 사울을 국부라 하지 않습니다. 그가 무죄한 피를 많이 흘린 독재자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아사와 요아스같이 하나님께 열심인 왕의 무죄한 피와 몇 사람을 학대한 것을 정죄하고 있습니다.(대하14:10,16:10) 그런데 독실한 신자들이 무죄한 피를 무수하게 흘린 독재자를 국부라고 합니다. 이게 성경입니까? 하나님의 정의는 법은 공정하고 경제는 사회적 약자에게 특혜를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열심히라는 이들이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복지정책을 사회주의라고 합니다. 이렇게 교회가 사회적 의에 무관심합니다. 그래서 형제복지원을 필두로 우리 사회를 경악케 한 사회적 불의를 자행 한 이들은 거의가 우리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과 틀어지고, 축복과 틀어져 있습니다. 이를 회개치 않으면 이스라엘과 같이 토하실 겁니다.

 

그러므로 예배에 열심인 것 같이 사회적 불의에 열심인 것을 회개하여 하나님과 푸시기 바랍니다. 예배에 열심인 것 같이 이웃을 사랑하는 사회적 의에 열심인 교회가 되게 합시다. 이 나라, 이 땅이 단 한 사람의 억울한 피도 없는 공평한 사회, 이웃의 순결을 지키는 사회, 사회적 약자들이 배려를 받는 사랑의 나라가 되기를 추구합시다. 이 가나안 복지를 추구합시다. 이 이웃 사랑은 결국 십자가 앞에 서게 합니다. 그리스도라는 하나님의 사랑의 부우심으로  자기가 아닌 이웃의 행복을 위해 사는 참 사람이 됩시다. 이 십자가로 자기만을 위하는 이 거짓 사람을 못 박고 참 사람으로 살아서, 이 땅을 의와 평강과 희락의 행복의 나라가 되게 하여, 이 행복의 나라를 후손에게 물려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