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강론

부활이 있으므로

아브라함-la 2019. 7. 3. 17:29

019,6,30, 주일강론  

본문 : 고전15:58

말씀 : 라인권목사

     부활 주일에 시작한 부활장 강해를 오늘 마치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부활은 의심의 여지가 없이 확실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부활을 아는 확신은 사망에 대한 승리의 감격에 이르고 여기서 나오는 감사와 찬송이 넘치게 했습니다. 이 확신, 이 감사와 찬송이 위험을 무릅쓰게 하고, 날마다 육신적 자기를 죽이고, 경건하게 살게 하는 삶의 방식이요, 능력이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를 부활의 승리에 오르게 한 사도는 그러므로라고 이 부활이 있는 성도들이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권하고 격려하므로 위대하고, 영광으로 가득한 부활장을 마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12장의 그러므로와 같은 맥락이지요, 12장의 그러므로구원을 받았으므로 이렇게 살아라,”라는 뜻이라면 본문의 그러므로부활이 있으므로라는 뜻이지요, 구원과 부활이 살려가는 부활의 삶의 동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어서 다시는 사망이 우리를 쏠 수 없는 부활이 있는 사람이라면, 부활은 우리를 어떻게 만들고, 어떻게 살게 하겠습니까?

 

첫째, 사도는 견고하여 흔들리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되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먼저 거짓교사들의 소리나 이 세상 철학에 흔들려 요동하지 않는 견고한 믿음이 되라는 뜻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이 견고하고 흔들리지 말라는 사도의 말씀을 들을 때. 그들은 거짓교사들, 세상 철학에 미혹되어 사도의 교훈을 떠나 신앙이 요동친 시험에 든 것을 부끄러워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신앙이 흔들린 것은 죽어도 다시 사는 부활이라는 이 구원이 분명치 못해서입니다. 이게 이단과 세상 철학에 흔들리고 빠지는 이유입니다. 지금 죽어도 부활의 몸을 입을 것, 이 부활과 천국이 분명한 사람이 무엇이 부족해서 여기저기를 기웃대고 이단의 소리에 귀가 솔깃하고, 이 세상 철학이 들음직하겠습니까? 부활이 있는 사람은 채워진 사람입니다. 사도적 교훈으로 만족합니다. 이 부활 구원을 확신합시다. 이 복음을 가르친 사도의 가르침 안에 굳게 섭시다. 그래서 거짓교사와 이 세상 철학에 믿음이 요동하지 않는 견고한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둘째로, 흔들리지 말라는 것은 부활의 소망으로 이 세상 유혹과 환난에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믿음과 믿음의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한 때 헌신적이던 사람들의 믿음이 파선한 것을 봅니다. 가룟 유다와 데마 같은 사람은 돈의 유혹에 흔들려 그 믿음이 파선했습니다. 베드로는 죽기가 두려워서 주님이 잡히시는 환난에 주님을 세 번 부인 했습니다.이것은 죽어도 다시 산다는 이 부활이 없어서입니다. 부활 이후의 베드로가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한 것이 그 증거입니다. 부활이 있는 사람에게 세상 영화는 속이는 것에 불과 하고 죽음은 부활의 몸을 입게 하는 것에 불과 한 것입니다.

 

두 가지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동 로마 리니치노황제가 기독교를 박해할 때, 로마군 한 부대가 다 예수를 믿었습니다. 이를 안 황제가 부대를 다 얼어붙은 호수의 어름 속에 넣어 두고 예수를 부인하면 살려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를 보고 있던 군사한 사람이 그 사람의 어름구덩이에 대신 들어갔습니다. 천사가 하늘에서 면류관을 가지고 내려오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속사도 교부 폴리갑은 화형 당할 때에 집행관은 그가 연로함을 동정해서 예수를 부인만 하면 살려준다고 했으나, 그는 그분은 평생 동안 나를 부인하지 않았는데 내가 어찌 그를 부인할 수 있겠느냐? ! 그것은 엘리야를 하늘로 올린 불 수레가 아니냐?”며 화형을 받았습니다. 무슨 차이입니까? 부활이 분명하고 분명하지 못한 차이지요. 부활 구원이 분명한 사람은 순교도 한다는 것입니다. 부활이 분명한 사람에게 이 세상 것은 별것 아닌 것이 됩니다. 부활이 있는 사람은 환난과 핍박과 죽음은 부활의 몸을 입게 하는 것에 불과 하므로 흔들리지 않고 믿음의 길을 가는 줄로 믿습니다.

