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3,1,15, 주일
본문 : 암7:7-9
말씀 : 라인권목사
평안이시지요. 다음 주일이 설입니다. 이번 명절 행복하시고, 시험에 들지 않고 승리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은 아모스서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이 아모스서는 선지서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가장 강력하게 선포하고 있는 성경입니다. “공법을 물같이 공의를 하수같이 흐르게 하라”이 암6:24은 불신자들도 잘 아는 말씀입니다.
선지자 아모스
이 아모스서를 쓴 선지자 아모스는 유대 광야에 인접한 드고아의 목자로 뽕나무를 배양하던 사람입니다.(7:14.15) 이 목자라는 말 “노게드”는 양 떼를 소유한 것이 아니라, 단지 양을 치는 일을 하는 목자를 즉 뜻합니다. 아모스는 많은 양 떼와 뽕나무 농장이 있는 부자가 아니라, 가난한 목자였습니다. 따라서 아모스는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의 설움과 당하는 불의와 억울함을 체득한 사람입니다. 이 아모스를 북방 이스라엘이 가장 부강했던 여로보암 2세 때에 양떼를 따르던 아모스를 선지자로 불러서 북방 이스라엘에서 사역하게 하셨습니다.
아모스가 본 환상
오늘의 본문은 이 선지자 아모스에게 세 번째로 보이신 환상입니다. 선지자가 환상 중에 보니 한 사람이 손에 다림줄을 잡고 쌓은 담 곁에서 다림줄을 보고 있었습니다. 이 다림줄은 곧음을 보는 도구입니다. 기둥이나 벽을 세울 때에 기둥과 벽이 좌우로 기움이 없이 곧게 세우는 기준 줄입니다. 선지자가 이 다림줄을 잡은 사람을 보았는데 이 다림줄은 북방 이스라엘의 사회적 정의를 보는 하나님의 공의의 줄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당신의 공의를 요구하실 때에 그 공의는 사회적 약자들을 배려하여 돌보는 것과 법을 공평하게 집행하는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사회적 약자들에게 특혜를 주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이며, 법을 빈부간에 공평하게 집행하는 것을 정의라고 합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이 사회적 정의가 하나님께서 한 나라를 심판하시고 축복하시는 최소한의 기준이자 최후의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한 사회, 한 나라를 심판하실 때에 성도덕의 수준, 정치의 이념이나 예배가 기준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고 법을 공평하게 집행하는지가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최소한의 기준, 이 최후의 기준이 지켜지면 복을 주시고, 아니면 심판하시는 겁니다. 선지자가 아모스가 이 환상을 보고 공의가 강물과 같이 흐르는 나라를 꿈꾼 것입니다. 이 다림줄을 잡은 사람이 주이시기 때문입니다.
다림줄을 잡으신 주 예수
이 다림줄을 잡으시고 다림을 보시는 주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본문이 이를 증거합니다. 하나님은 형상이 없는데 선지자는 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다림줄을 잡은 그분의 손을 보았습니다. 이 분을 주라고 불렀습니다. 이 주라는 말은 아도나이로 여호와 하나님 자체입니다. 이 아도나이를 신약에서 예수님을 퀴리오스, "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성육신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보이신 것은 이 성육신 할 예수를 미리 보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8절에서 여호와께서 환상을 보이신 당신과 환상 속의 다림줄을 잡은 사람을 구분하신 겁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는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이시므로 주이십니다. 이 주는 천상천하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재 왕이십니다. 이 왕은 이사야가 본 것 같이 정의와 공평으로 다스리는 왕이십니다.(사 9:7) 그리고 주 예수는 이 권세로 심판하시는 주이신 것입니다. 선지자 아모스가 대 주재로 심판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공의가 강물과 같이 흐르는 나라를 꿈꾸었습니다.
먼저 다림줄을 잡으신 주 예수는 사회적 불의를 다림 하셔서 심판해 주시는 소망과 위로를 베푸시는 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주께서 담 곁에 서셨다고 했습니다. 이 담은 북방 이스라엘의 담입니다. 담은 방어시설, 요새입니다. 그러나 이 담이 기울면 배가 나옵니다. 이걸 방치하면 무너집니다. 무너지면 참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소년시절 배가 나온 담이 무너져서 막내 아들이 죽은 집을 보았습니다. 여로보암이 이룬 부강이 담입니다. 지금 북방 이스라엘의 부강이라는 담이 배가 나온 담 같이 되었습니다.
무엇이 이 담에 배가 나오게 했습니다. 8:4-6을 봅시다. 가난한 자들을 삼키며 힘없는 자를 망하게 했습니다. 에바를 작게 하고 거짓 추를 사용했습니다, 은으로 힘없는 자를 사고 신 한 켤레로 가난한 자를 샀습니다. 그러니 약하고 가난한 백성들은 얼마나 분하고 억울하겠습니까? 무죄한 피가 호소하고 있습니다. 주지 않은 품삯이 밭에서 소리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들의 부르짓음이 하늘에 닿았습니다. 이 사회적 불의가 여로보암의 부강과 풍요의 담에 배가 나오게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기울어진 담 같이 된 된 것입니다.
