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경 강 해/환난 중에 그리스도인

환난에 대처 하는 그리스도인의 결정

아브라함-la 2015. 3. 9. 14:57

2015,3,8, 주일 강론 

본문 삼하15:13-23 

말씀 : 라인권목사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는 말이 있습니다. 첫 단추를 잘못 키우면 그 다음부터 이루어지는 작업이 전부 잘못됩니다. 그래서 전부를 다시 해야 합니다. 시간도 품도 더들어가게 됩니다.왜 첫 단추를 잘못 끼울까요? 그것은 급해서 서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처리하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불시에 고난이 밀어닥치면 당황해서 바르지 못한 결정 내려 일을 처리합니다. 그 결과 일이 해결 되는 것이 아니라 자꾸 일이 꼬여서 더 어렵게 되고 문제가 더 커져서 더 큰 고난을 당하고 더 길게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고난이 왔을 때 그 고난에 대처 할 바른 결정을 내리는 것에 사활이 걸려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의 본문은 고난 중에 있거나, 막 고난에 직면한 사람들에게 큰 빛이 되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어떤 내용입니까? 지금까지 우리가 다윗이 어떻게 압살롬의 난을 만들고 키워왔나를 보았다면 오늘의 말씀은 드디어 반역이 터진 것을 보여 줍니다.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 왕에게 앙심을 품고 4년 동안 치밀하게 반역을 준비했던 압살롬이 드디어 헤브론에 반역하여 아버지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려 군사를 휘몰아 예루살렘으로 밀려오고 있다는 보고를 들었습니다. 이런 기막힌 환난이 어디 있습니까? 다윗은 일생의 최대의 고난에 직면했습니다. 이제 일이 터졌습니다. 따라서 다윗은 이 압살롬의 난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그 길, 방법을 결정해야 했습니다. 다윗은 어떻게 결정했습니까? 신속하게 예루살렘을 버리고 요단강을 건너서 요단 동편으로 피하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가족과 신하들과 그를 따르는 백성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를 건너서 여리고로 향하는 광야 길을 잡아들었다는 것이 오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후에 다윗이 압살롬의 난을 성공적으로 해결하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보면 몇 번 번의 분수령이 있습니다. 그 첫째가 예루살렘에서 신속한 퇴각 한 것이고 둘째가 다윗의 일행이 무사히 요단강을 건너서 요단 동편으로 압살롬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것이고, 셋째가 후새가 아히도벨의 전략을 무산 시킨 것과 넷째가 에브라임수풀의 전투입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은 고난을 처리하는 첫 단추를 잘 키웠습니다. 이 결정을 기반으로 해서, 무사히 요단을 건너 피해서 시간을 벌고 전열을 정비할 수 있게 되고, 승리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다윗은 어떻게 그 기막힌 환난 속에서 신속하게 바른 결정을 내려 환난에 대처할 수가 있었을까요?


어떻게 황망한 고난 속에서 바른 결정을 내릴 수가 있었나?

다윗이 예루살렘을 버리고 신속하게 요단동편으로 피하기로 한 것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압살롬의 반역이 일자마자 예루살렘을 포기하고 도망치는 것은 다윗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모양세가 좋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난이 나자마자 맞서 해결해지 않으려고 하고 도망치는 것은 무능과 무책임으로 보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지지하던 백성도 다윗에게 비전이 없다고 생각하고 압살롬에게로 돌아설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비굴하게 도망치는 것보다는 당당히 맞서 싸우는 것이 의연해보이고 지도자답게 보일 것입니다. 영적으로 보면 맞서지 않고 도망하는 것은 믿음이 없어 보입니다. 아버지를 반역한 아들을 하나님 그냥 두시겠습니까? 믿음으로 맞서면 하나님이 불의한 압살롬을 당연히 이기게 할 것인데 왜 믿음으로 싸우지 않고 도망치느냐?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고 백성들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어떻게 신속하게 예루살렘을 포기하는 결정을 할 수가 있었습니까? 그 결정을 내리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이것이 우리가 우리의 환난 속에서 바른 결정을 내리는 기준입니다. 그리고 그 기준을 따라서 결정하게 하는 능력은 무엇입니까?


환난 앞에 바른 결정을 내리는 우리의 기준은?

첫째 다윗은 자기와 자기의 무엇이 기준이 아니라 백성을 기준으로 방침을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했다면 맞서 싸워서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것보다 더 중한 것이 있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기 생명, 왕좌, 자기 책임감, 자존감 보다 귀한 것이 백성과 백성들의 안녕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급하면 생존본능에 따라서 자기를 우선하고 자기를 중심합니다. 심지어 급하면 자식도 버릴 수가 있는 것이 사람입니다. 급하게 되면 자기만 생각합니다. 자기 위주로 저만 살려고 합니다. 이런 결정이 더 큰 고난을 만드는 겁니다.


