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강론

예수님 왜 부활하셨나?

아브라함-la 2023. 4. 9. 17:08

023,4,9, 부활절

본문 : 욥10:1-22

말씀 : 라인권목사

복된 부활절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오셔서 평안이 없는 이 세상에 평강을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은 제가 지난 고난일에 읽은 If I live “만일 내가 산다 해도”라는 기도 시 한 편을 소개하는 것으로 부활 주일 말씀의 문을 엽니다. “끝까지 신앙을 지키게 하소서./이 세상에서 형제들을 다시 볼 희망이 없나이다./그들이 나를 죽인다면/ 내 신앙의 증인이 되어 죽게 하소서/ 만일 내가 산다 해도/ 계속해서 증인이 되게 하소서./ 이 기도는 에디오피아 사람 가브라 마이클(Gabra Michael)이 데오도로 2세의 박해 때에 순교를 앞두고 드린 기도입니다. 여기에 부활이라는 말은 없지만 죽는 것이 죽는 것이 아니라 산다는 확신으로 가득합니다. 죽어도 증인으로 죽고, 살아도 증인으로 살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죽음 앞에서도 삶의 목적이 분명하고 그 목적을 살아내려고 하는 겁니다.

 

이 가브라 마이클의 고백과 오늘 본문의 욥의 토로는 아주 대조적입니다. 본문의 욥은 그가 당한 말할 수 없는 재앙과 이로 인한 세 친구들의 무자비한 충고로 상하고 낙심한 마음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욥은 먼저 하나님께서 사람의 눈을 가지신양 선악을 착각하신다고 합니다. ”주께서도 육신의 눈이 있나이까 주께서 사람처럼 보시나이까“(4) 판사가 오판하는 것은 사람의 눈의 불완전성 때문입니다. 욥은 자신이 의로운데도 이 큰 재앙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의 눈인양 오판하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악인이 빛을 보고, 의인이 고난을 당하는 현상은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선악에 무관심하시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욥은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적발해서 벌을 주는 것을 즐기려고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합니다. 인생은 행복하게 살아도 인생이 너무 짧고 덧없는 존재입니다.(5) 그런데 무고한 자기가 이 큰 재앙을 당하는 것은 마치 검찰이 짜장면을 먹으며 조국을 털 듯이 하나님께서 일부로 자기의 허물을 찾으시며 죄를 들추어내시는 행위라는 것입니다.(6) 하나님이 자기를 지으시고, 지금까지 보살펴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악의를 가지셔서 재앙을 주셔서 친구들이 번갈아 가며 군대같이 자기를 치기 위함이 아니냐고 합니다.(8-17) 하나님이 만들었다가 부수는 놀이하시는 것 같다고 합니다.

 

그래서 욥은 왜 나를 태에서 나오게 하셨냐며, 이제 제발 죽기 직전인 자기를 내버려두셔서 잠시나마 평안하다 죽을 수 있게 해달라고 합니다. 21-22을 봅시다. ”내가 돌아오지 못할 땅 곧 어둡고 죽음의 그늘진 땅으로 가기 전에 그리하옵소서 땅은 어두워 흑암 같고 죽음의 그늘이 져서 아무 구별이 없고 광명도 흑암 같으니이다 “ 즉 어서 죽어 어둠뿐인 스올에 가는 것이 억울한 재난을 당하고 악질에 신고하는 몸으로 사는 것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죽는 게 사는 것보다 낫다, 이게 고난으로 다 죽게 된 욥의 소원입니다. 욥은 죽음 앞에서 삶에 대한 애착도 소망도 없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있을까요? 이것은 전자는 죽음 이후에 있는 생명의 부활에 대한 소망이 분명했지만, 욥은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해서 죽음 후의 세계와 죽음 후에 있는 부활의 소망이 분명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걸 욥19:25-27이 분명히 증거 합니다. 욥이 중보자 예수를 알자 자신의 가죽이 썩으면 육체밖에서 주를 보리라고 합니다. 주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를 만났을 때 부활을 알게 되고, 부활의 소망이 분명해지고, 그가 자기를 신원해 줄 것을 확신한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아직 이 예수를 만나지 못한 욥은 죽음 후의 생명의 부활에 대한 소망이 없어서 삶에 대한 소망을 갖지 못하고 죽음이 삶보다 났다고 한 겁니다.

 

지금 이 땅이 이런 형편입니다. 2021년 이 땅에서 스스로 생명을 끊은 이 가 1만 3,352명입니다. 매일 37명이 극단적 선택을 하는데 요즘은 출렁다리가 자살의 장소로 뜨고 있는 중입니다. 얼마전 간현의 출렁다리에서 소녀가 투신했습니다. 문명세계라지만 전쟁이 끊이지 않고, 학살이 자행되고 있는 중입니다. 이게 바로 우리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해 주셔야 했던 실제적인 이유이며 목적입니다.

 

왜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죽음이 왕노릇하는 세상에 죽음 이후 생명의 부활의 소망을 갖게 하시려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내가 돌아 오지 못할 땅 어둡고 그늘진 땅으로 가기 전에 그리 하옵소서“(21) 이렇게 죽음 이후 부활의 생명과 죽음 이후 세계를 모릅니다. 이런 인류를 위해서 예수님은 하늘에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시고 무덤에 내려가셨다가 그 무덤에서 사흘 만에 다시 살아 나오셔 승천해 보이셨습니다. 말하지만 예수님은 인류에게 죽음 후에 생명의 부활이 있다는 것을 당신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으로 시청각적으로 알게 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으로 우리는 죽음 후의 부활과 사후 세계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게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실제적인 이유이고 목적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 11:25,26) ”내가 산 것 같이 너희도 살겠음이라“(요 14:19)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2,3) 주님은 이 말씀을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으로 이루셨습니다.

