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2, 22 주일강론
본문 : 삼하15:1-12
말씀 : 라인권목사
오늘이 사순절 첫 주일입니다. 오늘부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고난과 믿음의 의미를 압살롬의 난을 인한 다윗의 고난을 통하여 배워서 실제적으로 고난을 극복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는 은혜를 받기를 원합니다. 오늘은 나무는 보고 숲은 보지 못하는 우를 피하기 위하여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한 다윗의 환난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왜 우리에 이런 작업이 필요할까요? 그것은 우리 한국교회의 고난에 대한 극단적인 양극화 현상이 고난에 대한 성경적인 태도를 갖지 못하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난에 대한 한국교회의 양극화 현상
첫째 한국교회는 복음의 적극적인 면과 축복주의의 영향으로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에서 열외가 된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것을 가장 대표적으로 보인 것이 삼박자 축복일 것입니다. 영혼이 잘되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해진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순간 모든 인생의 문제는 종결되고 행복의 분으로 들어가는 것 같이 생각합니다. 그래서 소위 형통하면 축복 받은 것이고 고난이 있으면 저주받은 것이라는 외식주의를 가지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것은 전쟁과 기아에 허덕이며 윤택한 생활에 목이 마른 대중에 복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축복의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 대중이 모였습니다.
둘째는 고난자체를 축복으로 여기고 여기서 한걸음 더 나가서 고난을 사모하고 환영하는 듯하는 태도입니다. 이 사람들은 성경에 축복은 다 영적인 것이고 물질적이거나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축복은 없고 오직 주님을 따르는 좁은 길의 고난만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부라고 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죽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에 되는 것이 아니라 다 망하는 것이 은혜라고 제자의 대가와 십자가를 오해한 극단주의자도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고난을 주님을 따르는 고난으로, 모든 고난은 연단과 훈련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고난은 반드시 죄가 있어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뜻이 있어서 그 뜻을 이루게 하는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고난 자체를 축복이라고 하거나, 고난을 보석이라고 부르는 이도 있습니다. 이것이 환난아! 오라! 고난아! 내게로 오라! 고 외치게 합니다. 한국사회는 가책과 죄책이 가득합니다. 이런 한국사회에 고난은 반드시 죄의 결과가 아니다 정죄하지 말라, 고난은 연단이며 은혜요 사랑이다. 축복이다. 무엇을 얻으려고 믿는 것이 아니라 주와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이 참된 제자이다! 이것은 이런 한국사회의 현대인들에게 복음입니다. 이것이 조금 지성적인 현대인들에게 어필합니다. 그래서 이런 “고난의 복음”을 외치는 곳에 대중이 모입니다. 그러면 고난에 대한 이런 한국교회의 태도가 옳습니까? 이것을 다윗의 고난을 통해서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윗의 고난은 어떤 것인가?
다윗의 고난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무엘상에 나오는 고난이고 하나는 사무엘하에 나오는 고난입니다. 사무엘상에 나오는 고난은 사울과 그를 추종하는 세력으로부터 다윗이 당하는 고난입니다. 그리고 사무엘하에 나오는 고난은 다윗의 원수가 아닌 다윗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당하는 환난입니다. 오늘 본문의 다윗의 아들 압살롬의 반역이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다윗이 사울에게 환난을 당할 때 그는 나라를 얻고 그 왕국의 전성기를 이룹니다. 그런데 그가 왕이 되고 그 왕국이 전성기를 이루자 퇴락하게 되는 데 결정적으로 다윗의 쇠퇴기를 도래케 한 것이 압살롬의 난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윗의 이 두 가지 고난의 성격을 간단히 분석해 봅시다.
첫째 사울로 인한 다윗의 고난은?
다윗의 사울을 인한 고난은 우선 의로운 고난입니다.
이것은 다윗이 사울에게 불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다윗을 왕으로 부르시고 세우셨기 때문에 다윗은 사울의 타도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한 말씀의 환난입니다. 그러므로 이 고난은 필수이고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했다는 일종의 배지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수치가 아니고 영광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를 기뻐하라고 하셨고 사도들은 이를 기뻐했습니다.
둘째 다윗의 사울로 인한 고난은 대리적이며 그래서 구속적인 것입니다.
왕은 구약의 하나님의 구원의 방편입니다. 다윗은 특별한 의미에서 오실 그리스도의 전형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라고 칭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다윗이 사울에게 받는 고난은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며, 백성들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대리적이고 구속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기를 해하려는 원수들을 저주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다윗을 사울의 박해 앞에 의연하고 당당하게 했습니다. 이렇게 주님은 당신을 따르는 고난, 당신의 교회를 위한 고난을 당신과 동일시하시는 것입니다. 이 고난이 주님을 알고, 주님의 형상을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셋째, 다윗의 사울로 인한 고난은 다윗을 사울과 구별되는 온전한 왕으로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훈련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다윗의 훈련과 연단과 그 결과를 기록한 것이 사무엘상과 사무엘하 10장 가지의 내용입니다. 사무엘상을 이런 빛으로 읽어야 합니다. 여러분 이렇게 사울로 인한 다윗의 의로운 고난은 우리가 적극적으로 참여할 고난인줄로 믿습니다. 이 고난은 영광의 고난이고 축복이 되는 고난입니다. 상이 있는 고난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따르겠다는 다짐과 사모함이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압살롬의 난을 인한 환난은 어떤 것입니까?
압살롬의 난을 인한 다윗의 고난은?
