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유월 마지막 주일날입니다. 예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거의 20여년 가까이 뇌경색으로 투병하던 동기 목사님이 돌아갔다는 전화였습니다. 서둘러서 동창회 회장과 부회장 한분과 더불어 장례식장으로 달려가서 위로하고 돌아와서 동창회 홈페이지에 “000 목사님이 영광 들어가셨습니다.”라는 제목으로 부음을 올렸습니다. 동창회 총무이기 때문에 동창회의 애경사와 광고 사항을 홈피에 올리는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돌아가신 목사님은 졸업 후 수도권 도시의 꽤 규모 있는 교회에 부임했고, 인물도 좋고 말씀도 잘하는 목사로 자타가 대성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전도유망한 젊은 목사가 그 교회 장로에게 배척을 받고 사임한 후에 그 충격으로 쓰러졌다가 이번에 주님 곁으로 가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사모님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사정을 모르는 동기들이 없기 때문에 부음을 올리며 동기들의 많은 위로의 글이 올라올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장례를 치루고, 일주일 지나도록 단 한건의 댓글이 올랐을 뿐입니다.
이것을 보고 제 마음에도 섭섭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동창들의 부모 상 소식을 올리면 여러 댓글이 올라옵니다. 특히 큰 교회를 목회하는 동창의 부모상 소식을 올리면 많은 댓글이 올라옵니다. 그런데 정작 동기 목사가 소천 했는데 단 한건의 댓글뿐이라니 왠지 씁쓸했습니다. 마치동창회 일은 자기가 다 하는 양하고, 큰 교회 목사 가족상에는 왜 소식이 늦느냐고 성화인 사람들도 꿩구어먹은 소식이니 왜 제 마음이 섭하지 않겠습니까?
인지상정이라고 사람의 마음은 다 같은 법입니다. 일주일이 지난 후 남편 장례를 모신 돌아가신 목사님 사모님께서 제게 인사 전화를 하시며 홈피에 들어가 보니 댓글이 하나뿐이더라고 쓸쓸해 하셨습니다. 수화기 너머로 그 말씀을 들으며 참 민망했습니다. 정승집 개가 죽으면 조문객이 문전성시지만 정승이 죽으면 오가는 이가 없더라는 고사가 옛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인심이 이렇습니다. 세상은 있는데 후하고 없는데 박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의 사람이라면 오히려 있는데 보다 없는데 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도사때 모시던 목사님께서 제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노회회계가 큰교회 목사가 오면 택시비를 주고 작은 교회 목사에게는 시내 버스비 주더라며 저보고 "큰목사"되라고 하셨습니다. 노회안에서 큰교회 목사 애경사에는 소속교회에서 보낸 화환이 차고 넘침니다. 그러나 작은 교회목사 부모상에 가면 민망할 정도입니다. 우리가 정말 주님의 마음을 가졌다면 오히려 작고 약한데 후해야 할 겁니다. 큰교회는 차고 넘칠 것이니, 기왕이면 작고 약한데를 돌아보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이런 이유로 동기목사 하나는 동창회 회장할 때 큰 교회는 못가도 작은 교회는 꼭 가신다고 했습니다.
세상과 같이 교회도 있는데 후하고 없는데 박하기 때문에 인간 냄새가 나고 교회에 환멸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약2:1-4) 교회가 세상과 달리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사랑과 진실을 보일 때 세상에 데이고 시달린 사람들이 교회를 찾을 거라고 믿습니다. 우리교회는 진정으로 이런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믿음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만일 우리가 형제를 차별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차별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는 맙시다. 우리 모두가, 우리 모두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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