그런데 다윗은 어떻게 자기가 먼저가 아니라 백성을 먼저 고려하는 결정을 할 수가 있었습니까?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은혜입니다. 다윗은 믿음의 은혜로 이것을 분별했습니다. 믿음은 자기는 백성들의 안위를 위하여 존재하는 종이라는 사명감을 재확인했습니다. 만약 예루살렘에서 맞서 싸우면 피아간에 많은 피를 흘릴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기보다 백성들을 위하여 예루살렘을 버리고 피하기로 결정하고 독려해서 무의미한 피를 흘리지 않게 했습니다. 그런 다윗에게 하나님은 피할 길을 주셨고, 다윗은 그 길을 분별해서 피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환난의 급박한 상황에서도 이 기준을 따라서 바른 결정을 내리게 하는 것입니다. 환난 앞에 이 믿음을 가지세요. 이 믿음의 능력을 발휘하세요. 그래서 고난에 대하여 바른 결정을 할 수 있고, 그 고난에 주시는 피할 길을 분별할 수가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자기가 기준으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 특별히 성전의 안전을 기준으로 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승부를 내려고 예루살렘에서 압살롬을 맞아 싸우기로 결정하면 결국 예루살렘은 내란의 참화를 입을 것입니다. 그러면 아직도 성막으로 있는 성전과 법궤를 실전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성막과 제단과 법궤를 잃는 다면 승리해도 승리가 아니고 지켜도 지킨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다윗은 예루살렘에서 일전으로 승부를 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을 벗어나서 승부를 내려고 했습니다. 이게 믿음의 능력이요, 믿음의 은혜입니다. 믿음은 환난의 황망 속에서도 나보다 하나님의 교회와 안녕과 영광을 기준으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가족과 싸워 이기면 뭐합니까? 부모자식이 싸워서 이기면 무엇 합니까? 교회에서 싸워서 이긴들 무슨 소용입니까? 이 믿음이 상처뿐이 영광을 위하여 싸우는 어리석음을 피하게 하는 줄로 믿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차라리 불의를 당할 지언정 불의를 행지 않았습니다. 저도 이 믿음으로 교회를 중심할 때 피할 길을 얻고 승리했습니다. 환난 앞에 이 믿음을 쓰시기 바랍니다. 이 믿음의 결정이 환난을 당할 때에 피할 길을 얻게 하고 그 길을 분별하여 따르게 하여 고난을 이기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할 줄로 믿습니다.


셋째로 덕을 기준으로 결정했습니다. 이 다윗의 환난은 하나님의 징계입니다. 그리고 아들과 싸워야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처음부터 맞서 싸우려고 하는 것은 징계 받는 자세가 아니요 오히려 하나님의 징계를 하실 테면 해보세요. 이렇게 무시하는 것이요. 덕이 안 되는 일입니다. 아들의 반역에 처음부터 맞서 싸우는 것도 그렇습니다. 일단 맞서지 않고 피하는 것이 덕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용사이고, 다윗의 신하들도 용사들이며, 예루살렘은 요새라서 싸우려면 싸울 수도 있었겠지만 다윗은 덕을 위하여 일단 물러난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가족 간에 싸워 이겨도 무슨 영광이 되며, 교인과 교인이, 목사와 교인이 싸워 이긴들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믿음은 자기의 이득보다 덕을 앞세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덕을 위하여 물러설 줄도 아는 것이 믿음이요, 덕을 위하여 피할 줄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고난에서 피할 길을 얻고 그 피할 길을 분별하게 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닥쳤을 때에 이 믿음으로 덕을 기준해서 바른 결정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주시고 진정으로 이기는 길을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고난 속에서 믿음의 의미는?

그러므로 고난 속에서 믿음의 의미는 믿음이란 내게 환난이 왔을 때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바른 해결 방법을 결정하는 능력입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왔을 때에 거기에 맞서서 싸워서 이기는 길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맞서는 방법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피할 길도 주십니다. 그래서 고난이 오면 맞서 싸워야 할지. 피해야 할지 그 방법을 결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갑자기 환난을 당하면 당황하고 조급해지고 감정적이 되어서 바른 결정을 못할 위험이 있습니다. 싸워야 할 것을 피하고. 피할 것을 싸우려고 합니다.그래서 바르지 못한 결정을 해서 일이 더욱 꼬이고 크게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난을 당했을 때 우선 일을 결정하되 바른 결정을 해야 합니다. 맞서 싸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결정하는 기준은 고난 속에서도 나 보다 공익을 기준 하는 것입니다. 나보다 교회를 기준 하는 것이요. 덕을 기준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이 기준을 세우게 하고 이 기준을 따라서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싸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내 목숨을 돌아보지 않고 싸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어떤 부끄러움을 감수하고 피할 수도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우리가 다윗과 같이 이 믿음으로 고난 앞에 바른 결정을 하면 하나님은 피할 길을 주실 줄 믿습니다. 그 길을 분별하여 피하게 하시고. 고난을 극복하고 승리하게 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고난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당하는 고난의 의미는

