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경 강 해/윤리가 아닌 구원으로 보는 사랑장

사랑 타인에 대하여

아브라함-la 2017. 8. 13. 17:45

017,8,13주일

본문 : 고전13:5-6 

말씀 : 라인권목사

   “사랑의 에너지원은 자기라는 인간이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가라는 인식과 가치 있는 존재로서 좀 더 성장하고 싶다는 의욕이다. 이것은 아무리 이용해도 줄어들지 않는 영원한 에너지원이다” 제가 이 아이오 후미꼬의 말로 말씀의 문을 여는 것은 사랑은 먼저 자기와의 관계요, 자기를 사랑하여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라는 지난주일 말씀을 되새기게 해줄 뿐만 아니라 “타인에 대한 사랑”이라는 오늘의 주제로 떠올리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사랑은 먼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인가를 공부했기 때문에, 이제 타인에 대한 사랑을 공부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타인을 사랑한다고 할 때에 우리가 전제적으로 재확인할 명제가 있습니다. 그 명제가 자기 사랑은 타인의 사랑을 목표로 하는 것이요, 타인을 사랑함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본분이라는 것입니다.


타인에 대한 사랑과 타인의 의미

이 진리를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롬14:8은 이렇게 말씀합니다.“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즉 우리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아닌 주님과 주님의 백성을 위하여 존재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선 웨스터민스터 소요리문답 제 1문의 정의와 같이 창조의 목적, 즉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본래 인생은 자기가 주인이 아닙니다.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의 행복을 위하여 내 존재가 있는 것입니다.


둘째, 타인에 대한 사랑이 하나님께 대한 경외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이 말은 사람은 그 신분을 초월하여 그 안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작은 신입니다. 따라서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위가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한다면 당연히 하나님의 형상인 타인을 형제로 여기고 사랑하고 존중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종교는 사람, 즉 생명에 대한 경외와 존중을 기반으로 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웃에게서 이 하나님 형상을 보십시오. 궁창에서도 하나님을 본다면 창조의 면류관인 사람에게서 더욱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타인에게 계시는 예수님을 보면 사랑 할 수 밖에 없는 줄로 믿습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은 하나님께 대한 예배와 봉사의 방편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부모에게 하는 것같이 좋은 식당에 모실 수도 없고, 여행을 보내드릴 수도 없고 돈을 드릴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사랑의 원을 풀 대상으로 이웃을 주신 겁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보지 못하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요일4:20) 이게 타인, 이웃의 의미입니다. 다른 사람 없이는 하나님을 섬길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이웃을 알면 얼마나 귀한 존재가 되겠습니까? 나라는 사람은 이 이웃이 없이는 안 되는 존재임을 기억합시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할 결정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이 다른 사람도 나처럼 하나님의 구원 계획안에 있는 천하보다 귀한 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소원하십니다. 모든 죄인이 다 회개하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은 한 영혼을 위하여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할 사명이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이 구원에 이르도록 우리가 불쌍히 여기고 기도하고 섬겨야 할 대상인 줄로 믿습니다. 이게 그리스도인의 본분이며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이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범사에 사랑으로 덕을 세워야만 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구원 받는 것은 예수님을 만남으로입니다. 한 사람이 예수를 만나는 것은 사람을 통해서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사도들을 증인으로 세우신 이유입니다. 이게 모든 신자를 땅 끝까지 증인으로 보내시는 이유입니다. 예수님을 먼저 만난 사람의 인격을 통해서 예수를 만나고 은혜를 받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영혼이 예수님께 오고, 은혜 받음과 온전한 사람으로 서도록 나라는 존재가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이 되지 않게 목회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몇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려고, 자유자이면서 종이 되고, 유대인에게는 유대인 같이, 율법 없는 자에게는 율법 없는 자같이 되고, 약한 자에게는 약한 자로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되었습니다.(고전9:19-22)성도들이 바로 서도록 늘 애타했습니다.(고후11:9.28,29) 폐가 되지 않으려고 권리를 쓰지 않고 조심했다고 합니다. 이게 우리의 존재의 이유이고 목적이며 교회의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이 덕을 세우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 바울과 같이 거치는 자가 될까 노심초사하며 섬기고 봉사해야 합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교회요, 이게 정상적인 성도입니다. 