세상의 사회적 불의는 풍요로울수록 심해집니다. 커피 노동자 이야기 합니다만, 우리나라 아파트도 이렇게 지어지고 있습니다. 아파트 철근 공사를 하시는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돈되는 것 다 원청이 하고, 철근 조립하는 것만을 하청을 줍니다. 이 하청을 받은 작은 회사가 한 개인에게 최종 하청을 줍니다. 장로님이 이걸 합니다. 이 하청은 계약서도 없습니다. 사고 나면 산재도 없습니다. 사고 안나고 날씨 좋아야 당신 일당과 조금의 수익이 있습니다. 아파트가 이렇게 지어지고 있습니다. 이게 도량을 크고 작게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게 신 한결레에 사람을 사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건축자이시고 감리자이신 주 예수께서 다림줄을 보신 것입니다. 만일 기운 이 담을 고치지 않으면 이 담을 헐겠다는 겁니다. 이 심판이 다림줄의 용도입니다. 왕하21:13절을 봅시다. “내가 사마리아를 잰 줄과 아합의 집을 다림 보던 추를 예루살렘에 베풀고 그릇을 씻어 엎음 같이 예루살렘을 씻어버리라라” 이렇게 다림줄은 철거용이며 심판용입니다.
왜 주 예수께서 이 다림줄 심판을 행하십니까?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케 하심입니다. 거룩하시고 공의로운 하나님은 사회적 약자들이 당하는 불의를 당신의 공의가 만족하도록 심판하십니다. 이게 우상 종교와 여호와 종교가 다른 점입니다. 예배하고 예물을 드려도 사회적 불의를 행하면 심판하십니다. 다림줄을 잡은 주 예수는 이 심판으로 억울한 피를 갚아 주십니다. 사회적 약자들을 신원해 주시고, 억울한 눈물을 닦아 주십니다.
여러분! 아모스가 이 예언을 하고 30년 만에 주전 722년에 앗수르의 살만에 셀에게 사마리아는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사회적 불의로 배부른 담은 30년을 못갔습니다. 이 주 예수께서 다림줄을 잡은 심판주로 계십니다. 이게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이자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불의는 망할 것입니다. 이 소망이 있습니다, 억울하고 분해도 이 주님이 오시고 주님이 갚아 주시며, 마침내 억울한 눈물이 없는 그 나라가 오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다림줄을 잡으신 주 예수는 이렇게 불의의 심판으로 무너진 것을 세우시는 구원의 주 예수이십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슥4:10절입니다. “사람들이 스룹바벨의 손에 다림줄이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즉 포로시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는 어려운 일을 스룹바벨의 손으로 시작했으니 그 손으로 마치게 하겠다는 겁니다. 내 영으로 성전 재건의 큰 산이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게 하시겠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 예수께서 다림을 보시는 것은 다시 세우시기 위해서입니다. 본서의 마지막 부분 9:11-15절은 이를 찬란하게 보여줍니다.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시고, 그 틈을 막으시고 허물어진 것을 일으키십니다. 황폐한 성을 건축합니다. 거기에 심어서 다시는 뽑히지 않게 하십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다윗의 자손이신 주 예수가 구원이 되실 때에 만국이 주님의 기업이 됩니다. 즉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가 주의 백성이 됩니다. 이 백성은 십자가의 피로 구속되고 거듭나 예수의 마음을 가진 신령한 백성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과 같이 이웃의 행복을 위하여 자기를 종이 되게 하고 희생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죽을지언정 해롭게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이게 주 예수가 다림 한 백성입니다. 그래서 월버포스가 노예무역을 금지하고, 미국은 흑인의 인권을 위해서 전쟁을 하는 의로운 나라가 된 것입니다. 주 예수의 복음이 역사하는 나라는 이렇게 의로운 나라가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재림으로 이 나라를 완성하십니다. 할렐루야! 이 다림줄의 구원을 신속하 하십니다. 지금 우리 역사에서 이 다림줄로 이 땅을 의로운 나라로 세우시는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은혜로 가족 여러분! 이 다림줄을 잡으신 주님이 계십니다. 불의 세상에서 이 주님의 다림줄로 위로를 받으시고 힘을 내시고 소망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이 다림줄을 우리의 신앙을 다림 합시다. 약한 이웃을 배려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이 되게 합시다. 그래서 우리 은혜로 가족은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와 같이 풍요에 매몰되어서 오는 심판을 보지 못하고 평안을 파는 것이 아니라, 아모스와 같이 불의한 현재를 다림 하여 깨우는 선지자 같은 의로운 교회와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다림줄을 잡으신 주 예수께서 이런 우리에게 공의가 강물 같이 흐르는 것을 땅에서 보게 하시고, 하늘의 기업으로 누리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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