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경 강 해/환난 중에 그리스도인

환난과 그리스도인의 기품

아브라함-la 2015. 3. 23. 11:21

2015, 3, 22, 주일강론  

본문 : 삼하15:19-23 

말씀 : 라인권목사


    고난은 사람으로 인해서 일어나고 당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무섭습니다. 사람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또 하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당하는 고난을 극복하는 것도 사람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자는 “한 사람보다 두 사람이 나음은 한 사람이 넘어지면 그 동무가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줄 사람이 없는 자는 화가 있으리로다”고하셨습니다.(전4:9,10)어려우면 사람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여기저기 도움을 구하다가 구하지 않을 데서 구하면 도리어 인간관계만 소원해집니다. 도움을 받으려다가 도리어 원수를 끌어 들이는 환난을 자초합니다. 도움을 받아도 상처 받고 비참해지고 비굴해지고 비루하고, 남루해집니다. 그래서 고난에 직면하면 도움을 받을 것인가? 도움을 받아야 한다면 어떤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할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의 본문을 우리가 눈 여겨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말씀은 다윗이 압살롬의 난을 당하여 예루살렘을 비우고 피난을 할 때에 어떤 이들이 다윗을 따르는지를 소개합니다. 사람이 어려움을 당하면 첫 번째 일어나는 현상이 사람이 떠나는 것입니다. 평소에 내가 잘 나갈 때는 주변에 사람이 많습니다. 잘나가면 친구가 되겠다는 사람이 많고 도움이 필요 없는데 도와준다고 합니다. 그러나 내가 어려워지면 있는 친구도 떠나는 법입니다. 다윗도 그랬습니다. 친구가 원수가 되고 자기편은 줄고 압살롬의 편은 점점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람이 그립고, 사람을 붙잡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런 처지의 다윗에게 본문을 보면 아주 고무적인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것이 마치 지는 해와 같이 되어 도망치는 다윗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울며 따르고, 제사장들이 법궤를 모시고 나오고, 친구 후세가 피난 가는 다윗을 마중 나옵니다. 이 사람들은 다윗을 떠나는 것이 대세일 때에 다윗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 중의 하나가 바로 잇대라는 블레셋 사람입니다. 잇대는 아마도 다윗이 블레셋에서 망명생활을 할 때에 다윗에게 감명을 받고 다윗을 따라왔거나 다윗의 왕정에 감화를 받고 귀순하여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사람이 된 사람 같습니다. 이 잇대가 다윗을 따르는 것은 다윗에게 아주 고무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다윗은 이해할 수없는 결정을 합니다. 붙잡아도 부족할 판에 용사인 잇대를 돌려보내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지금 다윗은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군대를 필요로 할 때입니다. 이런 때에 용맹한 잇대와 그를 따르는 육백 명을 돌려보내서 그들의 도움을 거절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 잇대를 돌려보내는 것은 다윗을 따르는 무리의 사기에 찬물을 끼얹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을 따르는 사람들을 소개할 때에 먼저 잇대를 언급한 것은 잇대가 다윗을 따르는 것이 다윗의 사람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들과 친구도 다윗을 배신하는데 이방인이 이해관계를 떠나서 다윗을 따르는 모습에서 백성들은 다윗의 인격을 보았을 것이고 감명을 받았을 것입니다. 용기와 도전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그를 돌려보내려고 합니다. 백성들의 눈앞에서 잇대가 떠나가는 것을 보면 백성들이 흔들릴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오히려 잇대가 자신을 떠날까 노심초사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잇대만 보내려고 한 것이 아니라, 자기 가족들과 신하들만 따르게 하고 예루살렘 백성들을 따르라고 설득하거나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의 인품을 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얼마나 이스라엘의 왕다운 기품이 넘치고 품위가 넘치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그 환난 속에서도 이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생명과 왕위를 유지하면서도 의연하고 당당하여 기품이 넘치고 있습니다. 다윗은 어떻게 이렇게 환난 속에서도 기품 있게 행동할 수가 있었습니까? 무엇이 다윗으로 하여금 그 기품과 품위를 가지게 했을까요? 다윗은 무엇으로 도움을 받으면서도 남루해지지 않고 오히려 기품을 유지 할 수가 있었습니까? 


