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4, 12 주일강론
본문 : 삼하15:24-29
말씀 : 라인권목사
할렐루야! 부활절 둘째 주일입니다. 우리교회 주변을 보시면 봄꽃들이 만발 했습니다. 저는 부활의 은혜와 능력으로 우리 성도들의 인생과 삶도 꽃처럼 피어나시기를 소원합니다. 여러분의 인생과 삶이 활짝 피는 봄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저는 환난의 세월을 보내면서 찬송가 “나의 갈길 다가도록”에서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를 얻고, 반석에서도 샘물 나게 하시는 은혜를 실감했습니다. 이 세상을 사는 동안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는 우리는 다윗과 같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가는 동안에도 주께서 함께 하시고 나를 지키시고 건저주시기를 갈구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다윗은 이 신앙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요새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오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오 나의 방패시오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시18:2)이것은 우리의 바람만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의 언약이시기도합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시50:15)이 말씀은 우리교회의 표어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환난을 당했을 때에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오늘의 말씀은 우리가 환난에서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실제적으로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다윗이 압살롬의 난을 당하여 예루살렘을 내주고 피난하기로 결정하자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과 레위인들이 하나님의 법궤를 메어다 내놓고 다윗을 기다렸다고 합니다. 이때의 일을 24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라 사독과 그와 함께 한 모든 레위 사람도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어다가 하나님의 궤를 내려놓고 아비아달도 올라와서 모든 백성이 성에서 나오기를 기다리도다” 왜 이렇게 감격했을까요?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피난 가는 다윗을 따른다는 것은 다윗의 왕위의 정통성과 정당성을 인치는 행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를 메고 따른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무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요 하나님이 다윗 편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이 법궤를 메어다 놓고 기다리는 모습에 감격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다윗도 제사장들과 법궤가 자기와 함께 있는 것이 좋았을 것입니다. 분명히 다윗은 제사장들과 법궤를 데려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제사장들에 이 법궤를 있던 곳으로 도로 메어 가도록 하게하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입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게 그 궤와 그 계신 데를 보이시리로다 그러나 그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하시면 종이 여기 있사오니 선히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환난 중에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실제적으로 배우게 됩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환난 중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의 의미를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하여 부정적인 의미를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환난에서 하나님을 믿음의 부정적 의미
첫째 환난 중에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가 급하거나 필요할 때에 하나님을 내 편하고 나 좋을 대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과 엘리의 두 아들과 비교해보면 분명해집니다.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하여 4천 명 가량이 전사하자 성막에서 법궤를 메어오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법궤를 메어 온 것은 더 큰 불행을 불렀습니다. 참패하고 법궤까지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왜 법궤를 모셔 왔는데도 패합니까? 그것은 이들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믿어 경외 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경외함이 없이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에 볼과 합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를 우상과 같이 자기의 필요에 부응하는 신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기 필요에 따라서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드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망령되이 여기십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과 그 임재의 상징인 법궤를 자기를 중심으로 이리저리 옮기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하나님께 맞추려고 했습니다. 은혜를 베푸시면 다시 보시게 하고, 그렇게 아니하신다고 해도 하나님이나 그 임재의 상징을 자신을 위하여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다윗의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환난 중에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내게 유리하고 유익하게 이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신앙이 아니라 우상 숭배며 일종의 무속신앙에 불과한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 환난 중에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기계적이거나 미신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홉니와 비느하스가 법궤를 모셨는데도 왜 패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여 법궤를 모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인격적이시기 때문에 불의와 함께 하실 수가 없으십니다. 도리어 진노하십니다. 따라서 홉니와 비느하스가 하나님을 경멸한 죄를 회개치 않고 법궤를 모신 것은 신앙이 아니라 마치 우상과 같이 법궤만 있으면 하나님은 무조건 함께 하실 것 같이 기계적으로 믿는 미신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과 그 임재의 상징을 기계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면 내가 하나님 계신 데를 보게 되고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시지 않으시면 그것도 수용하겠다고 하나님을 살아계신 인격적인 하나님으로 경외하여 회개하는 태도를 가집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면 법궤를 가져가도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남방 유다가 바벨론에 망할 때의 일을 잘 압니다. 유다가 망할 때에 우리에게는 성전이 있으니 안전하고 평안 하다고 기계적으로 하나님이 지켜주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이 거짓된 확신이 결국 성전은 무너져 불타고 포로 되게 했습니다. 이렇게 환난 중에 이 기계적인 신앙으로 생긴 거짓된 자기 확신이 자기를 멸망으로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려울 때 여전히 불신앙의 길을 가고 불의의 길을 가면서도 기도만 하면 하나님께서 무조건 들어주시고 해결해 주실 것으로 아는 기계적인 미신을 믿음으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거짓된 확신으로 작정기도를 하고 금식 기도하는 것은 자기기만이며 거짓된 위안입니다. 사탄은 환난을 당한 성도에게 이 미신에 빠지게 합니다. 미신을 신앙으로 착각하게 하여 거짓된 소망을 가지게 만듭니다. 사탄은 이 거짓된 확신과 위로와 소망을 가지게 하여 파멸을 피할 수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환난 중에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살펴봅시다.
