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강론

명절에 생각하는 화목의 길

아브라함-la 2018. 2. 15. 20:08

018,2,18, 주일 

본문 : 잠17:1 

말씀 : 라인권목사

      설 명절 평안하시고, 떡국 많이들 드셨습니까? 설에 세찬으로 떡국을 먹는 것은 장수하라고 길게 떡을 빼고, 떡을 엽전과 같이 동글동글하게 써는 것은 재수가 있으라는 기원입니다. 우리 명절이 샤머니즘이 뿌리를 두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명절은 우리 그리스도인들과는 부딪치는 점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에 자칫하면 가정의 화목이 깨지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사실은 영적인 문제만 아니라 가족 관계문제, 물질적인 문제로 화목하고, 행복해야할 명절이 가정불화가 폭발하는 전장같이 되어버리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번 설은 가정의 화목을 생각하며 은혜를 받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다시 한 번 봉독하도록 합시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이 말씀은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15:17)는 말씀과 짝을 이루며 가정의 사랑과 화목을 강조한 유명한 말씀입니다.

 

이 유명한 말씀에서 맨 먼저 발견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한 가정의 화목이라는 것이 물질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혜자는 이 말씀에서 물질적으로 아주 근근한 상태와 풍족한 상태를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여기의 마른 떡 기브온 사람이 여호수아를 속이기 위하여 가지고온 구운지 오래되어 마르고 곰팡이가 난 떡을 의미합니다.(9:5) 빵은 갓 구워서 부드럽고 촉촉해야지 오래되어 마른 것은 먹기 곤란합니다. 그리고 빵은 보아스가 룻에게 권하는 것 같이 갓 나온 것도 초에 찍어 먹습니다.(2:14)이것은 빵을 더 부드럽고 맛있게 먹기 위한 겁니다. 그러나 이집은 하도 곤궁하여 마른 떡도 한 조각만있다고 했습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쉰밥 한 덩어리에 반찬은 고사하고 간장 한 종지도 없어 맨밥을 먹는 처지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처지에서 형님 먼저 아우 먼저이렇게 하면 좋지만 과연 그렇게 할 수 있는 집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제 부모님들을 보면 참 착하신 분들 이신데도 가끔 다투실 때가 있는데 그때는 항상 물질문제로 쪼들릴 때였습니다. 적어도 의식은 충족해야 마음에 여유가 있는 것이 인생입니다. 배고픈데 무슨 평안이 있고, 사람도리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제 나라 제상 관중의 말과 같이 사람이란 창고가 차야 예절이 있고 의식주가 여유가 있어야 영욕을 알고, 염치를 차릴 수 있습니다. 이게 본문이 극도로 가난한 상태와 아주 차고 넘치는 풍족한 상태를 대조하고, 물질이 전혀 없는 상태를 말하지 않고 마른 떡 한 조각이라도 있는 상태를 예로 드는 이유가 아니겠습니까? 화평이 물질과 무관하지 않다는 겁니다. 지혜자는 화목에 물질이 없어도 된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화목 하는데 물질이 없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없는 것보다 있는데 낫고, 풍족할수록 사랑하고 화목에 유리하고 좋습니다. 적어도 인간의 도리는 할 수 있을 정도는 다 되셔야 할 것으로 믿습니다.

 

이렇게 화목이 물질과 무관한 것이 아닌 동시에 지혜자는 한 가정의 사랑과 화목이 돈이나 물질적인 풍요로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본문에 제육이 집안에 가득하고라고 하셨는데 이전 번역은 육선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본문의 풍족한 상태를 강조하는 의미상의 번역입니다. 원뜻은 제육즉 제사한 고기를 말하는데, 이는 제물을 먹을 수 있는 화목제물을 말합니다. 화목제는 제물의 기름진 부분을 불태워드리고 제사장과 이웃과 나누어 먹습니다. 이걸 쉐라밈의 잔치라고 합니다. 화목제를 감사제, 수은제, 서원제, 낙헌제, 자원제 라도 합니다. 즉 화목해야 할 일이 있거나, 감사가 있어서 자원해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러니까 이집은 좋은 일이 있다는 거지요, 거기에 그 좋은 일을 감사하여 제사할 수 있는 여유가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마른 떡 한 조각뿐인 집이라면 화목제를 드릴 수가 있습니까? 화목제에는 양이나 염소, 소가 있어야 합니다. 가난한 집은 드리고 싶어도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집은 화목제물이 집안에 가득합니다.

