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강론

부활이란 무엇인가?

아브라함-la 2024. 4. 4. 17:14

024, 부활절

본문 : 고전15:35-49

말씀 : 라인권목사

 

     할렐루야! 복된 부활절을 축하드립니다. 우리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유월절 어린양을 잡던 시간에 운명하시고, 아리마대 요셉이 자기를 위해 준비한 무덤에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 부활의 처음 익은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네가 이것을 믿느냐”고 하셨습니다. 이 부활이 우리의 영광의 소망입니다. 오늘은 이 영광의 소망을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해서 부활이 무엇인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부활은 영적이거나 정신적인 것이 아니라, 죽은 사람의 몸이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사람이 죽으면 즉시 그 영혼이 영광의 나라 천국에 들어가고, 그 영혼이 살던 몸은 무덤에서 있다가, 때가 차서 예수께서 두 번째 다시 오시는 재림의 나팔 소리와 함께 무덤에 있던 그 몸이 다시 사는 것이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이렇게 사도들을 따라서 몸의 부활을 믿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이렇게 부활이 영적인 것이 아니라, 육신인 몸이 다시 사는 것임은 예수님의 부활이 그 증거입니다. 부활한 예수님의 몸은 못 자국난 손과 창 자국이 난 옆구리를 보이실 수 있고, 그 못 자국을 만지고, 옆구리에 손을 넣을 수 있는 것입니다.(요20:20,27) 부활한 예수님이 열한 제자에게 나타났을 때에 제자들은 보는 것을 영으로 알았습니다. 그때 주님은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아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눅24:37,39)이렇게 부활이 영적인 것이 아니라 육체적 것이어서 사도 요한은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진바라고 하셨습니다, 프랜시스 쉐퍼는 이 육신의 부활을 강조하여, 예수님이 승천하시므로 지구 무게가 줄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부활은 정신적인 것이 아닙니다. 현대주의자들은, 예수의 부활은 실제적이 아닌 신앙적인 것이고, 예수님의 정신과 가르침의 구현을 부활이라고 합니다. 톨스토이는 그의 명작 <부활>에서 타락한 사람이 예수님 같이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사람이 되는 것을 부활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실제로 죽어서 장사 지낸 그 몸으로 다시 사셨습니다. 부활은 이 몸, 죽을 몸, 장사될 이 몸, 장사되면 썩을 이 몸이 다시 사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 몸의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몸의 부활을 믿고 이 부활의 소망을 새롭게 하시는 부활절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둘째, 부활은 소생과 같은 것이 아니라, 영생 불사로서의 부활입니다. 영어 revive는 소생시키다, 되살아나다는 뜻으로 헬라말은 “아나스타시스”는 “일으켜 세우다”라는 뜻입니다. 나무 위키는 “부활(復活)은 생물학적으로 생명활동이 완전히 정지된 생명체가 소생하여 다시 되살아나는 것을 말한다 국어사전은 “쇠퇴한 것이나 없어진 것이 다시 성하게 일어남”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부활이라는 단어의 뜻은 소생이지만, 소생은 부활과 다릅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은 방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은 장사하려 묘지로 운구하는 중에 다시 살아났고, 나사로로 죽어 나흘 만에 장사한 무덤에서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다시 병들고, 늙고 죽고 다시 장사되었습니다. 이걸 소생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부활은 이 소생과 달라서 영원히 죽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사는 것입니다. 부활은 영생불사의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이요, 우리의 소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몸의 부활과 더불어 영생을 믿습니다. 이게 은혜입니다. 죽음이 우리는 죽지 않는 영생불사의 몸의 다시 나오게 합니다. 죽음은 단지 우리 육신을 죽게 하나, 그것이 영생의 몸을 입게 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두려워 맙시다. 이 부활로 죽음 앞에서 영생의 소망을 가지시기를 축복합니다.

 

셋째, 부활은 이렇게 몸의 부활이되 신령한 몸으로 변화된 부활입니다. 즉 부활은 이 육신의 연속이지만 전혀 새로운 형태의 신령한 몸이라는 것입니다. 이걸 설명한 것이 본문 35-38절 말씀입니다. 밀알을 심으면 서울 아이들 말로 밀 나무가 나오고 쌀 나무가 나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씨와 나무가 같지만 다르다는 것입니다. 도토리와 도토리나무가 다른 것과 같습니다. 도토리나무는 도토리에서 나와서 하나이지만, 도토리라는 씨와 도토리 나무는 다른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부활은 몸의 부활이지만 지금의 죄가 있고, 죽고 썩는 몸이 아니라, 죄도 없고 죽지도 않고, 썩지도 않는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는 것이 부활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부활로 신령한 몸을 주십니까? 그것은 창조의 하나님은  살아야 할 세계에 적합한 형태의 몸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물질계이므로 물질계에 적합한 형태의 몸인 육신의 몸을 주셔서, 육신으로 이 세상을 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부활한 몸은 천국에서 살 몸입니다. 천국은 물질적인 나라가 아니라, 신령계입니다. 이 신령계를 살아야 할 몸이기 때문에 부활 때에 천국에 맞는 형태의 몸인 신령한 몸을 주십니다. 천국은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곳이므로 부활로 죄의 몸을 벗고, 죄성이 없는 몸을 입히십니다, 썩지 않는 몸, 죽지 않는 몸, 하늘에 속한 예수님과 같은 영광스러운 몸을 입히십니다. 그래서 마치 하늘에 속한 새가 하늘에 최적화되고, 물에 속한 물고기가 물에 최적화되어 마음껏 누비는 것 같이 천국을 누리게 하십니다. 지금 우리의 약하고 천하고 욕된 몸이 이렇게 신령하고 영광스러운 몸이 됩니다. 이 영광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넷째,  따라서 이 부활은 새 능력을 입는 것입니다. 썩는 않는 능력을 입습니다.(42) 욕된 것이 영광스럽게 사는 능력을 입습니다. 약한 것이 강한 것으로, 죽을 것이 죽지 않는 능력을 입습니다.(53) 그리고 이로 사망을 삼키고 이기는 능력을 입습니다. 이 능력으로 사망을 조롱하고 발로 밟는 승리하는 삶을 살고, 흔들리지 않고 주의 일을 힘쓰는 영원한 생명의 삶을 살게 합니다.(53-58)이게 부활입니다. 우리에게 이 부활이 있습니다. 이 영광의 소망의 날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우리 고장 이천은 이 부활의 소망과 능력을 증거 하는 단내와 어농 순교지라는 소중한 유산이 있습니다. 단내는 성가정 성지라고 하는데 정은, 정양묵, 이호영, 이소사 가족이 순교해서입니다. 이소사 아가타는 신유박해 때에 체포되어 갖은 악형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집행관이 글자에 점 하나를 찍으면 배교로 인정하겠다고 회유해도 거절하고, 여자의 몸으로 벗은 몸으로 매달려 맞는 악행에도 굴하지 않고 순교를 원한 것은 죽음은 부활의 몸을 갖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고” 부활의 소망으로 사망을 밟고 승리한 것입니다. 우리 이천에 이 부활 신앙이 살아나기를 소원하고 축복합니다.

 

은혜로 가족 여러분! 이게 부활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죄와 사망에 종노릇 하는 우리에게 이 부활의 생명과 능력을 주시려고,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지금 우리 중에 계십니다. 우리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 예수님과 같이 부활의 영광에 이를 것을 확신합시다, 이 영광의 소망으로 죄와 사망을 이기고, 죄와 사망에서 풀어 살리는 부활의 삶을 살아가시다가, 우리 다 함께 영광의 부활의 날에 이르시기를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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