환난에서 하나님을 믿음의 긍정적인 의미
첫째 환난 중에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신뢰하여 의의 길에 굳게 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믿는 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내가 불의하여 환난을 당하고 있다면 그 환난을 하나님의 징계로 알고 나의 불의를 인정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징계를 달게 받아드린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하시면 내가 여기 있사오니 선히 여기시는대로 행하시옵소”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신앙입니다. 다윗은 환난에서 자신의 허물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마음으로 징계를 달게 받으려고 합니다. 이것이 환난 중에 진정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 이 믿음이 환난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하는 줄로 믿습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을 신뢰하여 승리를 확신 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법궤와 제사장들을 돌려보내는 것은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운 왕권을 반역하고 그것을 부추기는 일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불의입니다. 다윗은 이 불의에는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판을 내리실 것을 굳게 믿고 의의 길에 굳게 섰습니다. 이것이 시편의 중심 사상입니다. 이 신앙이 다윗을 의연하고 담대하게 하고, 구원을 확신케 했습니다. 이것이 오히려 원수에게 후덕하게 할 수 있게 했습니다. 이것이 곧 환난 중에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렇게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확신하고 환난 중에서도 의의 길에 굳게 서는 사람의 피할 비위가 되어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의 환난 날에 방패와 산성이 되어 주시고 건지는 구원의 하나님이 되어 주시고 숙여진 머리를 원수 앞에서 들게 해주시기를 즐거워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환난 날에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믿고 환난 중에서 굳게 의에 서시기를 바랍니다. 이게 믿음입니다. 제가 환난에서 승리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이 살아계십니다. 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에 길을 환난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굳게 걸으면 의로우신 하나님이 피할 바위가 되시고 방패와 산성이 되어주시어 환난에서 위로를 받고 승리를 주실 줄로 믿습니다.
둘째 환난 중에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에 소망을 두고 하나님을 바라며 의지하는 것입니다. 다윗은“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입으면”이라고 합니다. 자신에게 허물이 있다고 해도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에 소망을 두고 하나님의 은혜의 얼굴을 구했다는 것입니다. 시32:1이 대표적인 구절입니다.“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기의 죄가 가려진 사람은 복이 있도다” 자신의 좌와 허물이 크지만 하나님께서는 자비로우셔서 통회하는 자신을 죄 없다고 용서하여 죄를 가려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자기가 의로워서가 아니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이 자신의 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시편의 중심 사상입니다. 그래서 시편이 종교개혁의 산실이 된 것이며, 사도바울이 여기서 칭의의 교리의 근거를 본 것입니다.(롬4:6)
이 믿음에서 자신의 허물로 인하여 인과응보의 원리로 만들어진 환난에서도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 자비하심으로 인하여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어 환난에서 자신을 건져 주실 것을 확신하는 믿음이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 노염은 잠간이요,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자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시30:5)
이것이 환난에서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환난 날에 이 믿음으로 당신을 찾고 당신께 오기를 기다리십니다. 환난 날에는 죄책이 하나님의 은혜를 믿지 못하게 합니다. 낙심되어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기도하지 못하는 시험에 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환난에서도 이 믿음으로 당신의 얼굴을 구하고 의지하여 당신께 기도하여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신뢰하면 오히려 하나님이 감동하여 나의 환난 날에 피할 바위가 되어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이 믿음을 환난 날도 이 믿음을 고백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환난 중에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그 기쁘신 뜻에 자기를 복종 시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은혜를 베푸시면 내가 돌아가서 하나님 계신 데를 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시지 않으신다면 그래서 내가 다시 돌아가서 하나님의 궤를 보지 못하게 된다고 해도 나는 하나님의 그 뜻에 순복하겠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을 믿었습니다. 이것이 환난 중에서 하나님을 믿는 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환난에서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에 자기를 복종시키면 환난에서 어떤 유익을 누릴 있습니까?
첫째 입술로 범죄 하지 않고 욥과 같이 하나님을 경배와 찬송을 드릴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환난을 이기는 믿음입니다. 환난에서 감사할 수 있고 찬송할 수 있는 것이 환난을 이기는 승리입니다. 둘째, 마음에 평강과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죽을까? 살까? 될까 안 될까? 지나치게 염려하고 걱정하지 않습니다. 살아도 하나님의 선한 뜻이요, 죽어도 하나님의 선한 뜻입니다. 다 좋은 것입니다. 셋째.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살게 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시고, 죽게 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신데 무엇 때문에 사람을 두려워하고 사람에게 비굴하겠습니까? 이것이 환난을 이기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환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자기를 복종시키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인줄로 믿습니다. 이 신앙이 환난에서 하나님을 나의 방패 되게 하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을 우상과 같이 내 좋을 대로 이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불의하여 환난을 당하면서도 회개 없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하나님이 응답하시고 건져주실 것으로 기계적으로 믿는 것은 미신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환난에서 우리를 건지는 것이 아니라 피할 수 있는 파국을 피하지 못하게 하여 스스로 파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더러는 환난에서 거짓된 자기 확신으로 파멸의 길에서 돌이키지 못함을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믿고 환난 날에도 굳게 하나님의 의에 섭시다. 거기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확신하고 은혜의 얼굴빛을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환난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을 믿고 그 뜻에 자기를 복종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환난 중에 하나님의 은총을 입는 믿음이라는 것을 확신하시고 평소에 이 믿음을 기르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환난이 나의 받을 잔일 때에는 다윗과 같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신뢰 하므로 환난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보시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을 환난에서 건지시기를 기뻐하시는 구원의 하나님이신 것을 찬양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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