 

그런데 지혜자는 제육이 집안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지혜자가 가만히 보니 화목제 잔치를 벌이면서도 서로 미워하고 싸우는 집이 있더라는 거죠, 궁하고 쪼들려서만 싸우는 것이 아니더라는 겁니다. 풍족해서 부족함이 없도 싸우더라는 겁니다. 지금 롯데가의 싸움을 보십시오. 오히려 돈이 크게 많으면 정말 큰 소리 나게 싸웁니다. 무슨 말입니까? 돈이, 화목하게 하고, 부가 사랑을 주고, 화목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화목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 말씀에서 지혜자가 전하시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그게 화목의 중요성입니다. 가난한 든 부하든 화목이 우선이라는 겁니다. 가난하면 가난한 할수록 화목이 필요하고, 화목이 우선입니다. 화목해야 가난을 위로하고 격려하여 가난을 극복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가난한데 서로 미워하고 원망만 하고 다투면, 어디서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가난을 헤쳐 나갈 수가 있겠습니까? 어려울수록 화목해야 가난을 극복하여 좋은 날이 오게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궁핍한 중에도 화목할 수 있어야 부해서 화목할 수가 있는 거죠. 궁해서 매일 싸우는 집이 롯도 복권 맞으면 하루아침에 화목해집니까? 더 의심하고 싸웁니다. 그래서 가화만사성이라고 한 겁니다. 화목으로 하나 된 가정은 못해낼 일이 없을 줄로 믿습니다.

 

반대로 아무리 부해도 부부가 화목하지 못하고 형제가 화목하지 못하면 부가 무슨 소용입니다. 왜 삼성이니 현대니 하는 재벌가들에서 자살하는 비극이 일어납니까? 롯데 집안이 지금 부자가 다 구속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부가 화목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화목이 없는 부는 행복이 아니라 도리어 재앙이 된다는 것을 재벌집들이 입증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잠언 15:17에서 지혜자는 체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하신 줄로 믿습니다. 이렇게 부귀영화보다 화목이 우선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이 말씀이 요구하는 것은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화목 하라! 말하자면 화목을 만들고, 화목을 사라는 겁니다. 물질적으로 손해를 보고서라도 화목을 사라, 성공보다 화목을 우선하고 성공을 드려서 화목을 만들고 사라는 것입니다. 화목을 위하여 부도 차선으로돌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 인생이 그렇지 않습니까? 사랑을 잃고 화목을 잃으면 살맛나지 않습니다. 화목하지 못하면 모든 게 무의미하고 허무해지는 것이 인생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 은혜로 가족은 화목을 우선합시다. 화목을 만들고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화목을 우선하고 화목을 사고 화목을 만들어갈 수 있습니까? 지혜자는 그 길이 하나님을 살아계신 참된 하나님으로 아는데 있다고 하십니다. 다시 본문을 봅시다. “제육이 집안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제육, 화목제물이 집안에 가득하고 다툰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화목제는 말 그대로 화목을 위한 겁니다, 그래서 그 제사에 참여한다는 의미로 제물을 함께 먹는 잔치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화목제를 드리고, 화목제 잔치를 먹으면서도 시기하고 미워하여 싸운다, 이건 하나님을 우상 취급하는 실제적 무신론이 아닙니까? 결국 이 말씀은 예수 믿는 집이 다 화목하냐는 겁니다. 교회봉사 잘하는 중직자들이 효도하지 못하고, 부부간에 사랑하지 못하고, 형제간에 우애하지 못하는 집이 적지 않다는 걸 고발하고 있는 거지요.

