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7,8,20, 주일
본문 : 고전13:5-6
말씀 : 라인권목사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45,46)이 말씀은 결국, 타인에 대한 사랑이 영원한 분리를 이루는 기준이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인생의 영원한 성패가 여기에 걸려 있습니다. 인생은 얼마나 살았느냐 가 아니라 얼마나 사랑하며 살았느냐 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타인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본분이자 참 자기 완성이요 영원한 생명과 행복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본문에서 타인들을 사랑하는 실제적인 방법을 배우려고 합니다. 5-6절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첫째 타인을 사랑하는 사랑의 첫째 문제와 관문은 타인의 실수나 잘못을 어떻게 사랑하느냐 입니다. 저는 타인의 잘못을 사랑 할 수 있는 것이, 타인에 대한 사랑의 일종의 분수령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잘해서 아들을 주신 것이 아니라 아직 죄인일 때에 아들을 주신 것입니다.(롬5:8)그런데 우리는 상대가 잘못하기 때문에 사랑할레야 사랑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타인의 실수와 잘못을 사랑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사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타인의 잘못을 사랑하는 이 능선에 올라서면 못 사랑할 것이 없습니다. "타인의 실수와 잘못"이라는 사랑의 분수령을 넘는 은혜를 축복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타인의 잘못을 어떻게 사랑해야 합니까? 그 방법을 본문은 “성내지 아니하며”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상대방이 실수하고 잘못한 것에 대하여 성내지 않는 것이 사랑이요, 사랑하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상대방의 실수와 잘못에 화를 낼까요? 우리가 상대방의 잘못에 화를 내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연세대에서 구약을 가르치며 부총장을 역임한 박준서 교수는 아내에게 운전 가르칠 때 화내지 않는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남편이라고 합니다. 저는 그 말에 공감합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걱정안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걱정해서 화를 냅니다.
이렇게 사랑해서 화를 내지만 그러나 화를 내면 건설적인 결과가 오는 것이 아니라, 파괴적인 결과가 옵니다. 성내면 제일먼저 좋던 분위기가 싸늘해집니다. 감정만 상하고 상처만 받습니다. 성내면 기죽습니다. 세우는 것이 아니라 넘어지게 합니다. 성내면 자신이 비참해지고요, 은혜 다 쏟습니다. 성내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지혜자는 노하기를 속히 하는 자는 어리석은 일을 행하고(잠14:17) 쉽게 분을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잠15:18)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16:32)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상대방이 잘못했을 때에 어떻게 성내지 아니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랑장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이 말씀의 주석이 베드로의 질문입니다. 형제가 잘못했을 때에 몇 번을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까? 그러나 주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하라”고 하셨습니다.(마18:21,22)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는 사랑을 굵고 크게 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통 크게 일곱 번까지는 이해하고 용서해 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라고 하십니다. 통 크게 하기보다 길게 길이로 사랑하는 겁니다. 큰 용서-원수를 사랑하는 등등-는 어쩌다 일어나는 특별한 사건이지 생활이 아닙니다. 진짜 우리를 지치게 하고 피곤하게 하는 건 자잘한 생활의 실수와 잘못-입니다. 이것들을 이해하고 덮어주고 용서하고, "사람이 실수 할 수도 있지! 실수하는 것이 인간이지”이렇게 노하지 않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굵기가 아니라 길이로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성을 참아주는 것입니다. 길게, 아주 길게 참아 줍시다.
그리고 “성내지 아니하며”라는 말씀은 상대의 잘못에 화가 나서는 안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분을 내어도 해지도록 품지 말라”는 말씀이나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 없으나” 라는 말씀에서 보듯 인간은 화를 내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잘못하는데 화가 안 나면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화가 나지만 사랑으로 화를 오래 오래 참아 주라는 것입니다. 급하게 벌컥 하지 않고, 천천히 하면 속에서 충천하던 혈기는 죽고 화는 작아집니다. 이때 비로소 혈기 없이 친절하게? 화를 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충고요, 훈계인 줄로 믿습니다. 저는 이 사랑이 잘못을 회개하고 분발케 할 것으로 믿습니다. 이것을 온유라고 합니다.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합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것보다 낫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이 잘못할 때 노를 참아 주시므로 사랑하셔서 덕이 되고 구원이 되게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둘째, 타인을 사랑하는 방법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고”입니다. 이 말씀을 “정직”이라고 해석합니다만, 저는 이 말씀을 “한 인간에 대한 존중과 믿음” 이라고 이해합니다. 이것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라는 뜻을 풀어보면 명백해집니다. 이 말은 요셉의 형들과 같이 적극적으로는 남을 해하려는 악한 생각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압살롬과 같이 원한, 즉 앙심을 품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악심은 사람을 한 인간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수단이요 목적물로 만드는 겁니다. 인간성의 파괴요, 인간성의 상실입니다. 이것이 산업화의 비극이요, 현대사회의 비극입니다. 따라서 사랑은 타인을 한 인간으로 존중하고 믿어주는 것입니다. 이게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악심을 품겠습니까? 우리는 손해 볼지언정 손해를 끼치지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치 상인이 준 것과 받을 것을 잊지 않고 기억하려고 치부책에 기록하는 것과 같이, 상대가 내게 잘못한 것을 마음에 치부 해두고 잊지 않고 요나와 같이 “어디 두고 보자” 하는 마음과 내게 해를 준 그 사람이 잘못되는 것을 은근히 기뻐하고, 되돌려 주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사랑은 이 뒤끝이 없는 겁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실수를 고소해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람이 걱정되고 염려되어서 그를 위하여 기도하고 축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에 대한 존중입니다.