 

이 시간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된바 되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를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 앞에서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 앞에서 부활을 보시고 십자가로 나가신 것 같이 죽음 앞에서 부활의 생명을 보며 부활을 소망이 넘치서 이 소망으로 죽음을 이길 줄로 믿습니다. 이번 부활절에 예수님 같이 죽어도 살 부활의 소망이 분명해지고 죽음 이후의 세계, 천국의 소망이 분명해서 죽음 앞에서 삶을 고백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왜 예수께서 부활 하셨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신 것은 부활과 부활의 영광스러운 세계에 대한 비전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부활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과 같이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부활은 현대주의자들이나 실존주의자들의 말과 같이 이념적이거나 정신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로 죽은 사람이 다시 사는 것입니다.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 “ 이게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그러면 이 몸의 부활과 부활세계는 어떤 것입니까?

 

이것을 분명히 알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부활하셔 친히 사십일 동안 당신을 나타내 보신 겁니다. 부활한 예수님의 몸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 몸입니다. 그러나 이 부활의 몸은 죽음에 종노릇하는 그 육신이 아니라 신령한 몸입니다. 부활한 예수님은 문을 열지 않고 방에 들어오셨습니다. 보이기도 하고 보이지 않기도 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부활한 예수님을 볼때에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도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부활한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셨습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한 예수님을 보자 눈이 멀었습니다. 부활한 예수는 변화산에서 본 영광의 하나님의 광채 그 자체이셨습니다. 부활 때에 우리가 이 강하고 썩지 않고 죽지 않고 영광스러운 운 신령한 몸으로 부활합니다.(고전 15:42-44) 부활 때 우리 영이 이 신령한 몸을 입습니다.

 

왜 신령한 몸 영화靈化된 몸을 주십니까? 육신은 천국을 기업으로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육신은 물질 세계인 땅에 맞는 몸이라서 신령계 천국에서는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땅에 있을 때는 땅에 최적화된 육신을 주신 것 같이 부활 때는 신령계 천국에 최적화된 영의 몸을 주십니다.(고전 15:38-41) 그래서 우리는 부활의 날에 마치 물에 최적화된 몸을 가진 물고기가 강과 바다를 누비고, 하늘에 최적화된 새가 마음껏 창공을 날 듯 천국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이 부활로 이 부활의 영광과 영광의 세계를 분명히 보이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이 후폐하는 육신에서 이 영화로운 몸을 봅시다. 이게 이 육신의 귀중성입니다. 이 죽고 썩을 육신가지고 죽지도 썩지도 않는 영광의 몸을 입습니다. 그러므로 이 부활의 소망으로 이 육신으로 사는 동안 이 육신 가지고 하늘의 형상의 몸을 이루는 이 구원을 이루어 갑시다. 이 구원의 삶으로 이 부활의 세계를 몰라 먹고 마시는 이 세상에 빛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왜 예수께서 죽으시고 사셨습니까?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생명의 귀중성과 그 삶을 이루는 소망과 능력이 되게 하시기 위해섭니다. 영화”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마지막 전투 씬에서 죽어가는 밀러 대위는 라이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제임스... 값지게 살아라. 값지게" 마지막 장면에서 이 라이언이 밀러 대위의 무덤에 찾아와서 자기 부인에게 "훌륭하게 살았다고 말해줘. 내가 좋은 사람이었다고 말해줘." 자기 한 사람을 살리려고 여러 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라이언은 삶의 소중함을 안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그러신 겁니다,

 

욥은 고난으로 낙심하여 심령이 상하자 생명을 죽음만 못하게 여겼습니다. 삶에 대한 희망을 놓은 겁니다. 이제 죽는 것이 희망이라고 합니다. 이게 창조하시고 구속하신 하나님께 대한 최악의 불신앙이며, 죄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이런 인간을 위해서 피 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한 것이 되게 하셨습니다. 삶이 소중한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죽음 앞에서 살 소망이 있게 하셨습니다. 이 부활의 신앙과 소망이 삶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부활의 소망으로 죽음을 이기며 사는 사람이 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롬 6:8) 이게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생명과 삶을 존엄하게 아는 것입니다. 믿음은 삶을 은총으로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생이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축복이 되었습니다. 이 신앙이 어떤 환경에서도 부활의 소망으로 삶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고 이기는 삶을 살게 하는 줄로 믿습니다. 이 부활 신앙이 가브라 마이클로 하여금 이렇게 기도하게 했습니다.

 

“끝까지 신앙을 지키게 하소서./이 세상에서 형제들을 다시 볼 희망이 없나이다./그들이 나를 죽인다면/ 내 신앙의 증인이 되어 죽게 하소서/ 만일 내가 산다 해도/ 계속해서 증인이 되게 하소서! 우리는 죽음 앞에서도 이렇게 삶을 노래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이 오늘 새벽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부활절과 부활의 생명을 경하드립니다. -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