 

왜 이렇게 됩니까? 신앙이 형식에 불과한 외식하는 신앙으로 전락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을 안다면 하나님이 무서워서도 이렇게 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참으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아는 것이 화목이라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크신 하나님으로 만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화목 하는 인격을 가지게 하고 화목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진정 여호와를 경외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짜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수 된 나와 화목하시려고 그 아들 예수를 주신 것을 알고 예수로 하나님과 화목 하게 하신 구원의 은총 속에 있을 때에 비로소 인간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며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하고 순종하게 되며, 우리 화평이신 예수의 화목의 영의 사람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화목 하는 길은 예배에 있고 참된 예배자로 하나님 앞에 서기를 힘쓸 때에 화목을 이룰 수가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예배 없이는 못 살게 됩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배 없이는 못사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런데 예배하려고 하나님 앞에 나가 하나님 앞에 서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기를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배자는 죄를 하나님의 마음으로 미워하고 죄와 싸웁니다. 그래도 혹시 허물이 있을 수 있으니 자기를 살펴서 회개함으로 나가는 것이 예배가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예물을 드리려다가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가서 형제와 화목한 후에 와서 제물을 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5:23,24)

 

이게 요즘 사회적문제가 된 전 지검장의 회개논란의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 회개했으면 사람에게도 회개해야 하는 것이지요. 예배자는 예배를 위하여 먼저 화목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말씀은 참 예배의 정신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예배의 순기능이 무엇인지도 가르친 말씀입니다. 이게 예배의 효능입니다. 여러분 이해하기 쉽게 잘 아는 이야기 합시다. 부부간에 싸우면 기도가 안 되지요? 영적인 손해가 큽니다. 그래서 한 부부가 마음이 불편해지면 부부가 같이 주기도문을 드리기로 했답니다. 그래서 마음이 불편해 질 때 부부가 함께 무릎을 꿇고 주기도를 드립니다. 이렇게 주기도를 드리다가 부부가 키스하게 되었답니다. 화목해진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예배의 축복입니다. 예배는 회개하게 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용서하신 것 같이 사랑하고 용서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화목하신 것 같이 화목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화목은 주일에 온 가족이 손잡고 교회에 와서 예배하는데서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이 예배가 확대되어 가정예배가 되면 가정예배야말로 사랑과 화목을 이루는 행복의 샘터가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가정예배를 세우시기를 바랍니다. 가정예배는 화목의 메이커가 될 줄로 믿습니다.

 

은혜로 가족여러분! 이런 가정의 이 행복을 예찬한 것이 시128편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앙이 가정의 행복의 기반이라는 것이지요, 이 가반에서 온 가족이 근로하고 온 가족이 화목을 누리는데 이 복이 시온에서 나온다고 하셨습니다.(128:1-6)이게 한마디로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도에 행하는 축복입니다. 은혜로가족 여러분! 제육이 집안에 가득해도 화목하지 못하면 천국이 아니라 지옥입니다. 그러므로 화목을 우선합시다. 어떤 대가를 내고서라도 화목을 이루고 사시기 바랍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화목이라는 것은 물질이 아닌 하나님께로 오는 것입니다. 화목은 하나님을 경외함에 있습니다. 참된 예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가 귀도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온 가족이 예수님을 만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참된 예배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주일마다 손잡고 예배에 참석하고, 이 예배가 가정으로 확대되어서 가정예배가 드려지는 가정이시기를 축복합니다. 이 경외와 예배로 화목의 영을 길러서 마른 떡 한 조각만을 두고도 화목할 수 있고, 제육이 가득해도 화목할 수 있는 가정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저는 이것이 이번 설 명절의 하나님의 뜻으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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