  

환난 속에서도 기품을 가지게 하는 것

먼저 유불리보다 덕을 기준 하는 믿음의 은혜가 부덕이 아니라 덕을 세우게 합니다. 다윗이 자기의 유불리를 기준으로 했다면 잇대가 돌아갈까 봐 잇대의 눈치를 볼 입장입니다. 이렇게 되면 다윗이 얼마나 없어 보이고 얼마나 비루해집니까? 그런데 다윗은 돌아가라고 합니다. 왜요? 잇대는 자기에게 망명 온 이방인입니다. 자기 하나보고 왔습니다. 그는 그의 품에서 보호와 도움을 받을 사람입니다. 그런데 다윗 자기가 정처 없이 가게 된 처지에 그를 끌어들이는 것은 그에게 잔인한 일이고 부덕한 일입니다. 그래서 덕스럽게 잇대의 도움을 사양 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은혜입니다. 믿음은 먼저 덕을 세우게 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은혜가 분별력을 가지게 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기준입니다. 덕이 된다면 도움을 거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덕이 안 된다면 죽어도 폐가 되지 않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바울도 그랬지요, 복음 사역에 누가 되는 것은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구하지 않는 다고 했습니다.(고전9:15) 부덕해지는 것보다 차라리 도움을 받지 않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자는 “네 환난 날에 형제의 집에 들어가지 말라”고 하셨지요.(잠27:10) 이 믿음이 환난 속에서도 그리스도인의 기품을 잃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환난 속에서 사람의 도움을 구할 때에는 믿음으로 덕을 기준해서 도움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성도가 됩시다. 그래서 환난 중에서 도움을 필요로 해도 여전히 품위 있는 성도가 되고 기품을 잃지 않는 멋진 성도가 됩시다. 이 기품, 이 품위로 환난을 승리로 통과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둘째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고 의지하는 믿음의 은혜입니다.

다윗이 사람을 두려워하고 사람을 의지하려고 했다면 잇대와 백성들의 눈치를 살폈을 것입니다. 잇대의 도움을 무조건 받아드리는 것이 부덕한 일인 줄 안다고 해도 백성을 두려워하고 의지했다면 잇대의 도움을 거절하는 덕을 세울 수가 없었을 겁니다. 이렇게 사람을 두려워하여 잇대와 백성들의 눈치를 보았다면 왕답지 못합니다. 왕으로서의 품위와 지도력과 권위를 상실해서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들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람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의지했기 때문에 거절할 줄도 알았습니다.


이때의 다윗의 믿음을 시3편은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오 나의 영광이시오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 성산에서 응답 하시는도다.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이 믿음이 사람 앞에 당당하고 환난에서도 기품 있게 했습니다.


다윗이 어떻게 이렇게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주님만 의지하게 되었을까요? 사울의 환난을 당하면서 사람을 의뢰히는 것이 헛되고 하나님만 참되심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아들이 자기를 반역하고 친구가 배신하는 것을 통해서 사람을 의지하는 것이 갈대를 의지하는 것과 같음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만 두려워하고 의지하는 담대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만 의지하고 덕을 위해서 거절도 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 도움을 받으면서도 왕의 기품을 잃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난을 통해서 사람을 의지하는 것이 헛됨을 배워서 더욱 주님만을 두려워하고 의지하는 믿음을 가집시다. 이 믿음으로 환난 속에서도 사람 앞에 비굴하지 않고 의연히 그리스도인의 기품을 나타냅시다. 환난 앞에서 당당하고 기품이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환난을 통과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셋째, 하나님이 나를 세웠다는 소명을 확신하는 믿음 때문입니다.

아들의 반역을 당하면서도 다윗이 왜 당당하고 기품 있습니까? 따르겠다는 잇대를 가라고 합니다. 따르는 제사장들을 남으라고 하고 정세를 탐지하여 보고하라고 합니다. 후새에게는 다윗 자기를 위하여 압살롬에게 위장 전향하라고 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당당하고 의연하게 할 수 있습니까? 심지어 이렇게 저주할 수 있었습니다.

시3:7을 보세요,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나의 모든 원수의 빰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어떻게 이렇게 저주할 수 있습니까? 나의 원수가 하나님의 원수인 것은 내가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세운 왕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 나라를 위하여 헌신하게 세운 왕입니다. 이 왕을 따르는 것은 인간 다윗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것입니다. 이것을 소명감이라고 합니다. 이 소명감이 우리를 당당하게 합니다. 의연하게 합니다. 품위 있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부끄러움을 모르는 놋이나 금강석 같은 얼굴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수염을 뽑아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 소명감입니다.(렘1:18,19,사50:6,7)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거룩한 백성들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입니다. 이 자기로 서야 합니다. 이 자기 정체성이 우리를 환난 속에서도 덕이 되게 합니다. 사람 앞에 당당하게 하고 기품 있게 합니다. 이 권위로 도움을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 이 권위로 도움을 거절할 수도 있는 것이 부름을 받은 사람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이 믿음으로 환난을 기품과 품위로 통과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인 것을 확신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고난 속의 믿음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합니다.