첫째 압살롬의 난은 다윗의 죄로 인해서 생긴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이 절정기에 있을 때에, 밧세바와 범죄하고, 심지어 죄를 은폐하기 위하여 남편 우리야를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하나님이 맡긴 백성의 구원의 방편인 왕권으로 간음하고 살인했습니다. 이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은 회개한 다윗에게 보응을 선언하셨습니다.(삼하12:9-12) 칼이 떠나지 않게 하시고, 음행이 집안에 있게 되고. 이것이 공공연히 자행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고난은 불의로 당하는 고난입니다. 이것은 부끄러운 고난입니다. 이런 고난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없어야 합니다. 이런 고난을 주님을 따르는 고난으로 여기면 고난의 진리가 만화가 됩니다.
둘째, 압살롬의 난을 인한 고난은 다윗 자신 만이 아닌 이스라엘 공동체에 해를 끼친 고난이었습니다. 다윗만 고난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다윗의 측근들로 하여 압살롬의 반역에 동참하는 유혹이 되었습니다. 왜 아히도벨 같은 참모가 다윗을 외면했을까요? 다윗의 비리를 보고 다윗의 왕권에 회의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즉 신하들과 백성들에 반역의 유혹을 근거를 제공했습니다. 그리고 왕국의 분열과 내전을 불렀습니다. 이로 많은 백성이 참화를 당해야했습니다. 이런 고난을 정의하자면 연대적 고난이라고 합니다. 부모의 잘못으로 자녀가 고난을 당합니다. 자식 잘못으로 부모가 욕을 당합니다. 통치자의 잘못으로 백성이 고통을 당하고 어리석은 백성의 잘못으로 지도자가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고난은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걸 축복이라고 말하고 유익이라고 하는 것은 완전 넌센스입니다.
셋째 이 압살롬의 난으로 다윗의 왕국이 결정적으로 쇠퇴기로 내려앉고 반역이 계속되게 했다는 사실입니다. 압살롬의 난 이후로 뚜렷하게 다윗의 영향이 저하 되고 있습니다. 이때부터 다윗의 영이 서지 않습니다. 세바가 반역하고, 이때 요압이 다윗을 무시하고 아마샤를 죽이고, 왕자 아도니야의 반역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회적 학습효과라고 합니다. 이것이 야욕과 음모, 쿠테로 정권을 장악한 이들이 한국사회의 정신을 어떻게 죽였는지를 잘 입증하고 있는 겁니다. 부정적인 학습효과로 죄악을 답습하게 하여 사회 불의하게 하여 사회적 쇠퇴와 영적인 쇠퇴를 불러 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고난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없어야 하는 고난입니다. 이걸 연단이니 훈련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까? 이 고난으로 다윗의 신앙에 분명 유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3편을 위시한 주옥같은 신앙고백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유익은 차라리 고난이 없는 것이 더 좋았습니다. 이런 환난을 축복이니 보석이니 하며 오라고 하고 감사하라고 하는 것은 무지이고 열정주의에 불과하며, 이것은 수술할 환자에게 몰핀이나 주사하는 행위에 불과하여 실제적으로는 아무런 해결이 안 됩니다. 이런 고난을 하나님이 주신 고난이라고 원망하거나 아니면 기뻐한다는 것은 완전 넌센스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대가로 받을 고난도 그렇습니다. “고난아! 내게로 오라”식은 무지나 영적 교만이나 열정주의 산물이라는 것을 베드로는 잘 보여 주었습니다. 박해와 핍박도 주님은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피하라고 하셨습니다. 순교자들의 피를 갚아달라는 호소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지난주간 이집트의 콥트교회 형제들이 극단적인 무슬림들에게 참수 당했습니다. 이런 고난이 제발 와 달라고 부르는 것은 자신의 연약함도 모르는 소치이며, 영웅주의, 열정주의, 감정주의의 소치에 불과 합니다. 오히려 주님과 같이 고난의 잔이 지나가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의 뜻이면 다 마시겠으니 약한 내가 감당할 수 있게 붙잡아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바른 태도인 것입니다. 이 자세가 아닌 것은 무지요 교만이요 자기 멋의 신앙이요 자기 의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는 초대교회의 순교가 유행이었던 것에서 분명히 보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순절을 당하는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어떤 이유에서든-일반 삶의 문제이든, 그리스도께 속한 고난이건, 무지와 범과로 인한 고난이건- 고난과 직면해있습니다. 지금 내게 있는 이 고난의 성격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바로 그 고난과 맞서고 해결책이 있습니다. 지금 내게 고난이 있다면 이 고난이 사울을 인하여 다윗이 받았던 의로운 고난인지, 삶에 따르는 대가로서의 고난인지, 아니면 압살롬의 난으로 인한 고난과 같이 우리의 무지와 어리석음과 죄로 인한 고난인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전자는 영광과 상급이 있는 고난이지만 후자는 부끄러운 고난이고, 상급이 아니라 매가 있을 고난입니다. 이것을 분별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어떤 고난의 십자가도 달게 받고 기뻐합시다. 그러나 압살롬의 난을 인한 환난과 같이 그러나 나의 허물과 죄와 어리석음으로 당하는 고난을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애통의 깊은 회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런 환난을 다시 자초하지 않도록 은혜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다윗과 같은 하나님의 사람이 범죄 하여 압살롬의 고난을 자취 했다는 사실은 우리가 얼마나 은혜와 기도가 필요한 존재인지를 잘 보여 줍니다.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엎드려야 합니다. 다윗과 같이 시험에 들어 환난을 만들지 않도록 붙잡아 세워주시기를 눈물로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당하지 않을 부끄러운 환난을 만들어 당하는 것을 피합시다. 이로 자신의 영육은 물론 공동체를 환난에 휩싸이지 않도록 합시다. 그리고 원수에게 크게 비방거리를 주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 없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것이 고난의 현장에서 요구하는 사순절의 요청인줄로 믿습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하므로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벧전2:19,20) -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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