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경 강 해/환난 중에 그리스도인

환난을 키우는 그리스도인

아브라함-la 2015. 3. 3. 09:13

 2015,3,1주일강론

본문 : 삼하15:1-12

말씀 : 라인권목사


사울로 인한 다윗의 고난은 의롭고 구속적이며 대리적이고 훈련의 성격이지만 압살롬의 난을 인한 다윗의 고난은 있어서는 안 될 부끄러운 고난이었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압살롬을 인한 고난을 만들고 키워왔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당하는 대부분의 고난은 당하지 않아도 될 고난을 만들고 키워서 당 하는 실정입니다. 이런 점에서 본문의 “반역하는 일이 커가매”라는 말씀은 의미심장합니다. 압살롬이 반역을 꾸미고 있을 때 마치 눈덩이 불어나듯 반역이 커지고 압살롬을 따르는 백성들의 수가 많아지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압살롬이 백성들의 마음을 도둑질하는 것을, 그리고 반역하는 일이 커가서 압살롬에게 돌아가는 백성들이 많은 것을 다윗은 몰랐을까요? 다윗의 무엇이 압살롬의 반역을 키웠을까요? 무엇이 압살롬의 난을 성공케 했을까요?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고난을 키우고 있을까요?



다윗은 어떻게 압살롬의 난을 키워왔는가?

첫째, 압살롬의 난을 키운 근본적인 원인은 이방의 문화적 풍습에서 자유롭지 못한 다윗의 성별되지 못한 가정환경이었습니다. 다윗은 헤브론에서만 여섯 아내에게서 여섯 아들을 두었고(삼하3:2-5) 예루살렘에서 처첩을 더 두고 낳은 아들이 11명입니다.(삼하5:13-16) 압살롬은 그술왕의 딸 마아가와 정략혼으로 낳은 셋째 아들입니다. 이것은 다윗이 율법이 아닌 당시 동양의 문화적 풍습을 따랐다는 것이며, 이 정욕이 다윗의 약한 점입니다. 결국 이 육체의 정욕이 밧세바와 타락하게 한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 왕가의 불화의 근본적인 원인입니다. 이 복잡한 가정환경의 경쟁과 상처가 압살롬을 키운 것입니다. 성별되지 못한 가정은 부끄러운 환난을 키우는 온상이요 못자리와 같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뜻보다 다윗의 압살롬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과 기대가 압살롬의 난을 키웠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왕위의 계승자로 솔로몬은 주셨습니다. 이는 선지자 나단도 알고 다윗 본인은 물론 밧세바도 아는 사실이었습니다.(삼하12:24,25,왕상1:17,18:5,33)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잘난 아들인 압살롬을 사랑하고 압살롬이 자기 왕위의 계승자가 되기를 심중으로 기대한 것 같습니다. 이것이 압살롬의 동생 다말의 복수를 위하여 압살롬이 큰 아들 암논을 죽였을 때에 다윗은 살인자 압살롬에 화만 내고 어떤 처벌도 하지 않은 이유입니다. 이것은 율법의 집행자로서의 왕의 의무를 도외시한 행위입니다. 이것이 압살롬에게 감히 반역을 꿈꾸게 한 것입니다. 지금 내가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신의 뜻을 세우려고 하는 것은 압살롬을 키우는 행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셋째. 절반만 용서하는 다윗의 어리석음이 압살롬의 난을 키웠습니다. 암논을 죽이고 외가로 도망한 압살롬을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한 것도 잘못이지만 돌아오게 하고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게 한 것은 더욱 나빴습니다.(삼하14:24,28,30)이것이 불을 지르게 했습니다. 이 절반의 용서는 아예 용서하지 않은 것보다 더 나쁜 것입니다.(14:32) 이것이 반역의 기회를 주고 증오의 불을 키우게 하여 마침내 반역을 불을 지르게 한 것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앙심을 품고 어떤 반성이나 사과도 하지 않은 압살롬을 용서하여 그로 하여금 당연히 자신을 왕위의 계승자로 확신하게 한 것입니다. 부모의 잘못된 훈육은 압살롬을 키우는 것임을 잊지 마시기를 부탁합니다.