  

고린도교회의 문제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어떠했습니까?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자신이 신령한 신자라는 것을 자랑하고 과시하기 위해서 공예배에서 서로 경쟁적으로 방언을 했습니다. 자기를 참지 못했습니다. 교회안의 다른 형제를 전혀 배려하지 않은 이기적이고 무례한 일었습니다. 이들은 예배가 엉망이 되는 것을 몰랐습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과 상처를 받는 것을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세우는 은사가 도리어 교회를 분열하게 만들었습니다. 사람을 세우는 은사가 도리어 사람을 실족해서 넘어지게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외인들로 교회를 비웃게 만들고 전도문을 막은 것입니다. 교회가 이 세상 이익단체와 다름이 없이 경쟁하고, 시기하고 편을 갈라 다투었기 때문입니다, 이게 고린도교회의 문제요, 이게 현대교회들의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왜 이렇게 사람을 세울 교회와 성도가 도리어 거치는 돌이 될까요? 그것은 자기를 몰라서입니다. 자기존재의 이유를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나라는 나는 하나님과 이웃의 행복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자기를 모른 겁니다. 그리고 이것은 교회를 모른 것입니다. 교회가 사람을 온전하게 세우는 구원을 목적으로 하는 곳임을 모른 것입니다. 이것은 천국을 모르는 일입니다. 천국의 삶의 방식이 사랑이라는 고려했다면 사람을 넘어지게 할 수는 없는 겁니다. 따라서 이것은 근본적으로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고 오직 자기 유익만으로 충만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신령하기 위하여, 아니 신령한 것으로 인정받기를 원해서 다른 사람이 실족하건 말건 시험들 건 말건 오직 자기만 만족하게 하려고 했다는 겁니다. 너무 거룩하고 신령하고 열심이어서 인간에 대한 존중을 잃은 겁니다.


사람에 대한 사랑을 잃은 교회는

여러분! 이렇게 한 생명을 사랑하여 살리는 것을 본분으로 하는 교회와 성도가 고린도교회와 같이 이 사랑을 상실한 성도와 교회를 주님이 무엇라고 하셨습니까? 성경 딱 두 군데만 보겠습니다. 먼저 마23:13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여러분! 이렇게 무섭습니다. 천국문을 막는 것은 마귀입니다. 사랑이라는 본질과 본분을 잃으면 구원의 기관이 구원을 가로막는 사탄의 집단이 되는 겁니다. 교리가 보수적이고 전통적이며 경건해도 사랑을 상실해서 돌같이 된 교회와 성도는 천국 문을 막는 악마적인 집단으로 전락했다는 것이 교회사의 증언입니다.


제가 전도사 때 섬기던 교회는 아주 보수적이며 전통적인 교회였습니다. 청년들을 지도했는데 모이면 성경과 신학을 두고 논쟁하는 하려고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더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 은혜 받고 변화될까가 관심이 아니라 성경적이냐 아니냐가 더 관심사이었습니다. 이것은 성경적 진리와 교리를 주장하는 것이 훌륭한 신앙인 줄로 아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제가 답답해서 하루는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여러분 성경적 신앙과 신학을 보수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지만 전통적인 교리를 알고 주장하는 그것이 곧 훌륭한 신앙은 아닙니다. 사랑을 잃은 교리는 바리새적 외식에 불과 합니다. 저는 사랑 없는 보수주의자이기 보다는 차라리 사랑 있는 현대주의자가 되겠습니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사람에 대한 사랑을 잃은 교회는 구원의 거룩한 기관이 아니라 사람을 걸려 넘어지게 만드는 거치는 돌, “스켄달론”에 불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타인에 대한 사랑을 상실하여 형제를 실족하게 하는 것을 우리 주님께서 무어라고 하신 줄 아십니까? 마18:6-7을 보겠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중에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리는 것이 나으니라”(마18:6)이게 무슨 말입니까? 형제가 구원에 이르게 사랑으로 덕을 세우지 못하면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났다는 겁니다. 죽으면 사람을 실족시켜 지옥가게 하는 죄는 면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헨리 드럼몬드는 “사랑하지 않는 것보다 살지 않는 것이 더 낫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의 행복을 위하여 존재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사랑하지 않는 것보다 차리리 살지 않는 것이 더 낫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것은 자기 존재의 부인입니다. 자기를 비존재화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요, 거짓된 자기로 스스로 자기를 속이고 자해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타인 사랑은 참 자기 완성