 

제가 지난겨울 병원에 두주 있을 때에, 병실에서 만난 장로님이 제가 퇴원한 후에 이런 말로 축하를 하셨습니다. 목사님 목회하는 교회에서 세계적인 신앙인이 나오기를 바랍니다.”라고 축복했습니다. 그 분은 부흥하라는 흔한 인사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이 문자보고 그 장로님 다시 보았습니다. 그리고 감사했습니다. 저는 세계적인 신앙인은 주님을 닮은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교회는 주님을 닮는 것을 목표로 하는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닮는 것의 정점은 주님과 같이 죽는 것입니다. 주님은 부활과 그 후의 영광을 보시며 십자가의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이렇게 부활의 소망으로 순교하는 것이 주님을 닮는 성화의 정점입니다. 저는 이 순교자가 세계적 신앙가라고 믿습니다. 우리교회가 부활이 분명해서 환난 앞에서 순교할 수 있는 세계적인 신앙가가 나오고, 이 순교의 면류관을 쓰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둘째, 사도는 부활이 있으므로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부활이 분명하면 주의 일을 힘쓰되 항상 힘쓰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사도가 고린도 교회에 이 주의 일에 힘쓰라고 하신 것은, 고린도교회에 주의 일을 마지못해서 하거나 싫증을 내는 사람이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이걸 실제적으로 보여준 사례가 있지요. 말라기 때에 돌아와 성전을 재건한 히브리인들이 제사와 헌물과 십일조를 번폐스럽게 여겨서(1:13) 사람에게 주어도 기분 나쁠 것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1:8) 실망해서입니다. 그들이 바라던 물질적인 영광과 축복이 임하지 않아서 실망했기 때문입니다. 이 실망은 그리스도와 그 구속으로 이루어지는 구원과 천국을 보지 못해서입니다. 오실 그리스도와 그 구원과 구원의 세계가 분명하면 주의 일에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부활과 천국과 이 구원의 주님을 보지 못하면 주의 일에 낙심합니다. 이 소망이 없기 때문에 마지못해서 주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에는 축복이 소원이더니. 지금은 주님이 소원이며. 전에는 감정 중심이더니 지금은 말씀 중심이고, 전에는 쉬지 않고 달라고만 하다가 지금은 쉬지 않고 찬송하고, 전에는 내가 주님 사용하려고 했지만 지금은 사용해 주시기를 원한다.” 이렇게 구원의 은혜, 부활이 분명하면 주의 일에 힘쓸 수밖에 없습니다. 왜요, 부활과 부활의 세계를 알면 이 육체와 이 육체에 있는 것이 종자, 씨임을 알게 됩니다. 이 씨를 심으면 많은 열매를 거둡니다. 썩을 것이, 썩지 않음을, 죽을 것이 죽지 않음을, 천한 것이 영광스러운 것을, 거두되, 무한대의 수확, 추수가 됩니다. 천국은 영원하기 때문에 임시 것이 영원한 것, 무한대가 되는 것입니다.

 