그리고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이 말은 소극적으로 상대방을 의심하여 나쁜 쪽으로 예단하고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상대방을 좋게 생각하고 믿어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어 번역들을 다 “원한” “나쁜 마음”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즉 사랑은 액면 그대로 보는 정직입니다. 선의를 곡해하지 않습니다. 상대를 나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좋게 보는 겁니다. 이게 정직입니다. 그러나 이 정직의 기반은 인간에 대한 믿음과 존중입니다. 제가 한번은 식당에서 밥 먹고 카운터에서 계산하려고 지갑을 꺼내려고 하는데 지갑이 없습니다. 제가 당황했습니다. 제 사정을 말하자, 계산하는 이가 주방 쪽을 보자, 사장님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냥 보내드리라는 겁니다. 그래서 주방을 향해서 목례하고 나오며 제가 참 기분 좋았습니다. 그날 저는 용서 받은 기분이었습니다. 제가 구원 받은 기분이었습니다. 왜냐면 상대가 저를 한 인간으로 존중하고 믿어 준다는 것을 온 몸으로 느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제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아직도 이렇게 인간을 인간으로 알고 존중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이 냉정한 세상이 아직도 살만 한 곳이요, 살맛나는 곳이라는 점입니다. 내가 영향을 받고 분발하게 된 것을 돌아보면 내가 한 사람으로 존경과 존중을 받는다고 느껴진 때입니다. 의심의 분위기에서는 움츠려들지만, 신뢰하는 분위기에서는 안도감이 일어나고, 격려와 상호 변화를 가져오는 교제가 일어난 줄로 믿습니다. 따라서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고”는 사람에 대한 존중과 신뢰인줄로 믿습니다. 저는 한 사람을 한 인간으로 존경하고 믿어 주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기본이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생면부지의 사람도 한 인간으로 존중해야 한다면 사랑하는 사람,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리해야 할 것으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존중함으로 사랑합시다. 믿어주시고 좋게 생각해 주시므로 사랑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셋째, 타인을 사랑하는 방법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하여 가지는 신실성입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불법함이나 악행을 묵과하여 용인하거나 침묵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면 불의는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사랑한다면 불의를 방치할 수 없습니다. 불의를 방치하면 불행해집니다. 망하기 때문입니다. 엘리 제사장이 두 아들의 불의를 경책하고 방치하고 침묵해서 두 아들을 망하게 했습니다. 이것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하여 신실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 하느니라”(잠13:24)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의 불의에 침묵하지 않고 말해 주십시오. 사회적인 불의도 침묵하지 않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국가적인 불의도 묵과하고 침묵할 수 없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불의를 교정하기에 내가 지쳐서 곤할 때도 신실하게 사랑과 인내로 말해줍시다. 겸손하게 충고하고, 훈계해줍시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이 악에서 풀리게 하고 구원받게 합시다. 우리 사회와 국가가 악에서 풀리고 의롭게 만드시기를 축복합니다.
따라서 타인을 사랑하는 넷째 방법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타인을 사랑하는 기준이라고 믿습니다. 여러분! 타인의 잘못에 성내지 않는 기준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진리 즉 예수님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라고 믿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것 같이, 성내는 것을 참으면 되고 예수님이 노하시는 것에 노하면 된다고 믿습니다. 인간을 존중하고 믿는 기준이 진리입니다. 불의와 의를 분별하는 기준이 예수요 성경이라고 믿습니다. 사랑은 기본적으로 진리를 믿고 진리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 있는 자는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도다”라고 하신 줄로 믿습니다. 이 진리의 기준을 세우시고, 이 진리의 기준으로 참아주시고, 믿어주시고, 말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진리 안에서 기뻐하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을 기뻐하여 축하하고 축복하는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가이오가 진리 안에서 행한 다는 소식을 듣고 이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다고 하셨습니다.(요일3,4,)이렇게 기뻐하여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고 마음껏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믿음으로 살아보려고 하면 저거 얼마나 갈까? 이러지 마시고, 기뻐하십시오. 축하하고 축복하십시오. 이렇게 한 사람이 상대의 기쁨과 행복이 된다는 것을 아는 것은 용서 받았다는 느낌을 갖게 할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 자존감을 갖게 할 것입니다. 이 사랑이 자신에 대한 비전을 갖게 하고 일어나 분발하게 할 줄로 믿습니다. 지금 세상이 이 사랑을 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 사랑을 필요로 하고 있는 중입니다.
은혜로 가족여러분! 우리는 이렇게 사랑 받기보다는 타인을 사랑하기 위해서 태어나고 거듭난 존재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고 닮는다는 것은 결국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자기 없이 사는 것이 우리 소원이지만, 우리는 타인에 대한 사랑 앞에서면 작아지고 초라해집니다. 죄인이 되게 합니다. 결국 타인에 대한 사랑은 이렇게 우리를 십자가 앞에 다시 서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비로소 거기서 온전해 집니다. 십자가를 보고 예수님을 볼 때에 사랑의 영이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사랑에 자유롭지 못한 자신을 괴로워하여 저 성 프란치스코와 같이 사랑의 은혜를 간구할 줄로 믿습니다.
“주여,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게 하는 자가 되게 하소서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며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서 받고
용서함으로서 용서 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
저는 우리 은혜로 가족은 이 기도로 이 세상을 사는 사람임을 믿습니다. 이 기도로 세상을 사랑으로 살아내는 사람이 은혜로 가족입니다. 저는 이 사랑의 소원과 기도로 세상을 살아내려는 우리 은혜로 가족에게 사랑의 주님께서 우리 사랑이 되시고 사랑의 능력이 되시며 영원한 분리를 이루는 그날 우리를 그 아들의 사랑의 나라에 이르게 하시고, 거기서 죄 없이 주님과 이웃을 완전하게 사랑하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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