압살롬의 난을 인한 고난은 분명 다윗이 연약해서 만들고 키운 겁니다. 이것은 다윗의 허물과 어리석음을 잘 보여 줍니다. 그러나 다윗은 참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막상 압살롬의 난을 당하자 자기가 아닌 하나님과 성전과 백성과 덕을 따라서 예루살렘을 버리고 도망하는 결정을 합니다. 이것이 참된 고난입니다. 이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십자가입니다. 자기를 못박는 고난입니다. 자기를 죽이는 고난입니다. 이렇게 고난을 받을 때 다윗의 부끄러운 고난이 의로운 고난, 주님을 따르는 영광의 고난이 된 것입니다. 이 고난이 진정으로 이기게 할 뿐 아니라, 시편 3편을 위시한 고난의 시편을 기록하는 영적 성숙을 이루게 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대부분의 고난은 우리가 어둡고 약해서 만들고 키우서 당하는 고난입니다. 그러나 이 고난을 당할 때 믿음으로 나 살고 내 이득을 중심하지 않고 하나님과 교회를 중심하고 공익과 덕을 기준으로 결정하는 것은 자기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를 질 때에 내가 만든 부끄러운 고난이 주님을 위한 고난이 되고 상이 있는 고난이 됩니다. 이 고난으로 우리는 주님을 닮은 신비를 이룹니다. 그리고 이것이 악의 고난을 선으로 이기는 승리의 축복을 가져오는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고난의 신비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왔을 때 다윗과 같이 믿음으로 바른 결정을 하는 십자가를 지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만든 고난이 주님의 형상을 이루고 영광에 이르는 구원의 고난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들의 이해를 위하여 실례를 하나들고 마치겠습니다. 우리가 가곡가운데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은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이별의 노래>를 아시지요? 박목월선생이 이 시를 쓴 데는 이런 사연이 있습니다. 그가 사울대에서 강의하고 있을 때 6,25가 일어 대구로 피난 가서 강의 할 때에 한 여대생이 이 시인을 흠모하고 사랑하기 시작했습니다. 흔히 말하는 프라토닉 러브라는 것을 시작한 것입니다. 여대생은 정말 열정적으로 박목월에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선생은 그녀를 단념을 시키려고 설득도하고 친구 시인을 시켜 종용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결국은 박목월도 감정에 굴복하여 제주도로 도피하여 살림을 차렸습니다. 부인과 자녀, 가정을 버리고, 교수직도 명예도 버린 것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이 제주의 사랑의 도피처에 부인 유익순씨가 나타났습니다. 그러니 당사자들이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올 것이 왔구나! 하고 각오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모님이 들어와서 아무 말 없이 그 여대생을 바라보다가 추운데 여기서 얼마나 고생이 많으냐며 봉투 하나와 보따리 하나를 두고 말없이 돌아섰습니다. 보따리에는 사모님이 손수지은 겨울한복 한 벌 씩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것을 본 여대생은 평생을 불륜으로 있게 될 자신의 처지와 앞날을 절감하여 스스로 박목월을 떠났답니다. 이 때 애인을 태운 배가 깊어가는 가을 저녁 육지로 멀어져가는 것을 지켜보던 그 감회를 적은 것이 <이별의 노래>입니다. 솔직히 저는 이 사연을 알고는 이 노래에 좀 정떨어졌습니다.

 

여러분! 부인 사모님이 얼마나 분하고 억울했겠습니까? 마음 같아서는 머리채를 잡고 흔들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머리채를 잡고 흔드는 방법을 택하고 싶은 자기를 부인하는 십자가를 지고, 생활비와 겨울옷을 지어 입히는 고난의 십자가를 지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이 결정을 하는 것이 고난이지요. 이 결정으로 바늘로 한 땀 한 땀 그 두 사람의 솜옷을 짓은 심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다. 이 이 고난의 결정을 하고 이 고난을 받을 때에 이 결정이 승리를 가져온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사도들도 이 결정으로 승리했고, 저도 이방법의 결정으로 고난을 승리했습니다. 고난 앞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믿음과 이 믿음의 결단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믿음의 결단과 용기와 인내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환난에 직면한 여러분에게 이 기준으로 결정을 하는 믿음을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이 믿음의 결정을 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