따라서 타인을 사랑하는 이 사랑이 진정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요, 참 자기를 완성하는 방편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모본이 우리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자기를 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온전히 하나님과 택한 백성을 위하여 자기를 드리셨지요, 주님은 온전히 아버지의 뜻과 영광을 구하셨습니다(요6:38,8:50).그러나 이렇게 온전하게 하나님과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사신 아가페의 사랑이 예수님께는 당신의 사명인 구속을 이루게 했고, 구주가 되게 했고, 우편보좌에 앉아 다스리고 심판하는 권세를 받게 했습니다.(빌2:9-11)


이렇게 사랑은 온전하게 비 사욕적이며, 이타적이지만 이게 진정 자기 사랑이요, 자기 성장이요, 자기 행복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그 만큼 내가 되고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자기를 사랑하는 겁니다. 사랑하지 않는 것은 자해행위입니다. 사람은 자기 홀로 고독하게 자기를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즉 사랑에서 완성되는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이웃을 사랑하는 양이 곧 참 자기인 것입니다. 그것만이 성장이요, 성공이요, 생명이며 영광인줄로 믿습니다. 작은 자를 얼마나 사랑했느냐? 이것이 심판날에 주님이 내게 물으실 질문입니다. 그러므로 "얼만큼 사랑할 수 있느냐?"가 자기 성장의 척도임을 마음 깊이 새겨둡시다.

 

그러므로 사랑은 본질적으로 자기 유익을 구치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무사욕입니다. 자기를 잊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나 자기 유익을 구치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그 양만큼 참 자기가 됩니다.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음 만큼 자기가 성장합니다. 예수님 같은 참사람, 참자기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사랑은 이 사랑을 목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사랑해준 이력, 사랑의 실력이 있어야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자기 사랑은 이 실력 만드는 것입니다. 요셉이 유혹을 거절하는 자기 사랑으로 이 실력 만들어 형제와 애굽의 구원이 되었지요,(창39:12,45:5) 모세도 이 사람, 사십년 만들어서 40년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어진 목자가 되었습니다. 저는 예수님도 이 사랑을 배우고 훈련했다고 믿습니다. 아들이라도 받으실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우셨기 때문입니다.(히5:8)


세상은 이 사랑 실력 쌓는 교실입니다. 사랑하는 실력을 키워서 예수님과 같이 크게 사랑합시다. 사도들과 같이 위대하게 사랑합시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사람들과 같이 타인을 사랑하게 되시기를 소원하시를 바랍니다. 이것이 참 자기 성취요 성공이요, 영원한 생명이요 영광인줄로 믿습니다. 이 비전으로 공부하고, 이 비전으로 내가 평생하고 살 일을 생각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이 5-6절입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하여 급하게 성내지 않는 것입니다,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의, 진리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게 영감 된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이 방법은 다음 시간에 공부합니다.


은혜로가족 여러분! 내 이웃, 즉 가족이 이 사랑이 없으면 안 됩니다. 친척과 친구, 동료가 이 사랑을 구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형제들에 이 사랑이 요구됩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이 내게 하셨던 것 같이 이 사랑을 써줍시다. 하루 일곱 번 “아니하고” 와 “기뻐하고”로 사랑해 줍시다. 이 사랑으로 내 이웃을  행복하게 하고, 구원에 이르게 하며, 이 사랑으로 성도를 세우고 온전하게 합시다. 이 이웃사랑이 나를 참 사람으로 참 행복으로 살게 하고 이 온전치 못한 내가 예수님과 같은 참 사람으로 온전해지고 참자기를 완성케 할 줄로 믿습니다.


무엇보다 열심히 사랑합시다. 그러므로 “예수님, 바울처럼 그렇게 살수 없을까?” 이렇게 사랑하기를 소원하고 추구하기를 다짐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그렇게 살수 없을까! 이 찬송으로 이 다짐을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지 않는 것은 자해행위요,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참 자기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