고난속의 믿음이란

믿음은 환난 중에 도움을 구할 데와 도움을 구하지 않을 데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입니다. 구하지 않을 사람에게 가서 손을 내밀면 쪽박만 깨고 비루해지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늘 덕을 우선합니다. 믿음은 덕이 안 되면 도움을 거절하게 하여 환난 중에도 그리스도인의 기품을 잃지 않게 합니다. 이 믿음이 자타의 구원이 되고 그러므로 믿음은 도움을 분변하는 지혜요 능력입니다. 이 믿음의 능력으로 도움 받을 데를 분별하여 환난을 승리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따라서 믿음은 환난 속에서 진정한 도움을 구하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도움을 받을 데와 거절할 데를 분별하기 때문에 곰을 피하려다가 사자를 만나는 우를 피하게 하고 진정한 도움을 주는 사람을 받을 만나게 합니다. 믿음은 진정한 도움이고 구원인 하나님을 만나게 하고 의지하게 합니다. 그래서 환난을 이깁니다. 제가 환난에서 승리 하고 하나님의 종다울 수 있었던 것은 어떤 도움은 거절할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의연하고 당당하게 하나님을 바라보고 거절할 때 하나님이 제 손을 잡아주셨고, 형제보다 나은 친구를 주셨습니다. 이 믿음으로 환난 중에 참된 도움을 만나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도움과 구원을 만나기를 축복합니다.


따라서 믿음은 환난을 그리스도인의 기품으로 통과하게 하는 능력이자 축복입니다.

환난을 당하면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비루하고 비참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도움을 구하고 무분별하게 도움을 받아드리다가 더 비참해지고 비루해지고 남루해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믿음은 사람보다 주님을 두려워하고 의지하게 합니다. 그래서 환난 중에 도움을 받을 입장에서도 비굴하게 사람의 눈치를 보고 얼굴을 살피지 않고 의연합니다. 도움을 받아도 기품 있게 받습니다. 이것이 우겨싸임을 당해도 싸이지 않고 가난한 것 같으나 부한 자요,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가 같으나 사는 자입니다.


이것이 저로 하여금 환난속에서  승리하게 했습니다. 죽게 되었도 타협하고 굴복하여 천해지기 보다는 목사답게 서기를 원했습니다. 고난의 정점에 있을 때 기도원 집회에서 기도를 받았는데, 그때 은사 받은 강사목사의 첫 마디가 “사랑하는 내 종아 너는 젠틀맨이로다”이었습니다. 여러분! 백합이 흔들리고 찔리면 더 향기로운 것 같이 그리스도인은 환난 속에서 인격이 향기롭고 더욱 고고하고 기품이 넘치는 사람인 줄로 믿습니다. 이 믿음이 의연이 십자가의 길을 가신 주님을 닮은 길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 주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환난을 당할 때 사람에게 멸시받고 조롱과 조소의 대상이 되는 것을 원통하게 여기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죽을 지경이 되어 사람의 도움을 구할 때에도 천대가 존경을 받기를 소원하십니다. 당신의 백성들이 스스로 사람 앞에 자신의 남루하게 하고 비루해지는 것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환난 중에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의 나라의 왕으로서의 기품과 품위를 잃지 않는 다윗을 앞세우고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 다윗의 사례로 우리를 고난 속에서도 기품을 가진 그리스도인으로 우리를 세워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이 믿음을 가지면 주님은 환난 당하는 우리게 놀라운 복을 주십니다. 그 복이 돌려보내도 돌아가지 않는 동지를 보내주십니다. 눈물로 따르는 동지와 친구를 주십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이 돌아와 주십니다. 주님이 힘이 되시고 방패가 되어주십니다. 그래서 이기게 하시고 상처가 없는 영광의 승리를 주십니다. 제가 환난 중에 의연하게 하나님의 종의 기품으로 거절해야 할 구차하고 치사한 도움을 거절하자 하나님은 이런 친구를 주셨습니다. 주님이 친히 제 도움이 되시고 영광이 되어주셨습니다. 이 은혜로 이기고 지금 이 시리즈를 강론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므로 이 믿음을 사모합시다. 이번 갈멜산 기도회에서 이 믿음을 기르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리하여 환난을 그리스도인의 기품으로 통과 하여 승리하시고 십자가를 지시면서도 기품이 넘치는 주님의 형상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