넷째, 자식에 대한 막연한 기대가 다윗의 이성을 흐리게 했기 때문입니다. 압살롬이 자기 법정을 만들어 성문에서 백성들의 마음을 훔치는 것을 요압을 충성스런 신하들을 둔 다윗이 몰랐을까요? 알았지만 의심한 것이 아니라 ‘저 놈이 부족한 행정의 공백을 메워 주는 구나’ 이렇게 좋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압살롬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맹목적인 사랑 때문에 “설마”했거나 좋게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화근이 커가는 데도 혹시나 하고, ‘설마’하면서 헛된 기대를 가지는 것이 압살롬을 키우는 것입니다. 쌓인 애정, 미련이 이성을 흐리게 하여 침몰해가는 배 같은 사업이나 일이나 사람을 포기 하지 못하게 해서 결국은 환난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섯째 다윗의 지독한 죄책감이 결정적으로 압살롬의 난을 키워왔습니다. 다윗의 밧세바와의 범죄로 인한 죄책감은 지독한 것이었다는 것을 시32편과 51편은 생생히 증거 합니다. 심지어 구원의 확신과 기쁨을 잃을 정도였습니다. 문제는 이 죄책감이 회개 이후에도 다윗에게 찰거머리와 같이 따라 다녔다는데 있습니다. 이 죄책감이 삼하15:25,16:10,11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용서했지만 다윗은 밧세바를 범한 그 자기를 용서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압살롬의 난이 났을 때에 다윗은 ‘올 것이 왔구나!’ 했을 겁니다. 밧세바의 범죄로 인해 예언된 보응이 임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죄책감이 다윗으로 하여금, 형제를 살인한 암살롬의 패역을 엄히 훈계하지도 못하게 하고, 처벌하지도 못하게 만들고, 반역의 기미를 보면서도 어쩌지 못하게 만들고, 당하지 않을 고난을 감수할 고난을 생각하는 불쌍한 순교자로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카일과 델리취는 “압살롬의 반역이 성공한 것은 다윗이 그 잘못을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다윗의 죄책감이 압살롬의 난을 성공 시켰다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거의 대부분이 다윗과 같이 자신이고난을 키워서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 내게 고난을 주셨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다윗과 같이 고난을 키우고 있지 않은지 성찰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악한 풍조를 받아드려 가정을 성결하게 하지 못하는 것은 압살롬을 키우는 것입니다. 이런 가정이 압살롬이 자라는 온상이고 못자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보다 내 육정과 생각을 따르는 것이 압살롬의 난을 키우는 겁니다. 솔로몬이 아닌 압살롬을 키우는 것은 처음부터 안 될 것입니다. 압살롬을 키우면 결국 환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압살롬적인 것은 포기하는 것이 믿음이요, 은총입니다. 안 되는 것을“혹시나”“그래도” “설마”하는 것이 압살롬 키우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용서 받았는데도 자기를 용서 못하는 죄책감이 아비 노릇, 왕 노릇 제대로 못하게 해서 압살롬을 키웁니다. 쓸데없는 죄책감이 우리를 당하지 않은 고난을 당하는 “불쌍한 순교자”가 되게 합니다. 이 죄책감이 불효자를 키우고, 이것이 원수를 키우고, 이것이 질병을 키우는 것입니다. 쓸모없는 죄책감은 압살롬의 난을 키우고 받아드리게 하는 경건을 가장한 사탄의 송곳입니다.


회개하면 죄를 용서하지만 죄의 보응을 받게 하신다.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라”이게 사탄의 송곳입니다. 여기에 찔려서 압살롬의 벌하지 못하고 키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회개한 당신의 자녀에게 보응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보응은 하나님이 만들어 벼락 치듯 내리시는 것이 아니라, 위에 본 대로 죄의 영향력의 결과요 인과 관계에서 이루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탄의 송곳을 물리치고 압살롬의 난을 키우지 않으려면 무엇보다도 사죄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회개한 자를 기뻐하여 높고 거룩한 곳에 계신 분이 통회하는 자의 마음에 자리를 함께 하십니다. 그분은 회개한 자의 죄는 동에서 서가 먼 것 같이 멀리 옮기십니다.(시103:10-14) 미7:18-19을 주목합시다,“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과 그 기업에 남은 자의 허물을 사하시며 인애를 기뻐하시므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할렐루야! 우리죄를 눈보다 더 희게 하시고 기억도 않으십니다. 당신을 위하여 허물을 사하시고, 우리 허물을 빽빽한 구름같이 안개같이 없어지게 하고(사1:18,43:25,44:22)우리가 우리 죄를 고백하면 미쁘신 그분은 우리 죄를 사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셨습니다.(요일1:9)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롬8:1) 그러므로 회개하면 보응이 아니 은총과 축복이 임합니다. 슬픔이 춤이 되게 하시고,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를 띠게 하십니다.(렘5:25,사57:15,시30:11) 그러므로 우리는 사죄의 확신하고 자기를 용서하시고 하나님께 좋은 것을 기대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사순절의 요구가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이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사죄, 칭의 새 생명을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풍성한 생명을 함께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가 이 고난에 참여하여 더욱 풍성한 삶에 이르기를 소원하시지 우리가 불필요한 고난을 키워서 당하는 것을 원통해 하실 줄로 믿습니다. 주님은 다윗이 압살롬의 난을 자신이 감내해야 할 것으로 아는 불쌍한 순교자가 되기를 결코 기뻐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지금 우리가 기르는 고난의 싹을 자르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순절의 요구입니다.


세상의 죄악 된 문화적 풍습에서 가정을 성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필요한 고난의 싹을 자르는 것입니다. 내 육정과 기대를 하나님의 뜻에 복종 시키는 것이 고난을 키우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은 처음부터 포기하는 것이 고난을 키우지 않는 것입니다. 잘못된 죄책감을 버리고 사죄를 확신하고 자기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압살롬을 키우지 않고 압살롬의 난을 좌절시키는 것입니다. 치료보다 예방이 낫습니다. 이걸 회개 합시다. 이 믿음으로 압살롬의 키우지 맙시다. 이 믿음으로 압살롬의 난을 예방합시다. 쓸데없는 부끄러운 고난에서 벗어나 오직 말씀을 인한 영광의 환난만 있는 복된 은혜로 가족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것이 이번 사순절을 지키는 진정한 의미인줄로 믿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