이 부활! 이걸 알면 주의 일 못해서 한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주의 일 밖에 힘 쓸 일이 없게 됩니다. 그게 바로 사는 것, 잘사는 것, 성공, 승리, 영원한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를 우리 한국에서 선교한 민로아 선교사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내 평생소원 이것 뿐 주의 일 하다가 이 세상 이별 하는 날 주 앞에 가리라. 꿈 같이 헛된 세상일 취할 것 무어냐 이 수고 암만 하여도 헛될 것 뿐 일세 엔드류 머레이인가 이름이 분명치 않습니다만, 나는 녹슬어 늙어 죽지 않고 닳아서 죽겠다.”는 말이 있습니다. 초대 한국교회가 총회 설립 기념으로 산동에 파송했던 방지일 목사님이 이 모토로 살았습니다. 100세에도 강단에 섭니다. 부활은 이렇게 사람을 구원의 일에 열정적이 되게 하고, 적극적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 부활로 주의 일 하는 것이 소원이요, 주의 일에 힘쓰다 주님을 만나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셋째, 이제 사도는 이렇게 견고하고 주의 일에 힘쓰도록 격려 하시므로 부활장을 마무리 하십니다.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라” “헛되지 않는다.”는 것은 거절당하거나 실망하게 될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7:22-23절이 이 주석입니다. 선지자 노릇하고, 병고치고 많은 권능을 행한 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내게서 떠나가라이렇게 부끄러움을 당하고, 실망하게 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왜요, 부활이 있습니다. 부활이 있다는 부활의 날에 세상에서 산 것이 다 살아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산대로 갚아주실 수밖에 없습니다. 행한 것, 산 것, 드린 것, 다 살아나옵니다. 우리는 주안에서는 천국 가는 심판을 이미 받았습니다. 우리에게는 이 상급의 심판만 있고요. 이 심판 주, 주님은 이 세상 재판관 같이 억울하게 하지 않고 호리도 틀림없이, 아니 은혜로, 갚아 주십니다.

 

얼마 전에 TV에 반민특위 위원장 하던 분의 아들 되시는 분이 나오셨습니다. 이승만정부가 반민특위 위원장이 던 아버지를 빨갱이로 몰아서 결국 죽게 하고, 후손까지 감시하고 박해해서 지금까지 숨어서 살아 왔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기막힌 일입니까? 독립 운동한 아버지를 고문한 사람은 이 나라에서 권세를 누리고 부귀영화를 세습하지만 독립지사들은 도리어 가난을 물렸습니다. 이게 세상입니다. 그래서 좋은 일하고 이렇게 부끄러움 당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 우리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런 일 두려워할 필요 없습니다. 부활이 있어서, 그날에 행한 이력이 다 살아나오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호리도 틀림이 없고 냉수 한 그릇도 그 상을 잃지 않게 갚아 주십니다.(10:42) 그래서 바울 사도는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고 확신했습니다.(딤후4:8)이게 관제와 같이 부어지는 삶을 살게 하고 이것이 영원한 생명이 된 줄로 믿습니다. 믿음은 이 상 주심을 바라는 것입니다. 이게 능력입니다.

 

저 초등학교 시절 교과서는 미군정 시절 영향이 그대로 남아서 기독교적인 교훈이 교과서에 있었습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아주 이기적이고, 인색한 부인이 지옥에 갔습니다. 그런데 땅에 있는 딸이 아주 성녀와 같은 진실한 신자라서 어머니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이 기도에 감동하신 하나님께서 천사에게 그 어미가 그래도 세상에서 단 하나라도 좋은 일 한 것이 있나 알아보라고 하셨습니다. 천사가 창고에 가보니 그 부인이 한 것은 파 한 뿌리가 전부였습니다. 한번은 거지가 왔는데 먹을 것을 주지 않고, 먹지 못할 매운 파 한 뿌리를 조롱으로 주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파를 내려주라고 명하셔서. 천사가 지옥에 있는 그 부인에게 그 파를 잡고 올라오라고 내려주었습니다. 부인이 이 파를 잡고 올라오다 보니 다른 사람들이 잡고 따라 올라옵니다. 이걸 보고는 이것은 내 파다!”라고 그 사람들을 떨어뜨리려고 흔들자 그만 파가 끊어져서 다시 지옥에 떨어졌습니다. 이걸 보고 하나님이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은 어쩔 수가 없고 안타가워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행한 것이 이렇게 다 살아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안에서 한 것은 파 한 뿌리도 헛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의 일을 하는 우리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마지막 나팔이 울리는 부활의 날, 우리가 여기서 행하고 드린 것이 그대로 살아날 것입니다. 그것이 영원이라는 무한대가 될 것입니다. 이 부활로 우리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부활이 있으므로 견고하여 흔들리지 않는 신앙가가 됩시다.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성도, 천국사업가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날을 바라보고, 이 부활의 세계를 장만하는 삶을 살게 하는 것이 부활인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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